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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헤이케의 기사단 중대장에게는 대기 명령을 내려놨다. 소대장 한 명을 동행해 비상시에는 아티팩트로 호출할 수 있게 했다.

     

    “외부인을 들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라스, 너는 내 친구지만 나머지는 친구의 친구지. 숫자는 다섯 명까지야.”

     

    천둥족 본거지로의 출입 허가는 받았으나 경계를 받는 것도 당연했다.

     

    안에는 나와 타냐, 브루노, 휴고, 소대장 한 명이 들어가게 됐다.

     

    “덩치, 타라.”

     

    천둥족 한 명이 곰에 타라고 손짓하니 휴고가 정중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괜찮다. 그 탈것은… 탈것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정성이 떨어져 보이는군. 내 발로 직접 걷겠, 이런.”

     

    말이 길어지자 지루해졌는지 부족민 한 명이 휴고를 허리째로 들어 올려 태웠다.

     

    “라스, 너도 타라. 거리가 조금 된다.”

     

    기슈타가 우물거리던 나무열매의 씨앗을 퉤 뱉으며 내 등을 힘차게 때렸다.

     

    “타고 싶어도 안장에 손이 안 닿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슈타가 내 허리 혁대를 잡아 나를 높이 집어 던졌다. 말실수를 했구만.

     

    매머드 등 위에 엎어지기 무섭게 뒤에서 쿵, 무게감이 들었다. 기슈타가 이 높은 곳을 뛰어 올라탄 것이었다.

     

    “아― 라라라라라!!”

     

    별안간 목청 높여 소리 지르는 기슈타. 그녀의 목소리가 하울링 져 골짜기에 울린다.

     

    우리의 매머드가 그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앞발을 세우더니 콰쾅!

     

    푸르르 콧김을 내뿜으며 골짜기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산등성이에 쌓여있던 눈이 흩날려 우리를 맞이한다.

     

    들썩이는 안장 위에서 느껴지는 체감 속도가 이거는 뭐, F1 레이싱이 따로 없다.

     

    “하하.”

     

    미래에서 이들과 협상할 땐 이미 악마의 피에 영향을 받았기도 했고, 후작령까지 침략당한 상황이기도 했다.

     

    천둥족의 터전에 들어가는 건 나도 생전 처음이다.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완전한 미개척의 땅이다.

     

    황실에만 있다가 대자연 속으로 나오니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시원한가, 라스!”

     

    “넌 춥지도 않아? 살 다 부르트겠다!”

     

    덮어쓴 모피는 그녀의 팔과 등을 겨우 가릴 뿐, 망토처럼 휘날린다.

     

    하반신은 족장답게 온갖 뼈 장식을 주렁주렁 달았어도 상반신은 천 속옷만 한 장 걸친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천둥을 울리는 자에게 이 정도 기개는 필요한 법! 천룡의 후손인 우리 부족의 피부는 강철과도 같다!”

     

    “용의 후손이라.”

     

    천둥족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긴 했지.

     

    특히 기슈타에겐 선조인 용의 피가 진하게 드러났다고 했었나.

     

    순수한 인간은 이런 땅에서는 못 산다.

     

    기슈타가 과일을 한 입 더 깨물고는 만족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것은 발할라에서 나는 과실인가, 라스? 태어나 처음 맛보는 진미로군.”

     

    “제국은 꽤 땅이 넓어서 말이야. 남쪽은 날이 더워서 과일들이 달아. 특별히 여기까지 가져오려고 고생했어. 친구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을 줘야지.”

     

    “마음에 드는군! 손님을 맞아 축제를 열겠다, 너희들, 준비해라!”

     

    기슈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철 도끼를 번쩍 드니 달리던 천둥족들도 각자 무기를 들어 함성을 내질렀다.

     

     

    30분 정도 이동하니 산지 사이로 탁 트인 지형이 나타났다.

     

    “와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륙의 최북단, 미개척 지역에 이런 지형이 있었을 줄이야.

     

    안쪽은 분지였다. 먼 옛날 운석이 떨어져 생겼는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크레이터다.

     

    날이 추워 지형이 그대로 남아 얼음의 평야가 말도 안 되는 넓이로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서쪽으로는 백작령은 고사하고 왕국령까지 이어져 있어 보였다.

     

    이게 전부 야만족의 활동 영역인가.

     

    더 먼 북쪽은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대륙의 끝 같다.

     

    “아라라라라!!”

     

    기슈타의 함성과 함께 우리는 기세 좋게 분지로 쏟아져 내려간다.

     

    매머드와 곰의 다리에 더욱 속도가 붙어 당장에라도 넘어지지 않을지 조마조마한 스릴이 덮쳐왔다.

     

    ‘이런 경험은 다시 회귀해도 못 하겠어.’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우리는 천둥족의 마을에 입성했다.

     

     

     

    ***

     

     

     

    “철과 나무로 건물을 지었군요. 이들은 언어도 쓸 수 있고, 최저한의 문명이 있습니다. 바위족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그리고 전부 여자입니다.”

     

    휴고와 브루노가 동행하며 소감을 냈다.

     

    확실히 부족민 전원이 밖으로 나와 우리를 보고 원숭이 울음소리를 내는 건 조금 꺼림칙했다.

     

    한 부족민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더니 기세 좋게 브루노에게 들이대며 자신의 견갑근을 뽐냈다.

     

    “남자, 궁딩이 튼실, 왕가왕가 한다!”

     

    기슈타가 그녀에게 이빨을 내보이며 위협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왕가왕가 안 돼. 친구의 친구다! 다른 놈들에게도 전해라. 손님을 건드리면 머리통 깨질 줄 알라고!”

     

    “아, 알았다. 얌전히 있는다.”

     

    부족민이 기가 죽어서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피했다.

     

    기슈타가 다른 부족민들에 비해 아주 덩치가 크거나 근육이 우락부락하지는 않은데도 그들이 철저히 따르는 걸 보면 타고난 아우라가 있나 보다.

     

    “왕가왕가가 뭡니까?”

     

    브루노가 내게 묻길래 대답해줬다.

     

    “이들은 여성으로 구성된 전투 부족이다 보니 마음에 든 외부 남자들을 데려다 자손을 남기거든. 특이하게 여자만 낳는다고 해.”

     

    “방금 그 천둥족은 제가 마음에 들었던 겁니까?”

     

    “그렇지.”

     

    “흠, 저는 괜찮은데요.”

     

    브루노의 반응에 나와 타냐, 소대장이 질겁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이들의 신체 능력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골반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착취당할걸.”

     

    “더 좋군요.”

     

    내 설명을 들은 소대장이 특히 겁에 질렸다. 환대고 뭐고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낌새였다.

     

    타냐가 그런 그의 등을 두드려 긴장을 풀게 해 주었다. 휴고는 별 생각 없어 보였다.

     

     

    광장 비슷한 곳을 지나다 보니 묘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기운이 넘치는 천둥족은 기슈타와 그녀의 직속 부하들, 마을 밖으로 나온 몇 명뿐이었다.

     

    나무로 지은 참호 같은 집 안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부족민들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기슈타, 여기엔 몇 명이나 살고 있어?”

     

    “아아, 백보다 많다! 백보다 많은 마을을 다섯으로 나눠 관리하는 중이지.”

     

    천둥족은 총 오백에서 육백 정도인가. 한 개 대대 규모다.

     

    이 마을에는 백스물 정도 살고 있지만 나와 있는 인원은 오십 정도로 보인다.

     

    “집 안에 있는 부족민들은?”

     

    “신경 쓰지 말아라. 얼마 전의 전투에서 다친 부상자다. 시간이 지나면 일어난다.”

     

    “부상자라.”

     

    기왕 기슈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시작한 관계다.

     

    그녀는 나름 의리 있는 성격이니 빚을 한두 개 더 만들어 둬서 나쁠 건 없다.

     

    “나는 의사야.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지.”

     

    “라스, 고치는 자.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고친다는 뜻이었나?”

     

    “바로 그 말대로야. 부상자를 보게 해 준다면 낫게 해 주겠어.”

     

    “흠.”

     

    기슈타의 입장에서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다.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이 수상한 선물을 주며 안방까지 들어와서는 병자를 보여달라고 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겠지.

     

    하지만.

     

    “라스, 너는 좋은 친구다! 이리 와 보아라. 네가 꼭 보아야 할 환자가 있어.”

     

    기슈타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신이 나서는 내 팔을 잡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게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이랄까.

     

    한 번 우호적으로 인식한 아군은 언제까지고 아군이다. 배신한다면 그때 도끼로 다져버리면 그만이다.

     

    나쁘게 말하면 단순하고,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

     

    나는 첫 단추를 잘 끼웠지 싶었다.

     

     

    기슈타를 따라 움막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두 명의 부족민이 반쯤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다.

     

    “안 좋아 보이는군요. 열이 높습니다. 탈수도 보입니다.”

     

    휴고의 의견이었다.

     

    “동의해. 진단.”

     

     

    [부상 : 열상]

    [부상 : 바이러스성 감염]

    [부상 : 중독]

    [위치 : 우측 종아리]

     

     

    “부상 입은 경로는?”

     

    내 질문에 기슈타가 대답했다.

     

    “이틀 전, 전투가 있었다. 빙하족 놈들이 우리 영역을 침범했지.”

     

    “빙하족이라.”

     

    “그들도 야만족입니까?”

     

    휴고가 내게 물었다.

     

    “야만족이랄까, 조금 똑똑한 설인 무리야.”

     

    “설인이라면 마물 아닙니까?”

     

    “진화한 놈들이라 얕보면 안 돼. 도구도 쓸 줄 알아.”

     

    미래에서는 야만족 습격 이벤트에서 바위족, 천둥족과 함께 랜덤으로 등장하는 부족 중 하나였다.

     

    “중독과 감염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겠네. 이런 환경에서는 바이러스도 생존할 수 없을 텐데.”

     

    우선 진통제와 항생제를 처방하고 상처를 처치한 후 붕대로 감았다. 반대쪽 환자는 휴고에게 맡겼다.

     

    곧 끙끙대던 부족민들이 눈에 띄게 편한 반응으로 바뀌었다.

     

    “오호, 정말로 고쳤잖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마법인가, 라스?”

     

    “마법은 아니고. 혹시 괜찮으면 이 환자들을 며칠 더 돌보게 해주겠어? 그럼 더 빨리 낫게 할 수 있어.”

     

    “친구에게 민폐를 끼쳐서도 면목이 없지만, 친구 좋다는 것도 뭐겠나!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기슈타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팡팡 쳤다. 덕분에 척추가 나갈 뻔했다.

     

    ‘이 바이러스, 의심스러워.’

     

    아직 감염은 치료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바이러스가 아니라 혹시 벌써 마왕군이 야만족에게 손을 쓰던 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 분지는 이를테면 거대한 실험장. 야만족을 모두 악마의 피로 감염시켜 살아남은 강한 이들을 때가 됐을 때 제국에 풀어놓으려는 심산이 아닐까.

     

    살아남은 야만족이 그때그때 달라서 나타나던 부족도 랜덤이었던 거고.

     

    본래 바위족도 여기에 몰아넣을 생각이었겠지만 이미 백작령에서 전멸해버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꽤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셈이다.

     

    ‘여기에서 악마의 피만 제거해도.’

     

    열 개가 넘는 배드엔딩을 한 번에 없앨 수 있고, 더 잘 풀리면 천둥족을 동맹으로 삼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처리해도 될 일이지.’

     

    어디까지나 중요한 목표는 폭풍석을 가지고 돌아가 아셀라를 고치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는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라스, 계획보다 더욱 크게 잔치를 열어야겠어!”

     

    내 사념은 기슈타의 커다란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환자를 고치는 자라니, 아주 멋진 일이다. 먼저 발할라로 떠난 내 친구들이 자네를 알면 배 아파하겠군!”

     

    기슈타는 고약한 농담을 하고는 껄껄 웃으며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움막 밖으로 나갔다.

     

    “친구여, 나도 너에게 보답하마. 말만 해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숴주마!”

     

    그녀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땅에 내리쳤다.

     

    ―쿠르릉!!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내린다.

    땅에 꽂힌 벼락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지면을 갈라냈다.

     

    흠, 이런 보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별로 땅을 부수는 파괴 행위를 원하진 않는다. 돌멩이 하나면 된다.

     

    폭풍석의 주제는 어떻게 꺼내볼까, 생각하는 찰나.

     

     

     

    상태창의 숫자가 움직였다.

     

     

    ―――――――――――

     

    · 굿엔딩

     

    · ■■■ ■, 다시 ■■에서 21%

    · ■■■■, ■■■, ■■지다 0% → 5%

    · ■■■ ■■ 0%

     

     

    ―――――――――――

     

     

    이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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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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