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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4

       편지지의 첫 번째로 등장한 한 문구.

       

       『지금껏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한순간에 휘둥그레진 프란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게 뭐야…?”

       

       어쩐지 진이 안온다싶더니, 편지 하나만 달랑 남겨두고 사라졌다. 프란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대체 왜?’

       

       의문과 당혹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혼란.

       

       사고가 정지하고 감정이 요동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머릿속에서 이 소리가 메아리친다. 뿌연 안개가 가득해진 것처럼, 프란체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수확제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나? 진은 프란체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4시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여전히 의혹이 가득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아니,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겠지.”

       

       프란체는 고개를 휘젓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이 끝났으니 잠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다는 거겠지. 금방 돌아올 거라고 하겠지.

       

       머릿속에 존재하는 모든 긍정적인 회로를 가동하며 편지를 읽었다.

       

       ───────────────

       

       우리의 첫 시작은 첫 꽃을 피우던 봄이었습니다.

       

       새로운 만남과 시작을 상징하는 계절이지요.

       

       저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멋대로에 주관이 강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가에서 핍박을 받으며 철저하게 배척을 당했고,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갑갑해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돕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상처투성이에 지우지 못할 흉터로 가득한 당신의 마음에 따뜻함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동정이라 불리오는 값싼 감정에서 시작된 마음입니다만, 그 마음은 제가 당신을 돕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처음 목표로 잡았던 사업을 위해 프리다를 무너트렸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불합리한 취급을 받으며 마담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구하며, 당신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프란체가 제 생각대로 정확히 움직여줘서 어찌나 마음이 기쁘던지. 그때의 고양감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에덴이 프란체에게 혼처를 강요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데카르트의 위신을 해친다며 그 어떤 도전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를 보며 저는 불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악평 퍼트리기였습니다.

       

       저는 프란체 당신이 그렇게 사람 속을 잘 긁는지 몰랐습니다. 뒤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생소하여 좋은 경험이었고, 더욱더 당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황실 파티를 즐겼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자칫하면 기대치보다 못 미칠 수도 있었습니다만, 프란체가 정말 잘해줘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흑마법은 부작용이 있지 않습니까?

       

       마법을 배우는 건 필수였지만, 이 점에 대해선 조금 후회했습니다.

       

       프란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며 걱정이 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만, 지금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으셔서 다행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프란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행복했습니다. 나날이 성장해나가는 당신을 보며 얼마나 뿌듯했는지.

       

       그런 당신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죽을 것처럼 몰려오는 고통을 참았습니다. 하지만 프란체를 걱정토록 만들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모두와 함께했던 파티가 즐거웠습니다.

       

       비록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모두가 참여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행복했습니다.

       

       같이 수확제를 즐기고, 단둘이 탑에 올라 마법의 무대를 감상하며 키스했던 감촉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아직도 감촉이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제 손은 한없이 떨리고, 마음은 아련함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프란체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과의 추억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은 이별을 상징하는 겨울입니다.

       

       그동안 함께한 모든 순간들은 그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고, 상처 없는 이별을 위해 용기 내야 합니다.

       

       앞으로 프란체가 걷게 될 길에서 행복하길 바라며,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도 저는 당신을 응원할 겁니다.

       

       곧 새로움을 상징하는 봄이 다시 옵니다.

       

       이제 진 바렌베르크라는 인물은 잊으시고, 다른 이들과 함께 새로운 만남을 찾아 앞으로의 날을 이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간 고맙고 사랑스러운 당신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 대해 감사함을 전합니다.

       

       프란체 데카르트.

       

       당신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

       

       편지의 내용은 완벽한 이별을 알리고 있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다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 없었으니 말이다.

         

       뿌득. 프란체의 손에 힘이 들어가 진이 남긴 편지가 구겨졌다.

       

       “웃기지 마…….”

       

       별안간 주변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프란체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진짜 장난은 그만하라고.”

       

       프란체의 마음에 깊은 상실과 혼란이 가득했다. 그간 진과 함께한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순간들이 단번에 무너졌다.

       

       가슴이 시렸다.

       

       무언가가 심장을 옥죄이는 듯했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숨을 쉴 수가 없다.

       

       두려움.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할까 불안하다.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올라가며 속이 좋지 않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토하고 싶다.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대체 왜…?”

       

       생각해 보니 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속삭이는 사랑에 대답해준 적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걸까? 자신이 어떤 실수라도 한 것일까? 사실 마음을 전했던 게 진은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그는 배려가 깊었으니 마지못해 받아줬던 게 아닐까?

       

       프란체는 의문과 자책의 고리에 사로잡혔다.

       

       “왜…?”

       

       발밑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점점 늘어나며 영토를 넓혀간다. 헬레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서둘러 프란체를 불렀다.

       

       “공작님? 공작님!”

       

       그러나 헬레나의 목소리는 프란체에게 닿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대체 왜!!!”

       

       영토를 넓혀갔던 그림자가 형태가 되어 올라왔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슬이 이곳저곳을 난타했다.

       

       쾅! 콰직! 콰자작!

       

       허름한 나무문이 부서지고, 진이 살아왔던 숙소가 부서진다. 헬레나는 다급히 프란체에게 달라붙었다.

       

       “공작님!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프란체는 거칠게 호흡을 들이쉬며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서랍에 진의 구속구가 있다. 그거라면 진의 위치를 알 수 있고, 각인을 통해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서둘러 서랍을 열고 뒤지는 프란체. 그러나 예상밖의 결과가 나왔다.

         

       “이게 무슨…?”

         

       구속구가 끊어져 있다.

       

       

       * * *

         

         

       시각은 점심.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일원들이 데카르트 공작저에 모였다.

       

       진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소집했다.

       

       “진이 사라졌어.”

       

       프란체가 말을 꺼냈다. 서리에 낀 듯한 차가운 목소리에 다들 등골에 오한이 깃들었다.

       

       “달랑 편지 하나만 남겨두고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케일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카자르와 라데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들 반응이 이상하네.”

       

       프란체의 공허한 눈빛이 모두를 둘러본다. 살기가 가득하여 등골이 오싹해지고 닭살이 올라온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우웅…! 프란체의 마력이 움직인다. 발밑의 그림자가 넓어지며 시커먼 사슬이 올라와 모두를 결박시켰다.

       

       “공작님…!”

       “이게 무슨…!”

       “풀 수가 없다고…?”

       

       케일과 라데아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소드 마스터. 카자르는 초월 마법사 문턱에 도달한 대마법사. 하지만 그 누구도 프란체의 결박을 풀 수 없었다.

       

       그녀의 감정이 흑마법을 증폭시켜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다들 진실을 말해. 알고 있던 거지? 진이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근데 내게만 숨긴 거지?”

       

       감정의 과잉으로 인해 사슬의 속박이 점점 강해진다. 당장이라도 살을 파고들어 뼈를 으깨버릴 듯한 압박.

       

       “나는 너희를 믿기로 했는데, 믿었는데 다들 나를 배신했네?”

       

       쾅! 프란체가 테이블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어!!”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그 선혈에는 프란체의 분노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다들 사실대로 말해. 자백의 저주를 걸었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프란체는 케일을 쏘아봤다.

       

       “케일,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똑바로 대답하렴.”

       

       지금껏 시선을 피하던 케일은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처음 고용됐을 때, 진 바렌베르크가 말했다. 자신은 머지않아 곧 떠날 거라고. 나는 그의 대체자라고 하더군.”

       

       프란체는 조용히 케일의 용태를 살폈다. 자백의 저주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아 진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네?”

       “그래.”

       “왜 알려주지 않았니?”

       “진 바렌베르크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대체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프란체는 여전히 의문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라데아.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니? 이유는?”

       

       라데아는 시선을 피한 채 “네….”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유는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목숨과 직결된 문제라고밖에…….”

       

       케일도 이에 동조했다.

       

       “나도 그렇게 들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라 하더군.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자백의 저주는 제대로 걸려있다. 케일과 라데아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는 뜻.

       

       ‘설마.’

       

       예전에 말했던 시한부. 그간 보여줬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 숙소에 있었던 핏자국들.

       

       ‘그 불치병 때문에 죽는다고…?’

       

       프란체의 눈썹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럼 죽을 때가 다가와서 떠났다는 거야?”

       

       우웅! 프란체의 마력이 일렁이며 사슬의 결박이 강해졌다.

       

       “크윽…!”

       “공작님!”

       “이건 좀 풀어주세요…!”

       

       그들의 애타는 목소리는 프란체에게 닿지 않았다. 오로지 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

       

       ‘아니야. 아직 물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어.’

       

       진의 질병을 알고 있고, 치유도 시도해봤던 사람. 카자르 유플레인.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으리라.

       

       “카자르.”

       “네…?”

       “너는 알고 있는 거지?”

       

       휙. 카자르는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카자르!”

       

       프란체의 호통과 함께 결박이 더욱 강해졌다. 결국엔 살점을 파고들기 시작한 검은 사슬.

       

       “으윽…!”

       “공작님 우선 이것부터!”

       

       점점 강해지는 결박에 카자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프란체는 폭주한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우선 사슬부터 풀어주세요.”

       

       사르륵. 그제야 사슬의 압박이 좀 풀어졌다.

       

       “카자르, 진은 죽어가고 있던 거야?”

       “맞아요.”

       

       프란체의 눈이 커졌다.

       

       “그럼, 그럼 죽을 때가 되어서 나한테서 떠나갔다는 거야…?”

       

       카자르는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맞아요.”

       

       거짓을 말하자 별안간 전신을 태우는 듯한 고통이 카자르를 휘감았다.

       

       “으윽!”

       

       자백의 저주. 거짓을 말하자 프란체의 살기가 더욱 강해졌다.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자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 프란체의 경지에서 자백의 저주를 이 정도로 사용할 수 있다니. 말이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말하는 수밖에.

       

       “…정확히는 살기 위해서 떠난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프란체는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살기 위해서 떠났다고?”

       

       카자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까지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진실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끝도 없을 테니.

       

       “공작님과 함께 있으면 진 씨의 질병이 악화해요. 그간 그런 고통을 느꼈던 이유도 공작님 때문이고요.”

       

       아까와는 달리 발동하지 않는 자백의 저주. 지금 말하는 모든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진 씨는 쇼크로 인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었어요. 오로지 공작님을 위해서요.”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프란체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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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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