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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교황청이 있는 도시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일주일이었다.
처음 이틀 동안은 쉬지 않고 걸었다.
사흘째에 발견한 마물에 의해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마구간에 묶여 있던 짐말을 간신히 발견했지만, 그래봤자 명마와는 거리가 먼 시골의 늙고 병든 짐말이기에 속도는 기대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앨리스에게 불평할 여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 긴 이동시간을 이용해, 앨리스는 그동안 쉬지 않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교황청에 도착한 후 보고할 내용을 미리 전부 만들어 암기했고, 보고 이후 자신이 준비해야 할 물건을 구하기 위한 루트를 짰다.
숲으로 돌아갈 때 날쌘 명마를 구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에, 두 경우를 모두 고려한 시간제한을 만들기도 했다.
사실 어떤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시간은 촉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교황 혹은 교단 전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제한 시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남은 시간엔 마왕성으로 갈 세 사람의 무력을 예상하며 대형과 전술 등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동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생각해야 할 건 그보다 훨씬 많았기에, 앨리스의 머리는 단 한 순간도 쉬질 못한 채 핑핑 돌아갔다.
물론 그녀의 몸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혹사당하고 있었다.
사흘에 한 번씩만 잠자리에 들고, 말이 지쳐 쓰러지려 할 때면 억지로 신성력을 부어 일으켰다.
그러나 마침내 교황청이 있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앨리스는 상황이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여신이시여.”
교황청이 있던 자리엔 커다란 그을음을 잔뜩 몸에 바른 기둥과 벽이 간신히 흔적만 남긴 채 겨우 서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인간들의 시체와 마물들의 고깃덩이가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고, 모든 집과 가게들은 텅 비어있거나 무너져 내려 있었다.
간혹 발견되는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정신을 놓고 멍하니 돌아다니는 이들과 그런 이들을 습격해 옷가지와 먼지 한 줌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작은 소지품마저 강탈하려는 강도들 뿐이었다.
앨리스는 아연실색했다.
보고는 둘째치더라도, 이런 상황에선 검이나 갑옷은커녕 돌아갈 말조차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타고 온 늙은 짐말마저, 도시에 도착한 직후, 픽 쓰러지고는 그대로 죽어버렸다.
“… 늦었나.”
앨리스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담담히 중얼거렸다.
아직 마왕이 부활하기도 전이거늘, 이미 나라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나라, 아니 이 대륙 전체의 사람들이 간직하고 공유하는 기본적인 상식과 사상의 중심인 여신교의 교황청이 무너진 걸 보니, 어쩌면 멸망한 것은 나라뿐이 아니라 이 대륙 전체.
어쩌면 인류 전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싸늘한 감상만이 앨리스의 머릿속을 거칠게 긁으며 지나갔다.
그때였다.
“앨리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앨리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가구가 마구 넘어져 있는 한 술집 안에서 경첩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문짝 사이로 누군가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안쪽에 잔뜩 때가 낀 큼직한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에릭?”
“어디 있다가 이제 와?”
“대체 무슨 일이…”
“그만, 일단 조용히… 우선 자리를 옮기자. 따라와.”
에릭은 검지 손가락을 제 입술에 붙여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보이고는 그 손가락으로 따라오라는 듯 앨리스를 향해 까닥거렸다.
*
에릭을 따라 들어간 주점 안에는 멀쩡한 가구 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의자건 책상이건 죄다 다리가 부러져 기울어져 있었고, 사방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있었다.
시체 하나도 마치 장식품처럼 구석에 앉아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었고, 그런 시체 주위엔 하루살이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에릭은 술집 카운터 뒤쪽 바닥에 설치된 문을 열었다.
보통은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앨리스는 에릭을 따라 지하 창고로 들어갔다.
“아늑하지?”
에릭은 헛소리를 내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우스갯소리를 내뱉는 친구의 여유가 반갑기는 했지만, 앨리스의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은 어떻게 봐도 아늑 보다는 엉망이라는 단어가 훨씬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앨리스는 구태여 맞장구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교황청이 없어지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뭐야, 여신교 갑옷을 안 입고 있길래 상황을 아는 줄 알았는데?”
“갑옷은 잃어버렸어.”
“그래서 그렇게 얇게 입고 있던 거야?”
에릭은 피식 웃으며 커다란 술통 위에 걸터앉았다.
앨리스는 그런 에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시를 떠나있는 동안 겪었던 일이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 중에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네.”
“여기 이야기는 딱히 놀라울 게 없어.”
“무슨 소리야?”
“지금 온 나라가 다 이 모양이니까.”
“…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직접 들어 확인하게 되니 그 충격이 남달랐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멸망한 모양이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폭동이야?”
“그렇지.”
“원인은?”
“…”
에릭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분명 처음엔 투명한 유리병이었겠지만, 지금은 안의 내용물이 아주 간신히 비쳐 보일 만큼 탁하고 더러운 유리병.
분명 마실만한 술이 아닐 테지만,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에릭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술이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맛 역시 끔찍한지, 에릭의 목 넘김은 몇 달 전 맥주를 마실 때와 다르게 거칠게 삐걱거리고, 이따금 울컥 역류하기도 했다.
“에이, 씨발.”
에릭은 손으로 입가에 흘러넘친 술을 대충 닦아 털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술의 향은 무척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에릭은 입에 고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마왕.”
“…!”
“하, 반응을 보니 사실인가 보네. 마왕이 부활한 거야? 아니면 안 죽은 거야? 아니면 새로운 마왕이 나타난 건가?”
“…어떻게 알았어?”
“소문이 돌았지. 뭐 그냥 마물들이 날뛰는 바람에 세상이 워낙 흉흉해지니까 나온 개소리인 줄 알았지만,”
에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앨리스의 코를 훅 찔렀다.
“사실 감이 좋은 놈들은 다 느끼긴 했어, 뭔가 존나 큰일이 날 것 같다고.”
“…”
“그야 그렇지. 이 분위기를 사실 모르기란 쉽지 않잖아?”
에릭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고작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마왕이 건재하던 시기를 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기 중을 떠도는 멸망의 향기를.
정확한 사실까지는 알 수 없었겠지만, 정보가 아닌 본능이, 머리가 아닌 피부가 먼저 느낀 것이리라.
“처음엔 사람들이 죄다 교황청과 곳곳의 성당으로 몰려들어 갔지. 네 덕분에 여신교가 워낙 인기 좋았잖아.”
“..”
“그러다 어떤 미친 또라이 도둑놈이 교황청을 털었어.”
에릭의 욕설에서 앨리스는 어떤 친근함 같은 느낌을 감지해냈다.
기계 심장이 살짝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 네 조직원이야?”
“존나 슬프게도 맞아.”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네가… 시켰어?”
“아무도 안 시켰어. 그냥 사람들이 많아지니 헌금도 많을 거라 생각한 병신 새끼의 단독행동이었지.”
“…”
앨리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느샌가 쥐어져 있던 주먹이 부들거렸다.
앨리스는 심호흡하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
에릭은 그런 앨리스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설명을 이었다.
“근데 그 새끼가 가져온 물건 중에는 마왕이 사실 안 죽었다는 교황의 자필 문서가 껴 있던 거야.”
“난리가 났겠네.”
“하, 난리가 났지.”
“그걸 퍼트린 거야? 정보상한테 팔아넘겼어?”
“미쳤어? 당연히 입단속 시켰지, 근데 어떤 놈이 술 처먹고 떠드는 건 못 막았어. 뭐 시발, 조직이래 봐야 엠창 인생들 모아둔 건데 입단속이 될 리가 있나.”
“…”
에릭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대충 그다음은 알겠지, 당연히 난리가 났지. 무려 마왕이잖아. 그런 엄청난 소식을 숨겼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
“교황님은…”
“죽었어. 교황청 안에서도 비밀이었는지, 사제들이 앞장서서 목을 베더라.”
“…맙소사.”
앨리스는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여신상이란 여신상은 죄다 개박살이 났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집요하게 노린 테러가 매일 백 건씩은 일어났지. 귀족들은 매일같이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리치다 목이 떨어졌고.”
“병사들을 대동한 귀족들을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그 병사들이 앞장서서 귀족들을 두들겨 팼지.”
알만했다.
마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강렬한 공포를 동반하는 이름.
사람들이 이렇게나 광기의 소용돌이에 무력하게 휩쓸린 이유는 희망의 부재 때문이었다.
마왕이 건재하던 시절엔 용사마저 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용사가 없었다.
마왕을 무찌를 존재가 아무도 없었다.
앨리스는 새삼 왜 교황께서 마왕의 존재를 그토록 비밀에 부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네 양돈장도 다 박살 났어.”
“… 풀려났나?”
“아니 모조리 다 죽었지.”
에릭은 조금 남은 술병을 빤히 바라보다 바닥에 휙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난 술병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겼다.
“여기만 난리 난 게 아니랬잖아. 수도는 어떻겠어? 이런 고급 정보를 숨겨온 윗대가리들을 향한 분노가 어디로 향했겠냐고.”
“왕…”
“그리고 양돈장에도 왕족 하나 있지 않았어?”
그랬다.
발더를 잡으러 갔던 항구마을.
그곳에서 발 더 대신 찾은 왕국의 제3 왕자 베론 시오리드.
분명 그를 양돈장에 가둬 뒀었다.
“양돈장에 있던 놈들, 다 한 쓰레기 하는 것들이었잖아. 사람들 분노가 하늘을 찔렀지. 죄다 끔찍하게 죽었어. 네 양돈장이 차라리 천국으로 보일 지경이었지.”
“…하,”
“뭐 그 덕분에 네 인기는 조금 유지가 됬었거든? 그때 네가 있었다면 이 광기가 조금은 수그러들었을지도 모르겠다.”
“…”
앨리스는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타이밍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엇나갈 수 있는지,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에릭에게, 혹은 에릭이 몸담고 있던 조직에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누구의 책임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진실을 숨긴 여신교,
진실을 떠벌린 에릭의 조직,
자리를 비운 앨리스.
아니, 이 모든 일의 책임은 실비아였다.
마왕을 못 죽였고, 앨리스를 짓이겨 묶어두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도 오직 그녀뿐이었다.
이 인류의 희망이 있다면, 결국 그 빌어먹을 년뿐이었다.
“자, 그럼 브리핑은 여기까지.”
에릭은 살짝 풀린 눈으로 앨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씨발, 대체 여태까지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냐?”
“…”
에릭은 욕설을 섞으며 앨리스에게 이죽거렸다.
하지만 표현이 과격할 지언정, 그에게서 앨리스를 향한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에릭 역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면 자신의 조직이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기에 강하게 추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거나,
앨리스는 에릭을 보며 말하려다 잠시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에릭에게 전해주면 깜짝 놀랄게 분명할 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꺼낸 이야기와 이 상황의 스케일이 너무 커, 자신의 이야기가 조금 시시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하,”
“…?”
“… 별거 아니야. 에릭. 그저 애쉬를 찾았을 뿐이야.”
에릭의 취기 어린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 뭐?”
“살아있다고, 애쉬.”
“…”
에릭은 앨리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쉬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취기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일까.
앨리스는 에릭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쉬 뿐만이 아니야. 에릭.”
“…그럼?”
“일단 말해주기 전에…”
“…?”
“네가 있던 그 조직. 지금 조금이라도 유지가 되고 있어?”
“아니, 다 개박살 났지.”
“흠, 그럼 결국 너뿐이네.”
“…?”
지원해줄 여신교도, 검과 갑옷을 만들어줄 대장장이나 팔아줄 상인도 모조리 사라진 지금,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눈앞에 있는 에릭뿐이었다.
기민한 도적이자 뛰어난 정보상인 에릭 말이다.
“검과 갑옷, 말, 그리고 조사가 필요한 정보.”
“뭔데, 설마 구해달라고?”
“그래, 필요해 에릭.”
“눈이 달렸으면 봐라, 지금 그딴 걸 어떻게 구해.”
“어떻게든 해내야지 너랑 나. 둘이서.”
“뭐?”
앨리스는 짧게 심호흡한뒤, 입을 열었다.
“애쉬는 실비아와 함께 있어.”
“그게 누군데…?”
“몰라?”
“용사와 동명이인이라는 건 알지. 근데?”
에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리스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채 말했다.
“그 용사 본인을 말하는 거라면?”
“…”
에릭의 눈에서 취기가 걷어지는 것이 보였다.
앨리스는 순간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을 구할 열쇠가 그 자그마한 골드필드 영지 출신 촌년, 촌놈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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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차 요약 – 임신공격으로 애쉬에게 기합 넣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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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은 조금 버겁네요.
자세히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집안일이 조금 안좋게 꼬였습니다.
알바도 지난번 몸살때문에 며칠이나 쉬었던 바람에 잘렸고요.
덕분에 주말동안 조금 취해 있었습니다.
말 없이 휴재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