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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5

     

    “하하하하, 그럼 제국의 인간들은 눈 뜨고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한단 말이야? 장님들이 따로 없군!”

     

    쾅, 기슈타가 힘차게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닦았다.

     

    술잔이랄까, 커다란 술통이었지만.

     

     

    마을 중앙에는 지하에 커다랗게 파놓은 굴이 있어 식량 창고를 겸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술판이 벌어져 우리의 환대식이 한창 무르익은 참이었다.

     

    “너, 몸 좋다.”

    “내게 시집와라.”

    “어허, 내가 먼저다.”

     

    브루노는 부족민들에게 둘러싸여 인기 절정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정색하면서도 턱이 15도 정도 올라간 것이 상당히 행복해하고 있었다.

     

    임무 중이기에 최대한 술을 자제하며 조용히 있는 휴고와 타냐는 그게 묘한 매력을 풍겼는지 나름 인기가 있었다.

     

    타냐가 계속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남자인 줄 안 모양이다.

     

    소대장만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해 죽으려고 했다.

     

    “술도 먹었으니 몸이 따뜻해졌겠지. 밖으로 나가자, 라스!”

     

    해도 졌으니 슬슬 밤을 준비해야 할 시간 아니었나.

     

    기슈타가 내 손목을 잡아끌고는 성큼성큼 지상으로 걸어나갔다.

     

    ‘조금 무서운데.’

     

    내가 알던 미래의 모습보다 훨씬 혈기왕성한 그녀였다.

     

    그땐 훨씬 차분하고 냉혹한 전사라는 느낌이었다. 흔히 바바리안이라 불리는 야만용사다.

     

    아니, 야만용녀라고 해야 하나.

     

    ‘악마의 피에 감염된 영향이었겠지.’

     

    피부도 지금보다 까맸고.

     

     

    기슈타가 기운차게 산등성이 위로 걸어 올라간다. 별안간 시작된 등산에 나는 금방 힘이 빠졌고 숨이 차올랐다.

     

    “뭐냐, 벌써 지쳤는가, 라스?”

     

    “…아니.”

     

    자존심이 있지.

     

    “허약하군! 그래서야 튼튼한 자식은 낳을 수 없다!”

     

    기슈타의 외침이 웅웅거린다 싶더니 별안간 몸이 붕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들쳐멘 것이었다.

     

    “너는 건강한 여자와 왕가왕가해야 한다!”

     

    “거 표현 좀 고급지게… 허억.”

     

    기슈타는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폴짝폴짝 산등성이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중턱에 도착해서 그녀가 나를 내려놓고는 어깨동무를 해왔다.

     

    “봐라, 라스.”

     

    기슈타가 손가락으로 벌판의 먼 경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마을은 바닥의 얼음을 깨서 물고기를 채집한다. 저 마을은 털과 고기를 가져오지. 저쪽은 나무. 저기는 탈것을 키운다.”

     

    “분업화가 되어있구나. 잘 만들었네.”

     

    “바위족과 빙하족은 정착할 줄을 몰라. 틈만 나면 우리 걸 약탈하러 온다. 물론 그때마다 머리통을 부숴주고 있지!”

     

    쾅, 기슈타가 기세 좋게 양 주먹을 부딪쳤다.

     

    얼음의 벌판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애정이 담겨있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여기서 살아? 자원이 적은 척박한 땅이라 불편해 보이는데. 실제로 너희 부족만 살 수 있을 정도고.”

     

    “아아, 그것이 궁금했군. 너희 제국의 땅에는 젖과 꿀이 넘친다 들었다. 그 녹색 공도 아주 맛있었고, 무엇보다 부러운 건 커다란 물이 흐르는 거였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에 내려왔다가 강을 봤던 모양이다. 제도까지 이어져, 제국을 관통하는 장강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기슈타가 손가락으로 멀리 평야 중앙을 가리켰다.

     

    지하에서 새어나온 회오리가 자그마한 회오리를 일으켜 하늘로 승천하듯 쏘아지고 있었다.

     

    “저기 돌로 지어진 무덤이 보이나? 깊은 얼음 아래 어머니가 잠들어 계셔.”

     

    “어머니? 천룡 말이야?”

     

    “바로 그렇다. 한참,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전투로 큰 부상을 입어 잠을 잔다. 다른 부족이나 마족이 손대면 큰일 나. 우리는 어머니를 지켜야 해.”

     

    그런 뒷설정도 있었나.

    이 세상의 용들은 약간 신격화된 존재로, 강력한 태초의 몇 개체가 있고 나머지는 그 자손인 아류다.

     

    세상은 여신이 창조했고 대륙은 태초의 다섯 용이 만들었다던가 어쩌구저쩌구, 흔한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다.

     

    기슈타가 어머니라고 표현한 걸 보면 저기에 천룡 본인이 봉인되어 있나.

     

    ‘미래에선 천둥족이 이 땅을 나와 후작령까지 점령했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네.

     

    ‘천룡 정도 존재의 마나가 마족에게 들어가면 문제가 되지 않나?’

     

    뭐, 그쪽은 관련된 배드엔딩이 없으니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다.

     

    “그럼 천룡이 깰 때까지 이 땅에서 살게?”

     

    “그래. 천둥의 땅이다.”

     

    “널찍해서 시원하니 좋네.”

     

    “좋은 땅이지! 다만 너희의 땅처럼 물은 흘렀으면 좋겠다. 전부 얼어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이 산 정도는 녹아서 흐르면 더할 나위 없겠군!”

     

    그랬다간 대홍수가 나겠는데.

     

    이 땅에 애정을 갖고 지키려는 기슈타의 목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목표는 폭풍석이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화제를 꺼낼 수 있을까.

     

    아뮬렛이 바위족 족장의 키 아이템이었던 만큼, 기슈타도 폭풍석을 소중히 다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뭐니뭐니해도 전설급 아티팩트니까.

     

    먼 곳부터 돌아가야지 뭐.

     

    “어머니는 저렇게 멀리 둬도 괜찮아?”

     

    “아아, 꽁꽁 잠겨있어, 괜찮다!”

     

    “하하, 하긴 넌 하늘에서 천둥벼락을 떨어트릴 정도의 강자니까. 적이 나타나도 순식간에 해치우겠지.”

     

    “물론이다. 라스, 또 보고 싶나?”

     

    기슈타가 예고도 없이 번쩍 도끼를 치켜들었다. 내가 양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워, 여기서 눈사태가 일어났다간 난 파묻혀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거야.”

     

    “걱정 마라, 그땐 내가 꺼내주마.”

     

    이 밤중에도 환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으니 든든하긴 하네.

     

    “그 천둥은 어떻게 생기는 거야? 용의 힘이나 그런 건가?”

     

    스무스하게 폭풍석에 관한 주제가 나오도록 유도해본다.

     

    “음, 간단해. 팔에 힘을 주고 도끼를 내리치면 하늘이 울린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내 의도와는 조금 어긋났다.

     

    “흠, 대단하네. 그럼 다른 도움은 전혀 필요 없어? 특별한 무기라든가, 신비한 보석이라든가.”

     

    “없다! 오직 내 힘만 믿으면 된다!”

     

    “그렇구나.”

     

    이상하네. 폭풍석을 안 가지고 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미래에서는 목걸이로 꿰서 걸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 한 거면 울고 싶어지는데.’

     

    이렇게 된 이상 더 대놓고 나가자.

    나는 걸고 있던 아뮬렛을 꺼내 보였다.

     

    “호오!”

     

    무엇인지 알아본 기슈타의 눈이 커졌다.

     

    “바위족 족장이 걸고 있던 목걸이야. 전리품으로 챙긴 이후로는 내가 차고 있어. 괜찮아 보여?”

     

    “잘 어울린다! 하하하, 라스, 보아라. 나도 여태 해치운 마물들의 뿔을 허리에 달아뒀지. 이건 바이콘의 뿔이다. 나를 뒷발로 차려고 하길래 가랑이를 찢어줬다.”

     

    “멋진데. 잘 보라고, 내가 바위족 족장을 토벌할 때도 난리도 아니었거든. 성채의 난간에서 그 덩치와 눈앞에서 부딪쳤어.”

     

    “놈이 죽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봤어야 했는데. 우리 부족의 식량을 몇 년 치나 훔쳐간 놈들이야. 잘 했어, 라스!”

     

    기슈타가 흥분하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방향에 계속 아뮬렛을 들이대며 제발 알아채 달라고 어필했다.

     

    “으음?”

     

    내 기도가 닿았는지 기슈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뮬렛의 홈 부분에 검지를 댔다.

     

    “이건.”

     

    “와, 네가 알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이게 뭔지 짐작이 가?”

     

    “흐음, 알고는 있다.”

     

    가지고 있지는 않은 건가.

    그럼 부족에 내려오는 귀중품이라거나 하진 않은 듯하다.

     

    나를 떠볼 성격은 아니다. 이야기를 꺼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슈타, 혹시 알면 어딨는지 가르쳐줄 수 있겠어? 사실 이 목걸이는 위험한 물건이야. 지금은 내가 직접 관리하고 있어.”

     

    “그랬냐?”

     

    “그래. 여기에 쌍이 되는 뭔가를 넣으면 안전해지리라 생각해.”

     

    정확히는 위험한 상태인 아셀라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거지.

     

    전부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중간과정은 약간 생략했다.

     

    “흠.”

     

    기슈타는 이번만큼은 즉답하지 않았다. 고민해볼 사항인 듯했다.

     

    “라스, 네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전부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뿐이로군.”

     

    “그래? 뭐, 바깥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특히 자기 자식을 구분하기 위해 마나를 검사한다는 이야기가 재밌었다.”

     

    “하하, 이야기보따리는 얼마든지 더 있어.”

     

    “우리는 어떻게 자식을 구분하는지 아나.”

     

    “어떻게?”

     

    다음 순간.

     

    시야가 컴컴해지며 온몸에 뜨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스으읍.”

     

    기슈타가 나를 양팔로 껴안고는 내 머리에 코를 묻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생명의 위기로군.

     

    지금 기슈타가 팔에 힘을 주면 내 제1요추와 5번부터 11번 갈비뼈까지 전부 으스러져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겠지.

     

    “우리는 냄새를 맡으면 알 수 있다. 호의인가, 적의인가. 강자인가, 약자인가. 내 자식을 가질 남자인가, 내 피를 이은 자식인가. 또는.”

     

    기슈타가 힘을 주어 강조했다.

     

    “거짓을 말하는가, 진실을 말하는가.”

     

    “마나를 감지할 수 있어?”

     

    좀 놀라운데. 마나를 먹는 용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잠깐, 기슈타가 나보다 키가 큰 건 아닌데 어떻게 내 머리 냄새를 맡고 있지?

     

    아, 그녀가 끌어안은 탓에 내 발이 눈에 더 깊이 박혔을 뿐이었다.

     

    “스읍.”

     

    기슈타는 고개를 숙여 내 목 뒤의 냄새를 몇 번 더 맡고는 몸을 떨어트렸다.

     

    후끈하네.

     

    “어때, 나는 합격이야?”

     

    기슈타는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입에 진실만을 담았군. 너는 보기 드문 남자다.”

     

     

    [녹아■■, ■■■, ■■지다 5% → 12%]

     

     

     

    ***

     

     

     

    나와 기슈타가 돌아왔을 땐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브루노는 신났고, 소대장도 이제는 분위기에 몸을 맡겼는지 부족민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상태창을 체크했다.

     

    ‘왜 이 시점에서 두 번째 굿엔딩 확률이 올라갔을까.’

     

    그것도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다른 변동점이라면.’

     

     

    ―――――――――――

     

    · [탐험가의 첫 발자국]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미개척지로의 탐사를 시작합니다.

    · [외지의 샛별]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모험가와 야만족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 [마물 도살자] 업적을 획득했습니다. 마물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을 두려워합니다.

     

    ―――――――――――

     

     

    내용을 보면 내가 모험가의 직업을 선택했을 때 획득하기 쉬운 업적들이다.

     

    마지막 건 기슈타 덕에 획득한 듯하다. 그녀가 파티 동료라고 인식됐나.

     

    ‘그런 선택지도 있긴 했겠지.’

     

    용사파티의 경험이 있으니 나는 모험가파티에서 치유사로 활약하는 길을 선택했어도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북부 미개척지는 고향인 후작령에서 가까우니 언젠가 탐험을 다녔을지도.

     

    ‘혹시 두 번째 굿엔딩은 그 루트를 선택하면 맞게 되는 건가.’

     

    지금도 확률이 오르는 걸 보면.

     

    황실 주치의를 그만두고 모험가로 전직하면 충분히 가능성은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뭐, 선택지가 있다 해도.’

     

    근력이나 체력을 그다지 안 키워온 지금 와서 전직은 쉽지 않지.

     

    이미 첫 굿엔딩 루트에서 쌓아온 업적도 있고, 의사를 그만둘 생각도 당연히 없다.

     

    “단장, 좀 어때.”

     

    나는 여전히 조용히 육포를 씹고 있는 타냐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즐겁습니다. 천둥족은 꽤 괜찮은 이들입니다. 야만족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군요.”

     

    “얘들하고 싸웠던 적도 있었잖아.”

     

    “전장에서 적과 아군은 수시로 변하는 법이지요.”

     

    타냐가 옆에 앉은 천둥족과 잔을 부딪치고는 말을 이었다.

     

    “목표는 어떻습니까.”

     

    “협상 중. 아직은 모르겠어. 조금 더 점수를 따볼까, 아니면.”

     

    내가 작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단장이 기슈타와 승부해서 손에 넣는 건 어때.”

     

    “못 이깁니다.”

     

    “그렇지?”

     

    타냐는 강자를 보는 눈은 정확했다.

     

    “이들을 도울 일이 생기고 그 대가로 받아내는 게 가장 좋아. 눈치를 보니 기슈타에겐 그렇게 중요한 물건도 아닌 것 같거든.”

     

    “잘됐군요. 당분간은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겠습니다. 저도 그게 더 좋고요.”

     

    타냐가 덤덤히 의견을 표하고는 옆자리의 부족민의 어깨를 치고는 함께 춤을 추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

     

     

     

    다음 날.

     

    ―둥, 둥, 둥!

     

    고막을 울리는 북소리에 눈을 떴다.

     

    축제 자리에서 그대로 부족민들 수십 명과 뒤엉켜 잠들었던 참이었다. 이들은 기초체온이 높아서 몸이 따끈했던지라 푹 잤다.

     

    ―적습이다! 빙하족이다!

     

    “오, 찬스.”

     

    바로 찾아온 기회에 나는 팀원들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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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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