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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5

       정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이 독이 되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다가온다.

       

       프란체의 사슬이 점점 풀려가더니 이내 결박이 풀렸고, 모두 움직임의 자유를 되찾았다.

       

       “말도 안 돼…….”

       

       프란체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직접 앞에서 목격하고 그가 지르는 비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자신 때문이라고? 프란체는 혼란스러웠다.

       

       “나, 나랑 같이 있으면 질병이 악화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카자르,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성을 잃어 말을 더듬는 것도 모자라 높낮이까지 달라졌다.

       

       “그 질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진 씨가 말했어요. 질병 악화 조건이 공작님과 함께 있는 거라고.”

       

       자백의 저주는 발동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진실.

       

       “…….”

       

       망연자실.

       

       프란체는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을 바라봤다. 덜덜 떨려오는 입술과 갈 곳을 잃은 눈동자.

       

       ‘나 때문이었다고? 그게?’

       

       입과 코에서 피까지 흘리고, 신체가 절단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던 게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감과 함께 여러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다가와도 곁에 남아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 있음에도 저리 생각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이 두 생각이 충돌하여 어쩌면 좋을지 갈피를 잃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딱히 화내지 않을게요. 공작님의 기분을 이해한 것도 있지만, 저희도 속인 건 사실이니까요.”

       

       프란체가 오늘 한 행동은 이성을 잃고, 판단력이 떨어져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고 저주를 건 것.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다들 딱히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진이라는 인물이 그녀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축을 차지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알면서도 자신들은 프란체를 속였다.

       

       이쪽에도 과실은 있는 셈이었다.

       

       “…….”

       

       말이 없는 프란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정적은 이어지고 공기는 서늘하다.

       

       어찌해야 할 바 모르는 침묵의 시간에 다들 눈빛만 교환하며 프란체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 순간.

       

       “죽어도…….”

       

       프란체가 조용히 읊조렸다.

       

       “죽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뚝. 뚝…. 흐르는 눈물과 함께 생기를 잃어 차갑기까지 한 목소리.

       

       “내가 그걸 빨리 해독했더라면…….”

       

       고개를 올려 충혈된 눈으로 카자르를 바라보는 프란체.

       

       “카자르.”

       “…네?”

       “영혼 결속 마법.”

       “…….”

       

       또각. 또각. 프란체는 천천히 걸어가 카자르의 앞에 섰다.

       

       “너는 사용할 수 있잖아? 영혼 결속 마법.”

       

       카자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있으면 진이 죽어도 상관없어. 나도 같이 죽으면 다시 만날 테니까.”

       

       흠칫. 모두가 동그래진 눈으로 프란체를 바라봤다. 지금 이 공작님이 제정신인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걸 부순다면 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멋대로 계획까지 짜버린 프란체는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자멸하고, 파멸해간다면 진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되어있어. 그때 영혼 결속의 마법을 걸어버리면 되잖아?”

       

       프란체는 카자르에게 “그렇지? 내 말 맞지?”하면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좋지 않은 선택이에요.”

       “뭐가 좋지 않은 선택인데?”

       

       하아, 카자르는 탄식을 내뱉곤 설명했다.

       

       “진 씨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잖아요.”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며 입술이 살짝 벌려진 프란체. 카자르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을 돌아오게 하려고 모든 것들을 부숴요? 그럼 목숨까지 걸면서 지금을 만든 진 씨가 뭐가 돼요?”

       

       정론이라 프란체는 반박할 수 없었다.

       

       프란체의 지위, 권력, 부. 이 모든 것은 진이 만들어주고 간 흔적이다.

       

       이걸 부순다니, 그것은 너무 가슴아픈 일이다.

       

       지금까지의 추억이 사라지는 거잖나.

       

       “하지만…….”

       

       하지만, 이라고 말한 프란체는 입술만 달싹였을 뿐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카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프란체를 안아주었다.

       

       “그 사람은 공작님이 앞으로도 잘 살아가기를 바라셨어요.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인연을 만들고.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힘쓰신 거예요.”

       

       꾸욱. 프란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 형용할 수 없는 이 상실감.

       

       “지금은, 지금은 생각 좀 할게.”

       

       비틀거리며 헬레나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프란체. 카자르, 라데아, 케일은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프란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카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데아의 복잡함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왔고, 이런 건 신경 쓰지도 않았던 케일마저도 불쾌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좋나? 저 상태면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은데.”

       “뭘 어째요. 공작님이 스스로 마음을 잘 추스르길 기도해야죠.”

       “차라리 진 씨랑 편지라도 나눌 수 있게 하는 편이 좋았을까요?”

       

       라데아의 말에 카자르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면 그리움만 더 커질 뿐이야. 진 씨는 그걸 알고 있어서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말도 없이 단번에 사라진 거고.”

       

       진에게는 사라진다는 선택지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멀리 떠나 편지를 나눈다면 서로가 그리움을 참지 못해 보고 싶어질 거고,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은 더 악화한다.

       

       그렇다고 끝까지 남기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진은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모습을 프란체가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길 거라 판단했겠지.

       

       “라데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공작님이 마음을 잘 추스르실 수 있도록 돕는 수밖에 없어.”

       

       이는 케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는 말이다. 진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나? 공작님을 잘 부탁한다고, 믿고 있겠다고.”

       

       한순간에 숙연해진 분위기. 자신들이 메우기에는 진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하아…….”

       

       별안간 카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도 참…. 그러게 떠날 거였으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더라면 정을 주지 말았어야지,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지.”

       

       이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일도 잘하고 대비도 잘하는 사람이 왜 이런 건 안 했는지.”

       

       고개를 휘저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카자르. 라데아는 적당히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진 오빠도 공작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요…? 사람의 마음이란 건 정말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카자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래, 그 사람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겠지.”

       

       그런 진이 원망스러웠지만, 욕할 수는 없었다. 카자르는 이전부터 그의 고통과 지병을 알고 있었으니.

       

       “복잡하네. 이걸 어찌해야 할까.”

       

       진이 그렇게 생각이 없고 사람을 기만하는 성격은 아니다. 적어도 카자르가 아는 진은 그랬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떠나자고.

       

       “진짜 죄 많은 남자야.”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본 카자르. 오늘따라 샹들리에가 유독 서글프게 보였다.

       

       “만약 진을 찾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어쩔 거지?”

       

       케일이 물었다.

       

       “못 찾겠죠. 그 사람을 찾으려면 엑시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일생일대의 부탁을 받은 엑시드가 그걸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대륙은 넓고 진은 일류 어쌔신 급으로 기척을 죽이는 게 가능하다. 마음만 먹으면 소리소문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

       

       엑시드 같은 일류 암흑 길드의 도움이 없다면 절대 추적할 수 없다.

       

       “일단 기다려봐요. 공작님이 결정을 내리시면 선을 넘는 행동이 아닌 이상, 최대한 그 의견에 존중해주는 거로 해요.”

       

       케일과 라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지.”

       “그래요.”

       

       카자르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 어떤 마법식보다 지금 상황이 더 어려웠다.

       

       

       * * *

       

       

       퀭한 얼굴의 프란체는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늘 같이 보던 풍경. 당장이라도 이 창문을 통해 돌아올 것만 같다.

       

       항상 앞에 앉아 웃으며 자신을 바라봐주던 진은 사라지고 없다.

         

       편지를 바라봤다. 다시 봐도 완벽한 이별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진…….”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보고 싶다. 찾고 싶다.

       

       볼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카자르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진을 죽이는 존재니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두통에 몸을 웅크린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진의 모습이.

       

       이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흘리던 진의 모습이.

       

       ‘그렇게 아픈 모습을 어떻게 봐…….’

       

       프란체는 진이 준 에메랄드 목걸이를 매만졌다. 투박하지만, 그의 섬세한 손길이 들어간 선물.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어떡하면 좋아, 진.’

       

       목걸이를 품에 안고 새우처럼 허리를 숙인 프란체. 그녀의 눈물샘에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진……!”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감정이 과격해져 호흡이 거칠어졌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과호흡 증상이 나타난다.

       

       “흐윽, 진… 진, 진…!”

       

       목이 메어온다. 가슴이 시려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자책감. 그리고 그리움이 전신을 감쌌다.

       

       데카르트에서 배척받을 때도, 시종들이 괴롭히고 기사들이 무시할 때도, 사교계에서 온갖 험담을 들어도 이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제발 돌아와…….”

       

       모든 걸 얻었다.

       

       모든 걸 잃었다.

       

       그토록 원하던 게 이뤄졌다.

       

       그토록 원하던 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에 정신이 아찔하다.

       

       진의 모습과 목소리가 떠올라 마치 옆에서 속삭여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나보려 해도 현실은 한없이 차가웠다.

       

       “아…….”

       

       물론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은 있다.

       

       진을 찾아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간절한 영원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 그럼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어있으니.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생긴 상처가 아물면 진의 목숨이 위험하다.

       

       도저히 그가 눈앞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다.

       

       어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고통에 휩싸여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한없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진, 말해줘. 나는 어쩌면 좋아?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목걸이를 바라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프란체는 선택할 수 없었다. 항상 결정해주고 방향성을 잡아주던 진은 없다.

       

       이젠 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간 진에게 받았던 가르침도, 쌓아온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택의 기로.

       

       여기서 이기적인 마음을 앞세워 자신만을 위해 진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그의 삶을 생각해 이대로 포기하고 추억으로만 간직할 것인지.

       

       이제는 오로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

       

       고뇌.

         

       프란체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매만지며, 자신과 재회한 진을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진이 고통스러워하며,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른다. 자신의 앞에서 점점 죽어가는 모습이 휑하다.

         

       ‘진, 나는 어쩌면 좋아?’

         

       제발.

         

       대답해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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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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