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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일반적으로는 탈출할 방법이 없다.

        

       앨리스와 레오도, 황궁이 내부적, 외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순간을 이용해서 잠입했던 거니까. 결국 제대로 탈출하지 못하고 잡혀버리긴 했지만.

        

       하지만 나는 아니다.

        

       시간을 돌리면 아예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으로 가버릴 수 있을 테니까.

        

       덕분에 글을 어디 옮겨적거나 하지도 못하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내 손에 있는 것 중 가장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서재 안은 조용했다.

        

       이곳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일까? 누군가가 안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을 테고, 황궁에도 경보가 울리고 있겠지만,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환기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문으로 가 안쪽 걸쇠를 채워버렸다.

        

       원래는 황궁이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어차피 나는 밖으로 나가거나 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여기저기 먼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둥근 방안 가운데에만 희미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마력석의 빛을 받는 곳에는, 못이 빽빽하게 들어있는 상자 같은 것이 있었다.

        

       다만 못의 머리는 울퉁불퉁하지는 않았다. 끝부분을 평평하게 맞춰서 판처럼 만들기 위한 것인 듯, 사실 이게 가동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참 특이한 구조물이라고만 생각했을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그 앞으로 가 그 ‘화면’을 아무렇게나 쿡 눌렀다.

        

       내 손가락 모양대로 못 일부가 안으로 눌려 들어갔다. 손을 떼니 화면은 다시 전체적으로 평평한 모습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비어있는 공간에서 일제히 못의 머리가 위로 올라왔다.

        

       표면이 울퉁불퉁해졌다. 하지만 결코 불규칙한 모양은 아니었다.

        

       [원하시는 장서의 명칭을 입력해 주십시오.]

        

       딱 못의 머리 하나 정도로 올라온 그 굴곡은, 글자였다. 황동색 못들이 마치 화면을 표현하듯 글자 모양대로 올라와 있었다.

        

       철컥.

        

       나는 화면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내부에는 타자기 같은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종이를 넣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알파벳 하나하나가 연결된 얇은 철판은 전부 화면 아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서랍을 끝까지 열어서 작게 찰칵, 걸리는 소리가 나도록 한 뒤, 천천히 타자를 입력해나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글자 하나를 누를 때마다 어두침침한 서재 안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04-08]

        

       예언서의 등록번호.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다. 화면 옆에 걸려있는 두툼한 장서 목록에도 쓰여있지 않은 책이니까.

        

       그렇다고 비밀번호 같은 것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까지 들어오는 것 자체가 허용되는 이가 얼마 없으니까.

        

       끼릭끼릭,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화면 뒤쪽의 황동 기둥이 열리더니 가느다란 금속 팔이 하나 나왔다.

        

       드르륵, 뭔가가 틀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팔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원기둥도 돌아간다.

        

       저 높은 곳으로 향한 팔은 그대로 천장 가까운 곳에 꽂힌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기계가 다시 돌아오고, 팔도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내 앞으로, 책의 표지가 잘 보이도록 하여 보여주듯 내놓는다.

        

       [04-08]

        

       책 표지에 쓰여있는 것은 그 숫자가 전부였다.

        

       책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기계 팔은 책을 놓지 않았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책등에 단단히 박혀있는 금속 부품에 정확하게 그 팔 끝이 결착되어있었다.

        

       하지만 내가 책을 펼치는 것은 막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펼치자, 책 윗부분에 은은한 마력석을 가져다 대어 빛을 보여주었다.

        

       “…….”

        

       나는 곧장 책을 넘겼다.

        

       [내가 미래를 보고 적은 것은 그 미래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니.]

        

       이미 미래는 정해졌으니 피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개소리.”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쿵.

        

       문 쪽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드디어 내가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꽤 빠르네.

        

       시간으로 따지면, 책을 본격적으로 읽을 수 있는 건 고작 5분 정도일까.

        

       만약 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예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어야 한다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뭐. 나한테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놓고 중얼거렸다.

        

       “다시.”

        

       *

        

       “황녀님.”

        

       “포드 경.”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날이었다.

        

       나는 환기구 안을 기고 있지도 않았고, 기괴하게 생긴 적과 싸우고 있지도 않았다. 당연히 퀴퀴한 냄새가 나는 먼지 쌓인 곳에서 기괴한 기계 사서에게 책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황궁 복도를 걷다가 사람 한 명을 마주쳤다.

        

       사람 좋은 얼굴의, 요즘 유행하는 카이저수염을 한 기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근대에 입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싶은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의 허리춤에는 검과 총이 동시에 꽂혀 있었다.

        

       내가 쓰는 것보다도 훨씬 크고 긴 리볼버.

        

       어쩌면 저 사람 본인이 입고 있는 갑옷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황녀님께서 세우셨다는 무훈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람 좋은 아저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딱히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노스우드에서 있었던 일이야 남들한테도 비밀이지만, 윈터필드 전장에서 있었던 일은 황실에서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전장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황실 자체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평소라면 누구도 믿지 않았을 헛소리 같은 소문이겠지만, 전장에 있던 그 군인들은 전부 포상으로 장기 휴가와 두둑한 추가금을 받았다.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당연히 나에 관한 이야기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

        

       목격자가 그렇게 많고, ‘윈터필드’의 보증까지 있으니 이야기를 믿지 않을 사람은 없다.

        

       “저희 기사들 하나하나가 모두 황녀님과 같이 가서 황녀님을 직접 보호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사 아저씨가 한 말은 무훈에 대한 칭찬이 아닌 사죄가 먼저였다.

        

       “…….”

        

       이 아저씨는 내가 오전에 이 황궁 안의 기사들을 모두 쏴버리고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고 몰래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내가 시간을 돌려버렸으니까.

        

       “그곳에 황궁 기사가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병사 하나를 위해 기사단이 동행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

        

       뭔가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을 아주 잠깐 지었지만,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섬기는 이 앞에서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는 기사의 예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을 이 상태로 그냥 두는 것도, 조금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황궁 안에서 얼굴을 보아왔던 사람 중 하나니까.

        

       황녀와 말을 섞기 위해서는 그저 위치가 가깝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어야 한다. 지위, 직책, 나이, 그리고 고려해야 할 수많은 것들.

        

       그런 의미에서 이 포드 경이라는 기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한 위치이긴 했다.

        

       “걱정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내 말에 포드 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역시 한순간이기는 하지만, 뭔가 기이한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래, 뭐.

        

       평소에는 내가 하지 않았을 만한 말이긴 하니까.

        

       그리고 포드 경의 얼굴에 다시 은은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최근에 아이를 얻었다고 했던가.

        

       나는 그 사람 좋게 웃는 포드 경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첫째가 살아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거다. 내가 만약 ‘평범한 황녀’였다면 이 사람의 아이와 혼담이 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리스트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고귀한 혈통.

        

       하지만, 내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잃었다. 사고였다는 것 같다. 정확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 사람의 얼굴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마음이라도 추스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실하고 선한 사람인데도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었다.

        

       나는 그 사람을 향해 몇 마디 더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만 한 번 더 끄덕여 주고는 갈 길을 갔다.

        

       뒤쪽에서 조금 늦게 걷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죽으면, 저 사람 영지에 있는 아내와 아이만 남게 되겠지. 많은 사람이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시간을 돌려 없던 일로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분명, 반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오래 지내면 지낼수록, 알고 지내던 사람을 쏘는 것은, 설령 그걸 무효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어쩌면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별생각 없이 행했던 일의 결과가 수많은 이의 인생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있었고.

        

       “…….”

        

       문득, 1학기를 마치던 날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미아 크로우필드가 떠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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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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