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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

       

       대부분의 엘프가 레몬, 애플, 라벤더, 민트카카오 같은 식물과 관련된 간단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비해 꽤나 멋들어진 작명이다.

       

       그리고 중세의 복잡한 이름은 그 자체로 권위이고 힘의 상징이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식어. 그것이 복잡한 이름이 붙은 이유였고……이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세계수의 후손, 영원한 여왕, 천년을 암약해 온 노괴, 판 대륙 모든 암부의 흑막, 그리고 역사적인 모솔 처녀.

       

       이브를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았고, 하나하나가 비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브의 능력 또한 비범했으니, 만약 그녀가 마음먹었다면 세상을 한번 뒤엎고도 남았으리라….

       

       …라는 생각으로 흑화 이벤트가 예정되었고, 그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지.

       

       이른바 ‘이브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플롯이다.

       

       그리고 지금.

       

       “크, 큰일 났슴다 요나넴!”

       “보스가 가출한 검다!”

       

       “엣.”

       

       진짜로 이브가 사라졌다.

       

       …설마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이브의 흑화가 내 업보라고?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라도 한 것 같은 충격.

       

       물론, 이브의 설정에 관해 모르는 엘리는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 아닌 손님을 향해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거, 가끔 외출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어딜 가는지 주변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해야 하는 의무도 없고.”

       

       “엘리 점장넴의 말은 맞슴다.”

       “하지만 보스는 조금 특이한 경우임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레몬과 애플이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보스는 지난 몇 세기간 판 그레이브를 떠난 적이 없슴다.”

       “하지만 오늘 가게에 가보니, 보스의 중요한 물건이 싹 사라져있었슴다. 마치 멀리 떠날 것처럼 말임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거나,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며 불안해하는 둘.

       

       판 그레이브 바깥에 다른 왕국이 있는 것처럼, 엘프에게도 엘프의 왕국이 있다.

       

       세계수가 있던 대수림은 통째로 미궁에 흡수당하고 무너질 뻔했으나, 이브의 지도 아래 온갖 경쟁을 이겨내고 다시금 엘프만의 땅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런데 이브가 자신의 왕국을 내팽개치고 판 그레이브에서 안 팔리는 마도구점이나 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브는 더 이상 여왕이 아니니까.

       

       판 그레이브에 머문다는 것은 그녀가 여왕직에서 물러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다시 엘프 왕국으로 돌아간다면…….

       

       “여왕의 귀환인가.”

       

       엘프들은 기꺼이 공석으로 비워둔 왕좌를 이브에게 내어줄 것이다.

       

       내 혼잣말을 들은 엘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뭐, 뭐야. 요나 너 설마 알고 있었어? 어떻게?”

       

       “제 뒤를 봐주는 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단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사랑의 여신의 이름으로 둘러댔다. 엄밀히 말하면 전생의 기억이지만, 날 여기로 불러낸 건 여신 같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제야 납득한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분이라면 당연히 알겠지. 그나저나 요나야. 내가 무슨 이상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데….”

       

       “말해보세요. 엘리라면 조금 이상한 마음이 있어도 괜찮으니까요.”

       

       “오늘따라 좀 잘생겨 보인다?”

       

       “후…어떻게 그런 말을! 침대로 따라오세욧! 거기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죠! …라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 이번에 모르가나를 쓰러뜨린 공 때문인지 권능이 강화됐거든요.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아.”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권능을 받은 것이지만…그 안에 기존 권능의 강화 효과도 있단 말이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와 입을 꾹 다문 레몬과 애플.

       

       그러고 보니 둘에게는 내가 사랑의 여신의 성자라는 설정을 말 안 했었나?

       

       아니지. 분명 이브 앞에서 풀돌 여신상을 꺼내며 넌지시 암시했을 때 옆에 레몬과 애플도 있었는데.

       

       “음….”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둘의 모습에 모든 걸 이해했다.

       

       과연. 내가 이브의 정체를 알았듯, 이브의 위치를 여신이 속삭여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 거구만.

       

       초조한 표정으로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둘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말해두는데, 이건 비밀이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오히려 이브 씨를 찾는 데 문제가 생길 거야.”

       

       “걱정하지 마십쇼. 저 입 무겁슴다.”

       “레몬이 헛소리를 하면 살인멸구를 하겠슴다.”

       

       자신만만하게 AAA급 가슴을 통통 두드리는 레몬과, 결연한 표정으로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애플.

       

       레몬이 기겁하며 애플로부터 멀어지려 했으나, 그보다 내 대답이 반 박자 빨랐다.

       

       “이브 씨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아….”

       “그러언….”

       

       “다만, 까딱 잘못하면 이브 씨에게도 판 그레이브 전체에도 큰 파멸이 찾아올 거라는 건 알아.”

       

       “화, 확실한 검까?”

       “저희는 어찌해야 하는 검까?”

       

       마치 구원을 갈구하는 신도처럼 절박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레몬과 애플. 다만, 나는 진짜 성자도 아니고 사이비 교주도 아니라 둘이 원하는 답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나도 몰라.”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가출이 파멸의 시작이 맞는 건지도 모르고, 어딜 가야 이브 씨를 찾을 수 있는지도 몰라. 내가 아는 건 이브 씨의 운명에 그러한 불길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꽤 높은 확률이라는 것뿐이니까.”

       

       주어진 실마리는 없다. 애초에 이브가 제 발로 모습을 감춘 것이라면 찾기도 힘들겠지.

       

       하지만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나 때문에 상심해 자포자기한 것 같잖아.

       

       일찍이 나는 내가 뿌린 재앙의 씨앗을 모두 회수하겠노라 다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는 아직 유효한 맹세다.

       

       내가 작가라면, 한때 판 대륙의 창조주였다면…완성되지 못한 이 세계에 책임을 지고 싶노라고.

       

       이번 가챠 이후로 머리속에 정리해 두었던 계획을 전부 폐기했다.

       

       지금껏 길드에게…정확히는 신전에게 내 존재가 들킬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건만.

       

       이래서야 약간의 문제를 감수하더라도 세게 나갈 수밖에 없다.

       

       “레몬. 애플. 너희가 엘프 사이에서도 모솔처녀아싸찐따거렁뱅이 취급 받더라도 판 그레이브의 엘프 커뮤니티 자체는 알고 있지?”

       

       “말이 너무 함다….”

       “제가 모솔 처녀인 건 사실이지만, 아싸 찐따 거렁뱅이인 건 레몬뿐임다.”

       

       갑자기 처맞는 바람에 서운한 표정을 짓는 레몬과, 은근슬쩍 한 발 빼며 자매를 제물로 바치는 애플.

       

       둘의 모습에 키득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튼 알고 있으면 엘프 커뮤니티에 소문을 하나 내줘.”

       

       “소문 말임까?”

       “가능하긴 합니다만…무슨 소문임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깐의 고민. 하지만 필요하다면 하는 수밖에 없지.

       

       “새로운 왕이 자신의 반려를 맞이하기 위해 세계수의 막내딸을 찾고 있다고 말이야.”

       

       그리 말하며 조용히 권능을 발동시켰다.

       

       머리 위에 얹어지는 가시나무 왕관. 그 모습에 경건한 표정이 된 레몬과 애플이 중얼거렸다.

       

       “바실리우스….”

       “초대 국왕의 상징….”

       

       둘이 되지도 않는 어설픈 예를 표하며 고개를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슴다! 구석구석 소문내고 오겠슴다!”

       “엘프는 물론이요 판 그레이브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슴다!”

       

       “그래그래. 아, 소문만 내고 내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어차피 이브 씨만 찾아오면 되는 거잖아? 알 사람은 어떻게든 알아내겠지만…잡다한 놈들의 주목을 받는 건 싫어서 말이야.”

       

       “명심하겠슴다.”

       “절대 요나넴이 보스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비밀로 하겠슴다!”

       

       “…….”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 흑화해서 가출한 것 같은데….

       

       정정해 주고 싶었으나, 내 왕관을 본 이후로 의욕이 충만해진 레몬과 애플이 우다다 뛰쳐나간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에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권능을 해제했다.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던 인지능력과, 전능감이 사라지며 느껴지는 허탈함에 가까운 역체감.

       

       어쩐지 전보다 더 바실리우스의 힘이 강해진 것 같은데…아, 조금 다른가?

       

       바실리우스는 세계수의 권능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랑의 여신과 달리 진작에 죽어 사라진 신의 힘.

       

       당연히 여기에 성장의 여지는 없다.

       

       나 자신의 성장 가속이라는 패시브와, 식물의 성장을 가속시키는 액티브형 능력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 둘의 본질은 같다. 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의 차이일 뿐 어쨌든 급속 성장 아닌가.

       

       액티브 형식으로 활용할 때는 신성력을 소모해 위력을 강화할 수 있긴 한데….

       

       이건 주먹을 평범하게 휘두르냐, 세게 휘두르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죽은 신의 권능은 본질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니까.

       

       헌데, 따로 신성력을 소모한 것도 아닌데 바실리우스의 힘이 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왕관을 썼을 때 느껴지던 인지의 확장과 전능감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

       

       하지만 이는 정말 바실리우스의 위력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내가 더 많은 힘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거지.

       

       사랑의 화신의 효과 중 하나인 정신력 대폭 강화.

       

       아마 그 덕에 이전에는 적당히 조절하던 바실리우스의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감각을 확장시키는 힘은 까딱 잘못하면 주인을 상하게 하니, 본능적인 안전장치가 있었던 거겠지.

       

       캬! 역시 5성 권능. 벌써 실전에 도움이 되는 기능이 발견됐구만!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새하얗게 질린 엘리가 녹슨 양철 인형처럼 삐걱이며 물었다.

       

       “반, 려?”

       

       “아, 세 번째 반려에요. 첫 번째는 당연히 엘리고요.”

       

       “아.”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엘리. 하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저는 잠깐 베니 좀 보고 올게요! 오늘 하루도 화이팅이에요 엘리!”

       

       그 전에 요정과 은화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기에 걸렸슴다…

    심지어 꽤 심함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이번주에는 주5일 연재에 실패할 수도 있슴다..

    근데 저번주에 6일 연재했던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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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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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


       


       대부분의 엘프가 레몬, 애플, 라벤더, 민트카카오 같은 식물과 관련된 간단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비해 꽤나 멋들어진 작명이다.


       


       그리고 중세의 복잡한 이름은 그 자체로 권위이고 힘의 상징이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식어. 그것이 복잡한 이름이 붙은 이유였고……이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세계수의 후손, 영원한 여왕, 천년을 암약해 온 노괴, 판 대륙 모든 암부의 흑막, 그리고 역사적인 모솔 처녀.


       


       이브를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았고, 하나하나가 비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브의 능력 또한 비범했으니, 만약 그녀가 마음먹었다면 세상을 한번 뒤엎고도 남았으리라….


       


       …라는 생각으로 흑화 이벤트가 예정되었고, 그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지.


       


       이른바 ‘이브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플롯이다.


       


       그리고 지금.


       


       “크, 큰일 났슴다 요나넴!”


       “보스가 가출한 검다!”


       


       “엣.”


       


       진짜로 이브가 사라졌다.


       


       …설마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인가? 이브의 흑화가 내 업보라고?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라도 한 것 같은 충격.


       


       물론, 이브의 설정에 관해 모르는 엘리는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 아닌 손님을 향해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거, 가끔 외출도 하고 그러는 거겠지. 어딜 가는지 주변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해야 하는 의무도 없고.”


       


       “엘리 점장넴의 말은 맞슴다.”


       “하지만 보스는 조금 특이한 경우임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레몬과 애플이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보스는 지난 몇 세기간 판 그레이브를 떠난 적이 없슴다.”


       “하지만 오늘 가게에 가보니, 보스의 중요한 물건이 싹 사라져있었슴다. 마치 멀리 떠날 것처럼 말임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거나,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며 불안해하는 둘.


       


       판 그레이브 바깥에 다른 왕국이 있는 것처럼, 엘프에게도 엘프의 왕국이 있다.


       


       세계수가 있던 대수림은 통째로 미궁에 흡수당하고 무너질 뻔했으나, 이브의 지도 아래 온갖 경쟁을 이겨내고 다시금 엘프만의 땅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런데 이브가 자신의 왕국을 내팽개치고 판 그레이브에서 안 팔리는 마도구점이나 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브는 더 이상 여왕이 아니니까.


       


       판 그레이브에 머문다는 것은 그녀가 여왕직에서 물러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다시 엘프 왕국으로 돌아간다면…….


       


       “여왕의 귀환인가.”


       


       엘프들은 기꺼이 공석으로 비워둔 왕좌를 이브에게 내어줄 것이다.


       


       내 혼잣말을 들은 엘리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뭐, 뭐야. 요나 너 설마 알고 있었어? 어떻게?”


       


       “제 뒤를 봐주는 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단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사랑의 여신의 이름으로 둘러댔다. 엄밀히 말하면 전생의 기억이지만, 날 여기로 불러낸 건 여신 같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제야 납득한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분이라면 당연히 알겠지. 그나저나 요나야. 내가 무슨 이상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데….”


       


       “말해보세요. 엘리라면 조금 이상한 마음이 있어도 괜찮으니까요.”


       


       “오늘따라 좀 잘생겨 보인다?”


       


       “후…어떻게 그런 말을! 침대로 따라오세욧! 거기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죠! …라고 하고 싶지만, 실제로 이번에 모르가나를 쓰러뜨린 공 때문인지 권능이 강화됐거든요.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아.”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권능을 받은 것이지만…그 안에 기존 권능의 강화 효과도 있단 말이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와 입을 꾹 다문 레몬과 애플.


       


       그러고 보니 둘에게는 내가 사랑의 여신의 성자라는 설정을 말 안 했었나?


       


       아니지. 분명 이브 앞에서 풀돌 여신상을 꺼내며 넌지시 암시했을 때 옆에 레몬과 애플도 있었는데.


       


       “음….”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둘의 모습에 모든 걸 이해했다.


       


       과연. 내가 이브의 정체를 알았듯, 이브의 위치를 여신이 속삭여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 거구만.


       


       초조한 표정으로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둘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말해두는데, 이건 비밀이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오히려 이브 씨를 찾는 데 문제가 생길 거야.”


       


       “걱정하지 마십쇼. 저 입 무겁슴다.”


       “레몬이 헛소리를 하면 살인멸구를 하겠슴다.”


       


       자신만만하게 AAA급 가슴을 통통 두드리는 레몬과, 결연한 표정으로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애플.


       


       레몬이 기겁하며 애플로부터 멀어지려 했으나, 그보다 내 대답이 반 박자 빨랐다.


       


       “이브 씨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아….”


       “그러언….”


       


       “다만, 까딱 잘못하면 이브 씨에게도 판 그레이브 전체에도 큰 파멸이 찾아올 거라는 건 알아.”


       


       “화, 확실한 검까?”


       “저희는 어찌해야 하는 검까?”


       


       마치 구원을 갈구하는 신도처럼 절박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레몬과 애플. 다만, 나는 진짜 성자도 아니고 사이비 교주도 아니라 둘이 원하는 답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나도 몰라.”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가출이 파멸의 시작이 맞는 건지도 모르고, 어딜 가야 이브 씨를 찾을 수 있는지도 몰라. 내가 아는 건 이브 씨의 운명에 그러한 불길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꽤 높은 확률이라는 것뿐이니까.”


       


       주어진 실마리는 없다. 애초에 이브가 제 발로 모습을 감춘 것이라면 찾기도 힘들겠지.


       


       하지만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나 때문에 상심해 자포자기한 것 같잖아.


       


       일찍이 나는 내가 뿌린 재앙의 씨앗을 모두 회수하겠노라 다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는 아직 유효한 맹세다.


       


       내가 작가라면, 한때 판 대륙의 창조주였다면…완성되지 못한 이 세계에 책임을 지고 싶노라고.


       


       이번 가챠 이후로 머리속에 정리해 두었던 계획을 전부 폐기했다.


       


       지금껏 길드에게…정확히는 신전에게 내 존재가 들킬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했건만.


       


       이래서야 약간의 문제를 감수하더라도 세게 나갈 수밖에 없다.


       


       “레몬. 애플. 너희가 엘프 사이에서도 모솔처녀아싸찐따거렁뱅이 취급 받더라도 판 그레이브의 엘프 커뮤니티 자체는 알고 있지?”


       


       “말이 너무 함다….”


       “제가 모솔 처녀인 건 사실이지만, 아싸 찐따 거렁뱅이인 건 레몬뿐임다.”


       


       갑자기 처맞는 바람에 서운한 표정을 짓는 레몬과, 은근슬쩍 한 발 빼며 자매를 제물로 바치는 애플.


       


       둘의 모습에 키득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튼 알고 있으면 엘프 커뮤니티에 소문을 하나 내줘.”


       


       “소문 말임까?”


       “가능하긴 합니다만…무슨 소문임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깐의 고민. 하지만 필요하다면 하는 수밖에 없지.


       


       “새로운 왕이 자신의 반려를 맞이하기 위해 세계수의 막내딸을 찾고 있다고 말이야.”


       


       그리 말하며 조용히 권능을 발동시켰다.


       


       머리 위에 얹어지는 가시나무 왕관. 그 모습에 경건한 표정이 된 레몬과 애플이 중얼거렸다.


       


       “바실리우스….”


       “초대 국왕의 상징….”


       


       둘이 되지도 않는 어설픈 예를 표하며 고개를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슴다! 구석구석 소문내고 오겠슴다!”


       “엘프는 물론이요 판 그레이브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슴다!”


       


       “그래그래. 아, 소문만 내고 내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어차피 이브 씨만 찾아오면 되는 거잖아? 알 사람은 어떻게든 알아내겠지만…잡다한 놈들의 주목을 받는 건 싫어서 말이야.”


       


       “명심하겠슴다.”


       “절대 요나넴이 보스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비밀로 하겠슴다!”


       


       “…….”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 흑화해서 가출한 것 같은데….


       


       정정해 주고 싶었으나, 내 왕관을 본 이후로 의욕이 충만해진 레몬과 애플이 우다다 뛰쳐나간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에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권능을 해제했다.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던 인지능력과, 전능감이 사라지며 느껴지는 허탈함에 가까운 역체감.


       


       어쩐지 전보다 더 바실리우스의 힘이 강해진 것 같은데…아, 조금 다른가?


       


       바실리우스는 세계수의 권능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랑의 여신과 달리 진작에 죽어 사라진 신의 힘.


       


       당연히 여기에 성장의 여지는 없다.


       


       나 자신의 성장 가속이라는 패시브와, 식물의 성장을 가속시키는 액티브형 능력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 둘의 본질은 같다. 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의 차이일 뿐 어쨌든 급속 성장 아닌가.


       


       액티브 형식으로 활용할 때는 신성력을 소모해 위력을 강화할 수 있긴 한데….


       


       이건 주먹을 평범하게 휘두르냐, 세게 휘두르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죽은 신의 권능은 본질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니까.


       


       헌데, 따로 신성력을 소모한 것도 아닌데 바실리우스의 힘이 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왕관을 썼을 때 느껴지던 인지의 확장과 전능감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


       


       하지만 이는 정말 바실리우스의 위력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내가 더 많은 힘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거지.


       


       사랑의 화신의 효과 중 하나인 정신력 대폭 강화.


       


       아마 그 덕에 이전에는 적당히 조절하던 바실리우스의 힘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감각을 확장시키는 힘은 까딱 잘못하면 주인을 상하게 하니, 본능적인 안전장치가 있었던 거겠지.


       


       캬! 역시 5성 권능. 벌써 실전에 도움이 되는 기능이 발견됐구만!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새하얗게 질린 엘리가 녹슨 양철 인형처럼 삐걱이며 물었다.


       


       “반, 려?”


       


       “아, 세 번째 반려에요. 첫 번째는 당연히 엘리고요.”


       


       “아.”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엘리. 하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저는 잠깐 베니 좀 보고 올게요! 오늘 하루도 화이팅이에요 엘리!”


       


       그 전에 요정과 은화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기에 걸렸슴다...

    심지어 꽤 심함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이번주에는 주5일 연재에 실패할 수도 있슴다..

    근데 저번주에 6일 연재했던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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