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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5

       『이쯤이면 다 됐군.』

         

       악마가 주걱으로 솥단지의 바닥을 긁었다. 끈적이는 보라색 염색약이 떠올려졌다. 흘러내릴 듯하면서도 질척이는 광경이 녹은 고무 같았다.

         

       『유리병.』

       “네.”

         

       긴장한 채 악마를 힐끔거리며 서 있던 엘리가 유리병을 내밀었다. 주걱을 기울이자 염색약이 철퍽 담겼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염색 준비를 하고 있으면 금방 식을 거다.』

       “우와앙!”

         

       파스텔은 모락모락 유리병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염색염색약!”

         

       역시 악마님이야!

         

       못 하는 게 없으셔!

         

       푸푸푸.

         

       파스텔은 히히덕대며 악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악마님! 악마님! 이 염색약 레시피의 출처가 어떻게 된다고요?”

         

       물로 식힌 솥에 세척액을 붓던 악마가 떨떠름해했다.

         

       『크래프트 가문에 내려오는 염색약 레시피다. 머리카락 색이 너무 분명해서 변장이 어려우니 혈통에 맞춘 레시피를 만들어 둔 것이지. 최신 연금학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레시피긴 해도 그렇기에 구관이 명관이다.』

       “우와우와!”

         

       크래프트 가문의 레시피래!

         

       근데근데 어떻게 악마님이 알고 계신 걸까아?

         

       연애 빵점 파스텔은 전혀 모르겠어!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오?”

         

       크래프트 가주로서 비전이 유출됐는지 확인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

         

       절대 사감 때문에 질문하는 게 아님!

         

       어색하게 유리병에 손부채질하던 엘리가 힐끔 바라봤다. 뭐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냐는 경악 어린 눈빛이었다.

         

       악마가 못 들은 척하며 솥 바닥을 주걱으로 긁었다. 달라붙은 보라 염색약이 투명한 세척액과 뒤섞였다.

         

       파스텔은 솥단지를 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솥단지를 들여다보는 악마님의 얼굴을 그대로 올려봤다. 분홍 눈동자가 반짝였다.

         

       악마가 무시하며 주걱을 움직였다.

         

       분홍 눈동자가 두 배로 반짝였다.

         

       반짝반짝.

         

       악마가 한숨을 쉬더니 세척액에 닿을 듯이 흔들리는 분홍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잡아 정리해 줬다.

         

       『뭐가 궁금한 거냐.』

       “크래프트 가문의 레시피를 악마님이 알다니! 이건 가산 유출! 가주로서 가만있을 수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 봐라.』

       “악마님과 엄마 사이에 무슨 일이?!”

         

       우왕우왕!

         

       파스텔은 연애 얘기에 설레는 사춘기의 마음이 됐다.

         

       근데 연애가 아니라 짝사랑인!

         

       짝사랑이라 더 듣고 싶어……!

         

       붉은 눈동자가 떨떠름해했다.

         

       『별거 없다. 교단에 잠입할 때 분홍색은 너무 티가 나니 레시피를 듣고 만들어 줬을 뿐이야.』

       “허억.”

         

       파스텔은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단둘이 잠입……!”

         

       이러쿵저러쿵!

         

       『뭔 단둘이 잠입이냐.』

         

       악마의 손가락이 파스텔의 이마를 눌렀다.

         

       “우아아~.”

         

       파스텔은 그대로 밀려 솥단지에서 떨어졌다.

         

       『단둘이 아니다. 황태자도 있었고 샌님도 있었지. 그리고 당시엔 심각한 분위기여서 네가 상상했던 뭔가는 있지도 않았다.』

         

       악마가 주걱으로 솥단지를 벅벅 긁었다. 어쩐지 감정 담긴 행동이었다.

         

       아아~.

         

       짝사랑에겐 너무 힘든 주제였나 봐.

         

       악마님 어떡해!

         

       완전 어떡해!

         

       파스텔은 재밌어서 입꼬리가 풀렸다.

         

       헤헤.

         

       엘리가 악마를 어색하게 응시했다. 유리병을 매만지며 염색약의 온도를 재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데모니우스님이신가요?”

         

       악마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스텔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

         

       엘리 완전 똑똑해!

         

       엘리가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그냥, 보면 알지.”

         

       그럴 수가!

         

       이거 기밀 사항이었는데!

         

       대악마의 봉인을 푼 타락한 소녀의 사연이 이런 식으로 유출돼 버리다니!

         

       그런 건 동화책 끝에서나 나오는 거라구우!

         

       파스텔은 우앙~ 상태가 됐다.

         

       “악마님! 악마님! 우리 어떡해요! 되돌릴 수 없는 조치를 해야 할 때일까요?!”

         

       그것만큼은 하기 싫었는데에!

         

       “아?”

         

       엘리가 흠칫했다.

         

       『당사자 앞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

         

       악마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밖에서 악마님 악마님거리며 외칠 때부터 들키는 건 기정사실이었지.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다.』

         

       살짝 창백해진 엘리가 말을 덧붙였다.

         

       “멜리사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멜리사가 이분을 대하는 태도라던가 그런 게 사용인을 대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잖아. 조심스럽고 애써 모른 척하는 느낌의.”

         

       똑똑한 엘리는 친구 랭킹 1위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파스텔은 바로 충격받았다.

         

       “멜리사까지이?!”

         

       이러면 되돌릴 수 없는 조치는 고려도 할 수 없잖아! 원래도 할 생각 없었지마안!

         

       파스텔은 뭔가 떠올라서 순간 멈칫했다.

         

       엣, 잠깐만.

         

       그럼 여태 공부 안 하고 컨닝한 사실까지도 들킨 거 아닌가?

         

       식은땀이 나는듯했다.

         

       기억을 빠르게 되짚었다. 멜리사가 천재천재 파스텔의 존재를 의심쩍어했는지 살펴봤다.

         

       그런 적 없었다. 오히려 이 파스텔이 좋은 머리로 어디까지 탐욕을 부리는지 관찰하는 눈빛은 있었어도.

         

       휴우.

         

       모범생 멜리사는 똑똑이 파스텔이 컨닝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나 봐.

         

       그동안 해온 게 평판에 많은 도움이 된 듯?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해!

         

       『슬슬 다 식었겠군. 어린 크래프트, 여기 앉아봐라.』

       “네에!”

         

       파스텔은 나무 의자에 총총 걸어가 앉았다. 양다리를 흔들고 있으니 악마가 유리병을 건네받고 다가왔다. 버터나이프가 보라 염색약을 조금 떴다.

         

       『손등 내밀어 봐라.』

       “손은 왜요?”

         

       파스텔은 손을 내밀었다. 염색약이 손등에 아주 살짝 묻혀졌다.

         

       『연금학은 섬세한 조화를 다루는 분야지. 사람에게 쓸 거면 혹시 모를 반응도 확인해야 한다. 특히 피부는 예민하지.』

       “아하!”

       『지난번에 연금 독성학을 가르쳐주며 알려준 사실이지만 말이다.』

         

       허억.

         

       다 까먹음.

         

       손등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악마가 연금실 바닥을 살펴봤다. 그러다 고양이 털 날리듯이 떨어져 있는 분홍 머리카락을 주워들었다.

         

       머리카락이 유리병에 톡 놓아졌다. 버터나이프로 휘휘 젓고 들어 올리자 염색된 머릿가닥이 흔들렸다. 창가 햇살에 은은히 빛나는 신비한 보라색이었다.

         

       “우왕!”

         

       예뻐어!

         

       선조님들 이런 염색 레시피를 만들어 놓다니! 완전 센스 있으세요! 그게 외견을 유려하게 유지해 사기 치려는 의도긴 해도!

         

       『성능에 이상은 없군.』

         

       뻘쭘하게 가만히 있던 엘리가 슬쩍 살펴봤다.

         

       “이것도 꽤 눈에 띄지 않을까요? 크래프트가 염색약으로 변장했다는 얘기를 저는 못 들어 봤지만 크래프트 가문사를 파고든 마족이라면 눈치챌 수 있어요.”

       『문제없다. 이 레시피는 가주와 최종 후계자에게만 내려오는 거다. 색상마다 다른 레시피가 존재하고 누군가 한번 쓴 색상은 폐기해 이후 세대가 역사 기록 때문에 변장을 들키지 않게 만들어졌지.』

       “그 정도로 철저하게. 그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선량한 삶을 살았다면.”

         

       엘리가 살짝 질려했다.

         

       “그런데 철저함과는 별개로 눈에 띄는 레시피라는 건 다르지 않네요? 웬일이래.”

       『크래프트 놈들은 외견 때문에 관심받는 걸 당연히 여겨서 그런 걸 거다. 은근히 즐기니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걸 테지.』

       “그 심성으로 조금이라도 선량한 삶을 살았다면.”

       『그러게나 말이다.』

         

       공감대가 있는 악마와 엘리가 크래프트 악담을 했다.

         

       현 가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안 들리는 척했다.

         

       “우와! 보라보라!”

         

       이후 염색해 보니 파스텔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홍 머리카락이 특징인 크래프트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감쪽같았다.

         

         

         

       #

         

         

         

       파스텔은 정박장에서 밀무역 비공정을 맞이했다. 선원들의 고함소리가 울리고 무수한 화물이 하선됐다.

         

       “경제적 자유! 경제적 자유!”

         

       마석 냠냠의 인생!

         

       그레이스 상단주가 뿌듯해했다.

         

       “전직 기사단원을 부리니 영업손실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답니다. 소문이 퍼지며 비공정에 접근하는 해적이 대폭 줄었다고 해요. 예측보다 효과적이었어요.”

       “우와! 잘됐네요!”

         

       하긴 나라도 하늘섬 공기업이나 다름없게 된 크래프트 상단을 건드리고 싶진 않을 거야!

         

       그레이스 상단주가 줄부채를 펼쳤다.

         

       “이번 상행의 안전성이 용병들에게 알려지면 사병을 고용하기도 수월해질 거예요. 후작 각하, 병력을 더 늘려 볼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세요?”

       “좋아요! 이참에 비공정도 늘리고 자금도 빌려서 더 대규모로 가보죠!”

         

       아카데미 겸 하늘섬 행정부가 소유한 비공정도 잠시 빌리고, 하반기에 들어온 세수도 내년도 예산으로 잡히기 전에 일단 잠깐 빌려 쓰면 될 거 같다.

         

       호레이스 총장님과 얘기해 봐야지!

         

       “훌륭한 계획이세요.”

         

       그레이스 상단주가 흡족했다.

         

       줄부채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런데, 황실과의 마찰은 잘 해결하셨나요? 각하께서 어련히 잘하셨겠지만 상단을 책임진 자로서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랍니다.”

       “네? 뭐가요?”

         

       웬 황실?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레이스 상단주가 당혹스러워했다.

         

       “마계를 견제하려는 황실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금화 1개로 철도 부설권을 강탈하셨잖아요.”

       “네? 그건 황실이 아니라 제국은행인데요.”

       “그 제국은행을 황실이 움직였잖아요?”

       “에이~.”

         

       파스텔은 손사래 쳤다.

         

       “정부와 분리되어야 하는 은행을 어떻게 황실 마음대로 휘둘러요. 그러면 신용 붕괴에 뱅크런이라구요! 상단주님 농담도 참!”

         

       이거 완전 상식인데!

         

       그런 바보바보 농담쯤 똑똑한 파스텔에겐 통하지 않는 것!

         

       아하하!

         

       그레이스 상단주가 창백해졌다.

         

       “그거야 원칙상 그렇지만 여태 황실이 시장을 그렇게까지 존중해 주진 않았잖아요?”

         

       으에?

         

       으에에?

         

       문득 정박장에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 하늘 저편에서 뭔가 굉장히 화려한 쾌속 비공정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레이스 상단주가 숨을 들이켰다.

         

       “황실 비공정?”

         

       으에?

         

       파스텔은 잠시 뒤 전령과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황실 기사단 소속 같은 검은 갑옷의 기사가 전갈을 펼쳤다.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후작은 들으라! 황제 폐하께서 이른 시일 내에 입궐하라 하명하셨다!”

         

       으아아!

         

       저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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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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