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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사신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의 뒤편에서 펄럭이던 어비스의 검은 커튼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누아-자카누바는 늪 속에 던져진 시체처럼 심연을 향하여 서서히 잠겨갔다.

         

       그와 동시에 사신이 내건 저주도 풀렸다.

         

       악몽에 시달리며 바닥을 뒹굴던 단원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주인의 품에 안겨 얼린 몸을 녹이던 비둘기와 쥐도 콜록거리며 제정신을 차렸다.

         

       서리가 내려앉았던 잔디가 원래의 푸른색을 회복해나갔다.

         

       모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엘라는 원더스타인을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장막 너머로 사라져가는 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였다면 ‘우리가 필요하니까 구했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보여준 호의와 친절도 애써 꾸며낸 것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사신과 대치했을 때 한 대화를 떠올렸다.

         

       지난 몇 달간 쌓아온 추억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말.

       그건 분명 그의 진심이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드러낸 것보다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에 오르려는 목적, 괴물 단원들을 끌어모은 이유, 저주 역병과 그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왜 많은 사람을 학살했는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그래도 지금의 그는 어제까지의 그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당신도 수고했어…….”

         

       쑥스러움을 간신히 숨기며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원더스타인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짐짓 화난 듯 입술을 삐죽였다.

         

       “무시하는 거야?”

         

       그가 반응할 때까지 투덜거릴 참이었던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유라크네의 정성이 가져다준 축복의 시간이 끝났다.

       고통과 피로가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찔한 추락감에 기절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의식을 잡았다.

         

       “쿨럭.”

         

       기침 한 번에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검붉은 핏덩이였다.

         

       지금까지 1000번 넘게 유라크네의 정성을 썼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능력을 사용한 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차를 마셔도 강화된 힘으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얼른 1시간이 가길 기다렸다가 다음 차를 마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핑된 힘을 한계까지 끌어다 썼다.

       단단함을 믿고 충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재생력도 물 쓰듯이 퍼다 썼다.

         

       그렇게 몸에 누적된 부하는 그것이 해제되는 순간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유라크네의 정성은 6.0의 육체로 12.0의 힘을 내게 하는 버프지, 12.0의 육체로 개조하는 게 아니었다.

         

       “큭, 으윽……쿨럭쿨럭.”

         

       남은 데볼루트라도 있었다면, 임시 개조라도 할 텐데.

       그나마도 없었다.

       데볼루트가 딱 0이 되면서 엘라와 연결되어 있던 음향실 채팅도 꺼져버렸다.

         

       “이, 이봐, 당신?”

         

       그녀가 조심히 그를 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그와 자신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단원들은 아직 제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워했고, 수녀는 그의 동료를 살핀다고 바빴으며, 기사는 회관에서 치료 도구들을 가져오겠다며 떠났다.

         

       지금 그를 보살펴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달렸다.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바닥을 나뒹굴며 피를 쏟아내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에, 엘라 양?”

         

       그는 숨을 간신히 내쉬며 그녀를 바라봤다.

         

       엘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처음 봤다.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후후, 모, 몸이 제멋대로……날뛰는군요…….”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쓴 그의 근육은 가위로 헤집은 실뭉치처럼 가닥가닥 끊어지고 있었다.

       재생력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지는 속도는 빨랐다.

         

       “그 힘을 써서……이런 거야?”

       “네, 후후. 마, 많이 무리했군요……. 그런데…….”

         

       그는 그녀의 손에 든 물건을 바라보며 웃었다.

       거기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저를 찌를 건가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품에 집어넣었다.

       아까 사신과 대치하면서 꺼낸 물건인데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는 줄 몰랐다.

         

       “그, 그럴 리 없잖아!”

       “크윽, 크크, 절 죽이려들 줄 알았는데요……. 흐흐, 보다시피 절호의 기회잖아요……?”

         

       그의 말에 엘라는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이 악마가 사람을 뭐로 보고.

       그녀는 울컥해서 외쳤다.

         

       “시끄러워! 당신한테 물어볼 게 많다고 했잖아! 그전에 죽일 수는 없지!”

       “후후, 그런가요……? 쿨럭, 크으…….”

         

       그녀는 그가 입에 고인 피 때문에 말하는 것도 호흡하는 것도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의 몸을 받쳐서 그가 입에 있는 것을 뱉도록 도와주었다.

         

       피와 내장 조각을 몇 번이나 토한 그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조금 낫군요…….”

       “미안하지만 이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의 몸은 마구잡이로 요동치고 있었다.

       피부가 저 혼자 찢어지면서 피를 벌컥벌컥 토하기도 했고, 근육들이 제멋대로 비틀어지며 그사이의 뼈를 부서뜨리기도 했다.

         

       숙련된 의사가 와도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경련은 조금 있다 가라앉을 겁니다. 문제는 지혈인데…….”

         

       그때였다.

       멀리 마을 입구에서 이바넨코가 품에 뭔가를 잔뜩 안고 달려왔다.

         

       “모두 괜찮으시오? 붕대, 연고, 비상 포션, 동상약 등 다 챙겨 왔소! 급한 사람은…….”

       “잠시 기다리고 있어. 필요한 걸 가져올 테니까.”

         

       그녀가 그를 조심히 바닥에 눕혀두고 일어섰다.

       둘 사이에 서로를 안심시키려는 짧은 미소가 오갔다.

         

       사신의 붉은 눈동자에 그런 둘의 모습이 비쳤다.

         

       어둠 속에서 물결치는 어비스의 검은 커튼.

       대부분이 어둠과 동화됐지만, 아직 한 장만은 남아 일렁이고 있었다.

         

       사신은 그 남은 틈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두부의 대부분이 파괴된 그였지만 의식이 있었다.

         

       타격을 입은 즉시 어비스의 통로에 몸을 담은 덕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는 검은 기운들이 그의 회복을 도왔다.

         

       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원더스타인을 바라봤다.

       예측한 대로 그의 힘은 시간제한이 있었다.

         

       아쉽게 됐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자신이 이겼을지도 모르는데.

         

       사신에게 남은 힘은 팔 하나를 간신히 움직일 정도였다.

       그는 한쪽 팔에 힘을 주었다.

       낫을 든 팔이었다.

         

       그는 이제 서서히 닫히려는 마지막 틈새를 바라봤다.

       저 사이로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막 등을 돌린 엘라는 이쪽으로 몰린 사람들의 시선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녀의 등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뒤를 돌아본 엘라는 장막을 헤치고 나오는 그것을 발견했다.

         

       빛을 흡수하는 것 같은 새까만 색의 칼날.

       사신의 낫이었다.

         

       “피해!”

         

       엘라가 외치기 전부터 원더스타인도 그것을 발견하고 몸을 움직이려 했다.

       옆으로 한 바퀴만 구르면…….

         

       그때, 사신이 하나 남은 눈을 번뜩였다.

       그의 숨결이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얼어붙은 속박을 거는 빙결의 저주였다.

         

       “큭!”

         

       원더스타인의 몸이 바닥에 딱딱 달라붙었다.

         

       사신의 낫이 그 위를 내리쳤다.

         

         

       ***

         

         

       드발체프 성당의 늙은 신부가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그는 눈을 감기 진전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고작 20명을 치료하고 기절하다니.

         

       이래 보여도 대교구의 부주교까지 했던 몸이거늘.

       오늘은 적어도 30명, 아니, 40명을 치료해 보이고 말리라.

         

       그는 자신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주민들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선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늙은 종지기만이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었다.

         

       “이, 이보게?”

       “신부님!”

         

       종지기가 그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좀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앞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신부님!”

       “왜, 왜 이러나? 응?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환자들은 다 어디 갔어?”

       “그, 그게 말입니다…….”

         

       그때, 교회의 주방 쪽 문이 벌컥 열렸다.

       핑크빛 머리카락의 수녀가 고개를 불쑥 내밀며 외쳤다.

         

       “종지기 아저씨! 이제 신부님을 가서 깨워……응? 신부님, 일어나셨습니까? 잘 됐습니다! 함께 식사하지 말입니다!”

       “시, 식사? 자, 잠시만 그대는 누군가?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하겠습니다! 어서 오시지 말입니다!”

         

       늙은 신부는 어리둥절했지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그녀의 일행이 음식을 내왔다.

       주춤거리는 눈빛을 한 소심한 인상의 남자였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저주 역병에 걸린 환자들이 괴물로 변한 것과 마귀 떼의 습격, 사신의 출몰까지.

       이야기를 듣는 신부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가더니 마지막에는 토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럼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대부분이 아니라 모두……입니다.”

       “모두? 교회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있지 않소?”

       “그……사신이 날린 참격 중 하나가 교회 지붕을 맞췄는데…….”

         

       그때, 옆에 있던 종지기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 밑에 있다가 모조리 깔려 죽었습니다!”

       “허어.”

         

       신부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는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으로 있긴 힘들군. 이보게, 교회 지하에 가서 묵혀든 치즈와 포도주를 좀 꺼내와 주게.”

         

       신부는 그렇게 종지기를 식당에서 내보내고는 두 남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그 검은 마도사 추적대로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신 같은 고위 마귀와 붙을 수 있는 퇴마사 그룹, 그것도 마도사와 수녀가 같이 다니는 팀은 내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지. 이래 보여도 대교구의 부주교까지 했던 몸일세. 그 정도 소식은 듣고 있지. 그래. 내가 얼마 전에 올린 정보 때문에 왔겠군.”

         

       그가 올린 정보는 마을에 있는 한 의사의 이야기였다.

       그는 10년 전쯤에 이 마을로 흘러든 사람이었다.

       그는 실력은 뛰어났지만, 수상하리만큼 자기 내력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얼마 전, 서커스 그랑프리가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성당으로 달려와 고해성사를 했다.

         

       “그는 17년 전, 2회 서커스 그랑프리에 의료팀으로 참가했던 사람이었네.”

       “그런 큰 대회의 의료팀이라……. 그런 사람이 왜 시골 마을의 의사로 은둔한 거죠?”

       “그는 검은 마도사를 직접 봤다고 하더군.”

         

       신부의 말에 두 사람은 긴장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은 검은 마도사를 봤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지금까지 많이 만나봤다.

       하지만 그중에 정신병원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 그는 의료인으로서의 사명도 다 내팽게치고 도시를 탈출했던 모양이야. 테러에 당해 신음하던 부상자들을 다 지나치고 도망쳤다고…….”

       “그분은……?”

         

       바예르가 머뭇거리는 태도로 되물었다.

       신부는 그들이 이미 예상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역병 초기에 죽었네.”

       “아……. 그렇군요. 그럼 그분이 그리셨다던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

       신부가 검은 마도사의 그림을 입수했다는 소식을 상위 교구에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신부는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더니 고해성사실에 들어가 작은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왔다.

         

       바예르와 발렌티나는 그가 내민 두루마리를 펴보았다.

         

       “이건?”

         

       그것은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듯 괴상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귀 퇴치 훈련을 받은 발렌티나는 이보다 더 끔찍한 마귀의 그림도 보았다.

       그녀가 놀란 것은 그의 생김새가 이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신체 중 특징적인 것 몇 가지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촉수처럼 뻗어 나온 다리와 그 끝에 달린 칼날.

       팔 비슷한 것에서 튀어나오는 뼈의 창.

         

       그것은 분명 어젯밤 성당을 습격한 살덩어리 괴물이 몸을 변형시켰던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그 괴물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바예르와 신부는 눈을 마주쳤다.

         

       세 사람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검은 마도사.

       그는 저주 역병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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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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