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5

       내가 진짜 학생이었다면 방학이라는 기간이 무척 기꺼웠을 텐데.

        

       학교 다니는 것은 직장에 다니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일어나기 싫은데도 일어나야 하는 원인이고, 들어가지도 않는 아침을 입에 쑤셔 넣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이유였고, 한 번 들어가면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버티고 앉아있어야 하는 곳.

        

       물론 그래도 학교가 직장보다는 나았다. 학교가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끝났고, 일 년에 길고 긴 방학이 두 번이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두 사람은 황녀였고, 방학 동안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의 복선을 내가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황제는 아직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뭔가 거래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금서고에 들어갔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나는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황제가 내 능력을 유추한 것은 황제 자신 추리력 덕분이지, 내 능력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 같은 것 덕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

        

       “이런 식으로 나를 따라다닐 필요는 없는데.”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앨리스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의 얼굴에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황궁 내에 있겠다고 해도 할 일도 없습니다.”

        

       “방학 초만 해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실제로는 황궁 내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고, 정기적인 보수 때문에 정박해있는 공중전함 드레드노트에 잠입해서 내부 구조를 살펴보고, 황궁 내의 설비 하나하나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그 결과를 보거나 병사들이 몰려오는 시간을 재보곤 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하며 시간의 평균값을 구해서 기억한 뒤 내 노트에 죄다 기록해두었다. 당연히 전부 한국어로.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포병 식으로 적어두었고.

        

       황제가 내 능력을 알고 나서는 언제나 그 작은 노트를 품 안에 넣어서 다녔으므로 누가 읽을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앨리스가 없는 시간에 벌였다. 사람을 직접 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제국 시선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배신행위였고,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앨리스가 나를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황제의 반응도 몇 번 보긴 했는데, 하나같이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이라서 기분 나빴다.

        

       ‘어차피 이것도 되돌릴 거잖아?’ 하는 것 같은. 물론 황제라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진중한 말투로 말을 꺼냈겠지만.

        

       “……지금 가시는 곳은 방학 내내 가신 곳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황녀를 대놓고 죽이지는 못하겠지. 아니, 대놓고 죽이는 건 둘째치고, 사고사라도 당하면 영지 전체가 날아갈 텐데.”

        

       “하지만 상대는 크로우필드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네가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방학 내내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방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반면에, 앨리스는 자기가 차기 황제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기라도 한 건지 방학 내내 대놓고 공식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전까지는 평민들에게도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앨리스의 이름과 얼굴을 여러 사람이 알 수 있게 될 만큼. 심지어 언론사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열심히 움직였다.

        

       “저는 이미 크로우필드를 상대해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것도 몇 년 전의 일이잖아. 경비나 설비는 몇 년 전보다 훨씬 살벌해졌어.”

        

       ‘졌을 거야’가 아니라 ‘졌어’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창밖으로 향해있던 나의 시선을 앨리스 쪽으로 돌렸다.

        

       “너한테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내가 전혀 조사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너의 언니를 자처하는 건 진심이라고.”

        

       앨리스가 조금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를 보호하는 것도 언니인 내 몫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차기 황제이신 황녀님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

        

       나의 반박을 앨리스는 중간에 딱 끊어버렸다.

        

       “황제야말로 자기 충신을 자기 이름 아래 보호하는 존재야. 네가 만약 나를 따르겠다면, 나는 너를 확실히 보호해야 해. 나는…….”

        

       앨리스는 말을 잠깐 쉬었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버지처럼, 너를 이용하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아버지랑은 다르니까.”

        

       “…….”

        

       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기쁘다. 특히 그 상대가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 중 하나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되기도 한다.

        

       원작에서 앨리스는 이 시점에 이렇게 강단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으니까. 어딘가 꼬인 구석이 있고, 열등감에 차서 주인공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고, 어딘가 여린 부분도 보이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앨리스와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앨리스가 앞으로 정확하게 어떤 행보를 보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내가 뭔가 통제함으로써 미래에 있을 결과를 내가 원하는 대로 끌어내고자 하고 있다면, 아마 이미 실패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크로우필드에 굳이 방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자, 앨리스는 ‘흐흥’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로우필드라는 이름과는 대조적인, 끝도 없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영지 중심에 검은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이 몇 개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리고 한때 마약에 찌든 어린아이를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예?”

        

       “아니면, ‘아직은’ 모르는 걸까?”

        

       “…….”

        

       창밖을 바라보던 앨리스가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음, 앨리스가 이런 말을 기껍게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황제와 조금은 닮아있었다.

        

       *

        

       “황녀님.”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에게 기품있게 인사하는 사람은 크로우필드 백작 부인이었다. 이 사람도 어렸던 시절에는 다른 백작가에서 자랐다고 했던가. 크로우필드 백작과는 먼 친척 관계였다고 한다.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사실 크로우필드 백작도 어느 정도는 그런 분위기였기에 미아 크로우필드가 특별히 누구를 더 닮았다고 하기는 조금 애매했다. 내가 두 사람이 모녀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냥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앨리스가 기품있는 자세로 그 인사를 받아주자, 크로우필드 백작 부인은 내 쪽으로 돌아섰다.

        

       시선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딸보다는 감정조정을 훨씬 잘하는 사람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었지.

        

       “…….”

        

       한순간 나의 얼굴을 바라본 백작 부인의 시선이 아래로 살짝 깔렸다. 무릎을 굽히며 인사하는 부인에게, 나도 마찬가지로 예를 갖추었다.

        

       백작 부인이 나를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나는 백작 부인을 이미 여러 번 보았다. 물론 몇 해 전의 이야기다.

        

       딱 한 번 성공했던, 하녀로 잠입했을 때의 이야기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덮치던 크로우필드 백작은, 저택 안에서는 대놓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고 자상한 가장처럼 행동했다. 그게 연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백작은 그냥…… 진심이었겠지. 자기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 딸에게 자상한 아버지였을 것이다.

        

       고아원의 아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그 시선은 일상생활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백작가의 하인 중에는 낮은 지위의 귀족가의 아이도 있었고, 평민 아이도 있었다. 백작은 언제나 귀족가 아이에게는 친절했다. 마치 조카를 대하듯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고, 불편한 일, 예를 들어 이제 막 소녀의 몸에서 여인의 몸이 되어간다는 증거를 인지하게 된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상냥하게 일에서 빼주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평민 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는.

        

       하지만 나는 백작의 그 핥는 듯한 시선을 몇 번이고 느꼈다. 이제 막 하녀가 되었던 내가 순식간의 백작 근처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로 성공은 고작 한 번이었지만. 그러니까…… 내가 내 순결을 잃지 않을 기회를 확보하며 백작의 음식에 뭔가를 타는 것이 극도로 어려웠다는 말이다.

        

       원작에서도 백작이 본편 시점에서 클레어에게 죽은 지 몇 년 정도 된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런 배경을 가진 클레어라면 나보다 그런 상황에 더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시선을 돌려 근처에 있는 미아 크로우필드를 찾았다.

        

       방학 시작 전에 나에게 엄청나게 복잡한 시선을 보냈던 미아 크로우필드답게, 지금도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간신히 황녀와 귀족 사이의 예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크로우필드 백작 부인은 그런 미아 크로우필드를 잠깐 흘겨보았다.

        

       ……친딸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