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5

        “뭘 그리 수군대고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커질세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싫어도 뭐 어쩌겠는가. 당장은 호기가 아니라는데 기다려야지.

       

        저자세로 나가니 남자는 헛기침 몇 번으로 관심을 꺼 버렸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 다행이다.

       

        저 일그러진 애호박처럼 생긴 남자의 이름은 뫼스바이어라고 한다. 아카데미 2학년생을 주로 가르치는 교수라고.

       

        딱 봐도 교수처럼 생기긴 했다. 관상을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래.

       

        “우선 여기 모이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이 자리에 수많은 사람이 참석하였습니다. 아르가나 공작, 슈케일라 후작, 헤를라인 백작, 허드슨 백작, 유에일 자작, 이르가나 자작….”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이런 식으로 잔잔하게 시작하여 마지막에 무게를 주는 건 달변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연설 방식이다.

       

        “우리 모두, 제국에 숨어든 마수와 그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역적이란 블랜튼 공작과 그 공녀를 일컫는다.

       

        이 나라 귀족들도 알고 있었다.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 그 둘이라는 것쯤은.

       

        “역적 블랜튼 공작은 수년간 황제 폐하를 자신의 수발처럼 부렸습니다. 비이성적인 정책을 펼쳐 나라를 안팎으로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국고가 바닥을 보이는 와중에도 매일같이 연회를 벌이는 것은 물론이요, 민초의 곤궁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입니다. 이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손을 허공에 휘적이며 설득력을 높이는 로베스피에르. 그의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연설이 강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저희는 일전 제1황자의 권리 복구와 통화정책의 변화를 폐하께 상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블랜튼 공작에 의하여 두 권유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죠. 부탁을 청한 건 폐하인데 공작 나리께서 답을 하셨으니….”

        “폐하의 인감이 찍혀 있었으니까요. 그 자리에서 자칫 항변했다간 반역죄로 효수를 당했을 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부 사정이 심각하다. 이대로 두면 이 나라 망하겠는데.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원소마도만 웬만큼 익히고 엘프 나라로 망명하면 돼.

       

        “…해서 우리는 확신하였습니다. 블랜튼 공작은 역적 내지 제국에 숨어든 마수라고.”

       

        이것이 제국에게 시련이라면 시련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난세 말이다.

       

        제국이야 늘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어왔다. 천 년 넘게 마수에게 침략당했고, 치정은 깨끗한 적이 없었다. 무릇 땅덩이 큰 나라가 겪는 문제다.

       

        “저희는 이 자리를 빌려 역적 블랜튼을 타도하고 황실 부흥을 위해 목숨을 내걸 것을 엄숙히 약조합니다.”

       

        짝짝짝. 박수갈채를 받은 로베스피에르는 품에서 빈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 약조가 언약으로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해 혈서를 쓰려고 합니다. 필리우트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일신 분기하실 분들께서 직접 손을 따 이곳에 성함을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언제 준비한 건지 바늘을 꺼내 제 손가락을 찌르는 참석자들. 그중에는 헤를라인 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쥐새끼처럼 빠져나오려는 하품을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기숙사 돌아가는 길에 커피나 한잔 사 가야겠다.

       

        “음? 저 아이들은 이름을 쓰지 않는 건가?” 

       

        뭐야. 왜 갑자기 우리한테 그래.

       

        “버멜과 에테르는 아직 학생입니다. 이런 위험한 일에 직접 휘말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학생이건 뭐건 무슨 상관이오? 거사를 치르는 데 애하고 어른 없거늘.”

       

        로즈마리의 수하는 날 여기서 공구리칠 작정이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 내 손이 바늘 따위에 상처 날 수 없다는 것을 빌미로 조져버리는 것.

        둘. 나중에 혈서를 내가 반란에 찬동했다는 증거로 사용하여 조져버리는 것.

       

        가장 좋은 방법은 혈서를 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송구스럽지만 저흰 자격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버멜은 다른 나라 출신이라 논외이고, 저는 아직 평민의 몸. 귀하신 분들의 대업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엔 염치가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너희 치정 문제에 간섭하기 싫다는 뜻이다.

       

        “틸레트를 졸업하면 못 해도 남작 작위를 수여받네. 군말 말고 적게나.”

        “일을 벌이시는 건 올해 내 아니신가요? 그때도 귀족 신분은 아닐 겁니다.”

        “이 녀석이 왜 이리 말이 많아? 적으라고 하면 적지, 쯧.”

       

        이런 식으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지구에서도 몇 명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지뢰 밟았다 치고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는데, 여기선 당장 나가질 못하니 원.

       

        “혹여 제가 틸레트를 졸업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학교 다니다 말 겐가?”

       

        의외의 발언이었는지 몇몇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뭐 내가 잘못 말했나? 이르면 2학년쯤 자퇴하고 카우렐리아로 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너 방금 뭐라고….”

       

        버멜은 뱁새처럼 째진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제발 여기에만 있어 줘.

       

        아, 그랬지. 공부 웬만큼 하면 엘프 나라로 튈 거라는 얘길 아직 안 했었네.

       

        “자자, 두 학생 신변은 제가 보증할게요. 그러니까 교수님도 너무 핍박 주지 마세요.”

       

        보다 못한 헤를라인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선생님, 고마워요!

       

        “헤를라인 백작. 당신이 무슨 이 아이들 보호자라도 됩니까?”

        “두 명 모두 제 반 학생이거든요. 그러니 보호자는 저겠죠?”

        “흠…….”

       

        정론이었는지 뫼스바이어는 말문을 닫았다.

       

        열댓 명에 달하는 귀족이 제 손가락을 붓 삼아 두루마리를 피로 적셨다. 극세사처럼 부드러운 종이에 다홍빛 선혈이 자수를 놓는다.

       

        “그래서 거사 일시는 언제요?”

        “에테르 학생이 플레어 소형화를 성공하는 그 즉시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인다. 이제야 완전히 이해됐다. 이사장이 날 이곳에 부른 이유는 반역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일정을 짜기 위함이다.

       

        “이것들 보쇼. 하스펠트 공작의 것을 도둑질해 간 고양이가 플레어를 소형화할 수 있겠소?”

       

        꽈배기처럼 양손으로 팔짱을 한 뫼스바이어는 가소롭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물론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단언하지 말겠나. 자네 능력 없잖나?”

       

        허어. 이 사람 봐라.

       

        “못해도 겨울방학 전까지는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두세달 안에 가능하다고?”

        “네. 두 가지 조건만 있다면요.”

       

        뫼스바이어를 향해 손가락을 모으며 V자를 그렸다. 이사장은 말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첫째는 이번 공모가 저의 신변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 적어도 이번 학기 학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것이야 어렵지 않네. 아르가나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너와 네 친구는 지켜주도록 하지.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두 번째는 훨씬 간단합니다.”

       

        남은 가운뎃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잇는다.

       

        “돈입니다.”

        “돈이라.”

        “네, 연구 자금 말입니다.”

       

        무언가를 연구하려면 그만큼 자본이 있어야 한다. 

       

        “다만 자본 자체는 여러분의 호의로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학기 불안정한 물가에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건 자본보다는 재료에 가깝습니다.”

        “재료?”

        “어떤 재료가 필요한가? 말해 보게.”

        “미세한 공정이니만큼 관련 물질이 필요할 겁니다. 순수한 실리콘과 갈륨, 비소, 황, 구리, 철, 니켈, 티탄산 칼륨, 우라나이트, 라돈 가스, 품질 좋은 마력초, 트랜지스터를 포함하여 재앙급 마수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마석들, 금, 은, 백금, 베릴륨 결정, 붕산…….”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에 이사장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젓는다.

       

       그래, 놀랐겠지. 말만 이렇고, 사실상 재료가 될 만한 건 다 구해달라는 소리였으니까.

       

        “알겠네, 알겠어! 그, 그런데 그걸 전부 다 쓸 계획인가…?”

        “조만간 연구계획서를 보내드릴 터이니 구체적인 양은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30분에 걸친 회의는 나의 말로서 끝을 맺었다. 지하실을 나가기 전 뫼스바이어의 등목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걸 알아챈 건 덤이다.

       

        “호르데는 앞으로도 여기 있을 거란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렴. 그럼 선생님은 먼저 가 볼 테니까…. 둘이서 이상한 짓 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헤를라인 선생님이 나가셨고.

       

       방이 텅텅 비었다. 남은 사람은 나와 버멜 둘뿐이다.

       

        “…여길 뜨겠다고? 왜?”

       

        황망한 눈으로 허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버멜.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목소리를 떤다.

       

        “이르면 내년쯤에는 여기서 배울 게 없어. 나머지는 일리야드로 편입해서 공부한 뒤 귀환하려고 하는데…. 걱정할 필욘 없어. 마왕 잡을 건 잡고 말끔하게 사라져 줄 테니까.”

       

        로테나 프레이 같은 사람들과 더는 못 만나는 건 아쉽겠지. 하지만 지구에는 홀로 남은 가족이 있다. 직장이 있고, 지위가 있고, 쓰다 만 논문(존나 중요함)이 있다. 또한 못 다 이룬 목표가 있다. 

       

        마수가 판치는 세계보단 저쪽이 낫다. 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겠지.

       

        “…….”

        “왜 말이 없어?”

        “아니, 넌 나랑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뭐가?”

        “원래 살던 곳이 그립긴 한데, 왜인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별일일세.”

       

        나는 셔츠 주머니에서 마력초 두 개비를 꺼냈다. 하나는 내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지구에서 온 동료에게 물렸다. 버멜은 공계마도로 산소를 끌어모았다. 그 자리에 내가 손가락을 튕겨 전류를 흘리자 불이 붙었다. 뭉게구름처럼 하얀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간다. 우리는 바닥에 연기를 내뿜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친구, 나는 이 세상에선 약해.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게임 지식뿐이지. 다른 엘프는 다 찾아온다는 정령과도 계약 못 해서 여기 온 거야.”

        “그래도 틸레트에 입학할 정도면 노력 꽤 했나 본데.”

        “다 게임에서 배운 거야.”

        “허어.”

        “그래도 여기선 나름 벌어먹고 살 수 있어. 마왕만 물리치면 최소한의 대접은 받을 테고, 여생은 편해지겠지. 어때, 속물적이지? 난 네 생각보다 착한 사람이 아니야.” 

        “널 착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같은 한국인에게 당한 것만 수십 번이다. 감정적으로 싸웠건, 뒤통수를 맞았건. 날 이런 성격으로 만든 건 저쪽 세상 사람들이다.

       

       짱돌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버멜에게 한 마디를 더하였다.

       

        “얘기했지? 우리가 맺은 건 맹세가 아니라 계약이야. 기한은 마왕을 잡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너도 지구로 돌아온다면 맥주 한 잔 사 주고, 여기 남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아.”

        “…아쉽네. 그러니까 말하는 게 꼭 기계 같은데?”

        “기계 맞아.”

        “농담이지?”

        “저쪽 세계에서도 부품처럼 살다가 넘어왔어. 여기라고 크게 다르진 않더라.”

       

        버멜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제멋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여신이 널 왜 금안족 소녀의 몸에 가두었는지 알 것 같아.”

        “뻔하지 뭐. 좆같으라고 아니겠어?”

        “그건 아니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호기심이 동해 곧바로 물어보았지만 버멜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런 건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다나 뭐라나.

       

        어느덧 마력초의 첨단이 짧게 타들어 갔다. 정화 마법으로 담뱃재를 털어낸 버멜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참치캔을 깠다.

       

        “아무튼 나는 로즈마리의 눈을 피해야 해. 기말고사가 있을 때까진 여기서 계속 살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담임 통해서 들어와.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착한 건 몰라도 사람은 좋은 건가.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이탈했다. 엘프 혼자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찍게 내버려 두고, 나는 기숙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니…. 지금 여기서 뭐 해?”

       

        내딛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