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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6

        언니에게 진로 설문지를 건네받았을 때, 로즈마리는 숨이 멎을 뻔했다.

       

        ‘이게 뭔 계획이야….’

       

        하마터면 된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로즈마리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분히 글자를 묵독했다.

       

        지금은 푸른색 눈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로즈마리도 금안족이다.

       

        금안족의 가장 큰 특징은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정령들이 저주라며 손가락질하던 강철의 육신은 로즈마리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0과 1로 이루어진 전자두뇌라면 이런 시가만도 못한 단문 따위 금방 외워낼 수 있다.

       

        “…….”

       

        차라리 외우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건 그냥 선전포고잖아.’

       

       누가 누굴 향해서 하는 선전포고인지는 모르지만, 정황상 그렇다. 로즈마리의 판단이 맞다면 얼마 안 가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언니는 기억을 되찾지 못한 게 확실하다. 아니면 되찾았더라도 인간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걸지도.

       

        ‘이러면 안 돼.’

       

        큰 언니가 없으면 마왕님이 부활해도 무용지물이다. 남은 구천지대계의 노력으로 어떻겠든 부활은 하시겠지만 온전히 힘을 사용하지 못하실 것이다.

       

        – 댕, 댕, 댕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교할 시간이 다 되었다.

       

        “언니, 나 먼저 가 볼게.”

       

        로즈마리는 에테르를 잘 살펴보라는 작은 언니의 충고를 어긴 채 황성으로 내달렸다.

       

        워프 게이트가 그곳에 있다. 당장 마왕성으로 가서 알려야 한다.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로즈마리는 블랜튼 공작을 찾았다. 부랴부랴 가방을 싸고 황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는 황궁과 마왕령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고위 전이진이 있었다.

       

        “저도 동행할까요?”

        “혼자 다녀온다.” 

       

        급한 나머지 부관처럼 따라다니던 블랜튼 공작의 말도 뿌리친다. 단독 행동이었다.

       

        많은 경우 절멸급 마수는 쌍으로 붙어 다닌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고위 정령에게 암살당하는 걸 막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전선 이탈은 중죄와도 같았다.

       

        중죄면 뭐 어쩌라는 말인가. 지금 촌각을 다투는데.

       

        곧바로 마왕성에 도착한 로즈마리는 아카샤의 별칭을 목놓아 불렀다.

       

        “작은 언니! 작은 언니이이이이!!” 

        “뭐야. 왜 이리 시끄러워.”

       

        텅 비어버린 옥좌 앞에서 서성이던 아카샤가 로즈마리에게로 다가온다.

       

        로즈마리가 성에 도착했을 때 아카샤는 독특하게 생긴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도넛처럼 생긴 철제 장치, 토카막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동생, 왜 일하다 말고 여기로 왔어? 놈들이 로드스톤이라도 들인 거야?”

        “아니야…. 큰 언니가….”

        “에테르가 왜?”

       

        로즈마리는 짹짹거리는 아기새처럼 그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 말은 많았지만 한 마디로 압축하면 이거였다.

       

        “큰 언니가 우릴 다 조져버릴 거야.”

        “…….”

       

        마지막 말로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린 로즈마리. 로즈마리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작은 언니의 얼굴이 여태까지 본 어느 표정보다도 가장 멍청해 보였기 때문이다.

       

        “정령계에 날려야 하는 마법을 우리에게 날리려고 한다고?”

       

        그러나 로즈마리와는 달리 금세 침착함을 되찾는 아카샤다. 괜히 2석이 아니구나 싶었다.

       

        “큰언니랑은 이제 적이 되는 걸까?”

        “그러면 안 돼. 어떻게든 데려와야지.”

        “하지만 에테르 언니는 우리보다 똑똑해. 지금까지 짜낸 계획이 다 안 먹혔는데 어떡하지?”

       

        맨 처음. 그러니까 에테르의 소재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로즈마리는 먼저 제2황자를 시켜 하스펠트로부터 에테르의 구매를 시도했다. 그때 일부러 파격적인 조건을 내밀었다. 하스펠트가 딴생각 못 하도록 말이다.

       

       지금 보는 대로 그 계획은 언니가 틸레트에 합격하면서 무산되었다.

       

        다음으로 황자를 통해 아카데미 자퇴를 유도해 봤었다. 그렇게 클리온 황자는 캘리퍼스로 정수리를 강타당하고 말았다.

       

        “잘 생각해 봐. 로즈마리.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황자의 세뇌가 안 먹히게 되었을 때쯤…?”

        “그렇지.”

        “그러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황자의 세뇌를 풀 만한 놈은 그 엘프밖에 없어. 정황상 그렇단 말이야.”

        “그래서 찾아 죽이려고 했는데 안 보인다고.”

        “뭐야. 사라졌어?”

        “자퇴했더라.”

       

        시계태엽을 되감는 것처럼 기억을 헤집어낸 로즈마리가 말을 이었다.

       

        “미리 눈치를 챈 거지. 내가 교실에 편입하자마자 도주했어. 어디로 간 건지 스코프를 샅샅이 돌려봐도 안 보이더라.”

       

        한 가지 확실한 점. 그 엘프는 자신의 마법을 인지하고 있다.

       

        그 말인즉 로즈마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제거하지 않으면.

       

        어디 갔을까. 로즈마리가 가능한 장소를 탐색하고 있던 사이 아카샤가 화들짝 놀라며 재촉했다.

       

        “로즈마리, 당장 틸레트로 돌아가. 얼른!”

        “왜?”

        “왜긴 왜야! 언니가 너한테 이 계획을 알려준 건 네가 여기로 올 거라는 걸 예측했기 때문인 거 몰라?” 

       “어…?”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언니가 인간 편에 섰다면 그 머리로 이런 계책을 짜냈겠지.

       

        “하지만 인간 중에 하수인을 심어 뒀어. 어딜 가든 언니 상황을 대신 보고해 줄 거야.”

        “언니가 그 사람을 알아채고 왕수에 담그기라도 한다면 어쩔 건데?”

        “에이, 설마.”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하다.

       

        “설마.”

        “언니라면 그러고도 남아.”

       

        로즈마리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전이진에 올랐다. 푸른 빛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졌을 땐 황성으로 돌아온 뒤였다.

       

        시계를 확인한다. 1시간, 딱 그만큼만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지금 마력초를 피울 시간도 없다. 스코프를 켜고 느긋하게 구경만 하느니 차라리 직접 돌아다니는 게 빠르다.

       

        안 그래도 짐작 가는 곳이 있다. 로즈마리는 말과 같은 각력으로 아카데미를 주파했다.

         

        그리고.

       

        ‘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숨을 죽이며 교양관을 나오는 에테르를 포착한다. 남은 건 언니에게 다가가 경황을 묻는 일.

       

        “언니, 지금 여기서 뭐 해?”

       

       당황스런 감정을 숨긴 채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에테르는 세상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사장님 만나고 왔는데.”

        “뭐 하러?”

        “장학금 건으로.”

       

        표정 관리해야 한다. 입꼬리를 올려 자신도 별 일 없음을 연기한다.

       

        “와. 언니 수석이야?”

        “그렇지 뭐. 그래서 이런 시간에 뭐 하러 날 찾아왔는데?”

        “학교에 깜빡한 물건이 있었지 뭐야.”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뻔뻔함이 하늘을 뚫고 올라갈 기세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직감했다. 거짓을 고하는 것조차도 자신이 한 수 아래였다는 것을. 그야 에테르는 급습을 받았음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럼 이만. 내일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에테르는 로즈마리 곁을 지나쳤다.

       

        그 순간 로즈마리는 알아챘다.

       

        ‘담배 냄새….’

       

        금안족이 마력초를 피우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마법을 사용할 때. 그리고 누군가와 잡담을 나눌 때.

       

        아카데미 내부에서 마법을 뻥뻥 쏴댈 리가 없지. 에테르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인물이 아니다.

       

        “…….”

         

        난기류가 흐르는 것처럼 미묘한 감각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 감각의 정체를 눈치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프놈.”

       

        눈에 핏대를 세운 채 교양관 뒷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목을 천천히 돌리자 몸 곳곳에서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 황궁에 안 돌아오시겠다고요?]

        “그래, 외박 임무다.”

       

        염화로 블랜튼에게 연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로 로즈마리는 똬리를 튼 뱀처럼 교양관 지하실에 죽치고 앉아있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흘렀다. 아무런 기색이 없다.

       

        두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아무런 기색이 없다.

       

        그렇게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목석처럼 앉아있느라 다리가 저릿해질 때쯤.

       

        – 철컹

       

        밖에서 자물쇠 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위가 교양관 문을 잠그기라도 한 모양이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움직이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로즈마리는 마력초를 태웠다. 그리고는 일전에 스코프로 염탐하려다가 실패했던 문제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찌르르르, 하고 창가에서 풀벌레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다. 일신을 가다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전주곡이다.

       

        마력초가 끝까지 다 타들어갔다.

       

        그녀의 오른손에 1m가 조금 넘는 검이 쥐어진다. 끝부분이 말총 대신 날붙이로 이루어진 바이올린 현이다.

       

        1악장이 끝났으니 다음을 연주할 차례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 이상은 도저히 못 참겠다. 인내심의 한계다.

       

        로즈마리는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푸르렀던 눈동자가 황사로 뒤덮인다.

       

        금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찬연하게 빛난다. 마치 그 종족의 미래를 그리는 것처럼.

       

        높은 위계의 마수는 전투 태세에 돌입하면 알게 모르게 살기를 내뿜는다. 로즈마리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누군가를 해할 기세로 움직이자 풀벌레의 노래가 멎었다.

       

        “오호라.”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으나 돌아가지 않는다. 안쪽에서 잠근 모양이다. 

       

        제법 안전에 신경을 쓰긴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래봤자 소용없는데.

         

        로즈마리는 힘을 주어 문째로 뜯어냈다. 드드득, 요사스러운 쇳소리가 바닥을 긁는다. 문을 지탱하던 나사가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비틀림을 받은 철문은 기괴한 모양으로 굽어졌다.

       

        이윽고 문이 억지로 벌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틈 사이로 퀴퀴한 담뱃내와 통조림 냄새가 풍겨온다. 조금 전 맡았던, 익숙한 내음이다.

       

        작게 벌어진 문틈으로 손을 넣는다. 중간에 걸린 쇠사슬은 이빨로 뜯어낸다. 잠금쇠를 씹어먹으며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로즈마리는 사백안이 된 눈동자를 한 채로 웃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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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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