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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6

     

    “무기를 들어라! 맞서 싸워라!”

     

    기슈타의 주도하에 천둥족이 바쁘게 움직이며 출전을 준비했다.

     

    “탈 것!”

    “기수!”

     

    조련 담당들이 마수를 끌고 와 하나둘씩 올라탄다.

     

    전투민족답게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다.

     

    “저희도 참가합니까?”

     

    “가야지. 천둥족과 우호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금 토벌하러 가는 빙하족은 장차 제국에게 위협이 될 존재들이야. 바위족처럼 기회 될 때 토벌하는 게 좋아.”

     

    “선생님, 본대를 부를까요.”

     

    소대장이 잔뜩 겁을 집어먹었기에 툭 어깨를 쳐줬다.

     

    “상황을 보고 진행하자. 이들이 괜히 숫자에 위협을 느껴서 우리와 적대하게 될 수도 있어.”

     

    “그렇군요,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끼리 회의를 마치니 기슈타가 커다란 전투 도끼를 메고 나를 불렀다.

     

    “라스, 나는 고기 마을로 향해야 해!”

     

    “같이 가자. 우리 기사들은 바위족과 싸워본 베테랑들이거든. 도움이 될 거야.”

     

    “좋은 기개로군. 올라타라!”

     

    팀원들이 각자 나뉘어 부족민의 뒤에 올라탔다.

     

    “출발!!”

     

    기슈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정문 철책이 드르륵 열리고 진격이 시작됐다.

     

    “오우.”

     

    약 서른 마리의 마물이 부채꼴 모양의 진형을 이뤄 눈 덮인 평야를 내달린다.

     

    사방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귓가를 메워 심장소리처럼 착각이 인다.

     

    둥, 둥, 둥.

     

    진형 중앙에서 거대 곰의 등을 밟고 선 고수가 거대한 북을 쳐 흥을 돋운다.

     

    최선두에서는 기동성 좋은 늑대를 탄 부족민들이 고속으로 내달리며 첨예하게 길을 턴다.

     

    양 날개에서는 백곰 부대가 장창을 치켜들고 위용을 뽐냈다.

     

    나와 기슈타의 위치는 고수의 바로 후방으로, 부대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자리였다.

     

    “빙하족이다! 우측에 붙었다!”

     

    우리와 속도를 맞추며 오른쪽 날개에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후! 후!”

     

    설인들이다. 흰 털로 뒤덮인 커다란 오랑우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네 발로 뛰면서 우리를 급습할 태세였다.

     

    “몸체는 까매. 악마의 피에 감염됐어.”

     

    이 속도를 따라오는 비정상적인 신체능력도 그 때문인가, 생각하는 찰나.

     

    펄쩍!

    그들이 곰 부대를 향해 뛰어올라 전투가 시작됐다.

     

    “짐승!”

    “부순다!”

     

    부족민들이 안장 위에 일어서서 설인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으윽!”

     

    설인 몇을 격파해내지만 이쪽도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들이 휘두른 날카로운 손톱에 살점이 나가떨어진 부족민이 휘청댔다.

     

    “안 좋아 보이는데. 바로 치료하면 좋은데.”

     

    “라스, 데려다주면 부상자를 볼 수 있나?”

     

    달리는 곰 위에서 환자 치료라.

     

    “물론이지.”

     

    그동안 매머드를 몰 기수가 필요하겠어.

     

    “단장!”

     

    좌측 날개에서 부족민과 달리던 타냐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뛰어 올라왔다.

     

    “맡아보죠.”

     

    “할 수 있겠어?”

     

    “말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

     

    그녀가 든든하게 대답하고는 고삐를 잡았다. 기슈타가 이빨이 보이게 씨익 웃고는 내 허리를 감싸 뛰었다.

     

    “아라라라!!”

     

    기합과 함께 마수곰 등에 착지하며 도끼를 휘두르니 설인 셋이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나도 자리를 잡고 겨우 안장에 매달린 부상자를 진료한다.

     

    “완전히 미쳤구만.”

     

    심장이 마구 뛴다. 시속 70의 위태로운 전장 한복판이다 보니 나도 조금 흥분한 모양이다.

     

    발생하는 부상자를 네 명 더 치료한다. 그간 기슈타가 해치운 설인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고기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은 철책을 경계에 두고 밖에서 좀비처럼 몰려드는 설인들과 공성전을 펼치고 있었다.

     

    쾅, 쾅! 목적지에 도달해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본대가 마을을 공격하던 설인들을 들이받으며 호쾌하게 발로 밟았다.

     

    “꽉 잡아라, 라스!”

     

    기슈타가 내 허리를 들쳐메고는 붕 날아올랐다. 발 아래로 전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잠시.

     

    쿵! 우리는 마을 한복판에 착지했다. 어느새 휴고와 브루노도 다른 부족민들과 옆에 내려와 있었다.

     

    “휴고.”

     

    “선생님.”

     

    우리는 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이해했다.

     

    “하늘에서 족장님이 오셨다!”

    “족장님 축지법 쓰신다!”

     

    마을의 부족민들이 기슈타를 반겼다.

     

    쾅! 그녀가 도끼를 크게 휘두르니 대낮의 마른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협력하겠소.”

     

    타냐가 그 옆에 착지하며 검기를 가다듬었다. 기슈타가 즐거워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라스의 부하, 실력을 보여봐라!”

     

    “놀라지나 마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나갔다.

     

     

     

    ***

     

     

     

    “적, 도망친다!”

    “하하하! 멍청이들!”

     

    뿔피리 소리가 얼음 평원에 울려퍼졌다.

     

    맹공을 막아내자 설인들은 기세가 꺾여 후퇴해 뿔뿔이 도망쳤다.

     

    “어마어마한 숫자군요. 첫 마을의 부상자들을 생각하면 감염 위험이 있어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휴고가 내게 의견을 냈다. 나도 동의했다.

     

    “설인의 피 샘플을 채취해 둬. 부상자는 얼마나 되지?”

     

    “급한 건 다섯 명 정도입니다. 저희 둘로 충분하겠습니다.”

     

    “시체는 몰아서 태워야 해. 부상자에 감염자가 있나 확인해서 격리하고.”

     

    “예.”

     

    나는 기슈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훌륭한 토벌을 자축하며 부족민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있었다.

     

    그중에는 타냐도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았나 보다.

     

    “기사, 몸이 빠르더군. 이름과 의미를 알고 싶다!”

     

    “타냐라 하오. 의미는 모르겠으나, 고트베르크 선생님을 호위하고 있소.”

     

    “호위, 지키는 자! 그대도 마음에 들었다!”

     

    기슈타가 부족민들을 정리하고는 나를 찾아왔다.

     

    “타냐는 좋은 전사다, 라스. 좋은 부하를 가졌군. 너도 대단한 기세였다.”

     

    “하하,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런데 빙하족이라는 놈들, 많아도 너무 많은데.”

     

    “음, 전부터 하루가 모르게 숫자를 늘리던 놈들이다. 요즘 들어 우리 영역에 전부 몰린 느낌이다.”

     

    악마의 피에 감염된 후인가.

     

    “목적이 뭐지?”

     

    “어머니겠지. 어머니의 힘을 노리는 놈들은 전부터 항상 있었다.”

     

    ‘야만족이 대악마의 수하가 된 건 목적이 아니라 결과였을 뿐인가.’

     

    악마는 공허차원에 사는 존재라 혼자서는 현계할 수 없다. 카밀라가 소환했던 것처럼 흑마술사가 대가를 바쳐 계약해야 한다.

     

    대륙에서 움직이려면 지금처럼 하수인을 부려야만 한다.

     

    ‘혹시 대악마는 천룡의 마나를 이용해서 나타났던 건가.’

     

    순서가 반대였다. 대악마는 처음부터 이곳을 노리고 야만족을 감염시켰던 것이다.

     

    ‘천룡은 부상을 입어서 잠들어있다고 했지.’

     

    흠.

     

    “기슈타, 혹시 그 어머니가 계신 곳에 나를 데려다줄 수 있어?”

     

    가볍게 던진 제안이었지만 기슈타는 처음으로 명백한 경계를 드러냈다.

     

    “어머니에게? 무슨 생각이냐, 라스.”

     

    “아니 뭐, 잘 알다시피 나는 고치는 사람이잖아. 네 어머니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파서 자고 있으면 낫게 해서 날려보내면 그만 아닌가?

     

    그럼 대악마가 아예 이 세상에 나타날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음.”

     

    기슈타가 잠시 고민하고는 곧 입을 뗐다.

     

     

     

    ***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용의 피를 이은 우리 국가의 사명이다.”

     

    기슈타가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녀는 어느 소국의 공주였다. 대대로 봉인된 천룡을 지키는 국가였다.

     

    대외적으로는 조그마한 변방의 소국이지만 미개척지에서 비밀로 야만족을 관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전대 관리인이 죽었다. 기슈타, 네가 다음 우두머리가 되어 부족민을 이끌어라. 용의 피가 누구보다 진하게 발현한 너에겐 의무가 있다.”

     

    별안간 왕의 명령이 내려왔다.

     

    어렸던 그녀는 격하게 저항했다. 아무것도 없는 얼음만 가득한 땅에서 평생을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의 규율대로 야만인의 한복판에 던져졌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도망쳤다. 나중에 고트베르크 후작령이라 불리게 될 땅을 보며, 흐르는 장강에 감탄하며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내가 의무를 저버리면.’

     

    악인이 천룡의 힘을 손에 넣으면 대륙이 위험에 빠진다.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야생의 땅에서의 삶을 버텨냈다. 야만족과 충돌하고, 싸우고, 구르며 그들을 제압하고 강해졌다.

     

    평범한 말투는 점점 잊어버리고 어느새 단어를 위주로 말하게 됐다.

     

    육류 위주의 식사와 한기에도 익숙해졌다.

     

    야만용녀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녀의 나라는 얼마 안 있어 멸망했다. 전쟁이었다.

     

    의무는 없어졌다.

     

    그래도 기슈타는 계속해서 땅을 지켰다.

    어느새 정든 얼음의 평원을 부족민과 함께, 마수를 타며 누볐다.

     

     

    아래 세상에 대한 동경은 늘 차올랐다.

     

    시간이 될 때면 산을 올라 후작령을 구경하곤 했다. 용은 매보다도 좋은 어마어마한 시력을 가졌기에 곳곳을 세세히 살필 수 있었다.

     

    그곳에 저택이 지어지고 세대가 바뀌는 일도 모두 지켜보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은 그 집안의 청년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흰 머리의 청년. 분명 보잘 것 없던 평범한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먼발치에서 느껴질 정도로 기묘한 아우라를 풍기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강아지를 구하더니 또 언제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숲에 들어가서는 마물과 싸운다.

     

    재밌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겨우 한 발짝 앞인데도 자신은 결코 살 수 없는 그 땅에서, 흰 머리의 청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기슈타는 무심코 평소에도 그에 대해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동년배의 여자와 함께 있었다.

     

    고고하고 품격 넘치는 황금의 소녀. 나라의 공주님이기라도 한 걸까.

     

    자신과는 다른 별세계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어울렸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을 떠나고,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맺어졌을까. 분명 행복하겠지.

     

    자신은 평생 손에 넣을 수 없는 삶이기에, 조금은 동경했다.

     

     

     

    시간이 지나, 바위족을 한참이나 쫓던 때.

     

    족장의 목과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진 흰 머리의 청년을 봤을 땐 상당히 놀랐다.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이 꽤 듬직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 그를 가장 먼저 찾으러 온 건 아니나 다를까, 황금의 소녀였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뜨거운 애정에 기슈타는 홀로 어깨를 껴안았다.

     

    그들이 부럽다고 자각했다.

     

     

     

    별안간 그가 자신을 찾아와 호의와 함께 이름을 밝혔을 땐 굉장히 놀랐다.

     

    그래도 기분이 아주 좋았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와 함께해 보니, 여태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재밌는 남자였다.

     

    그리고 좋은 남자였다.

     

    도도해 보이던 황금의 소녀가 반한 이유가 납득이 됐다.

     

    “기슈타, 혹시 그 어머니가 계신 곳에 나를 데려다줄 수 있어?”

     

    기슈타는 고민했다.

     

    라스가 어머니를 고치려면 직접 봐야 할 테고, 그러려면 지하 무덤의 잠금도 풀어야 한다.

     

    몇백 년간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문이다.

     

    ‘…라스는 나쁜 생각은 안 해.’

     

    기슈타는 냄새로 파악했다.

     

    처음부터 그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 돌이 중요한가 보군.’

     

    사실 처음부터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그것이리라. 기슈타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있는 위치도 명쾌했다.

     

    그 돌은 어머니와 같이 있다.

     

     

    기슈타는 길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다.

     

    라스는 좋은 친구다. 그러니 괜찮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라스의 등을 두드렸다.

     

    “좋다! 어머니를 고치겠다고 나선 이는 네가 처음이로군. 기대하마, 라스!”

     

    “최선을 다해보겠어. 우선 부상자들 보고 오후에 출발하자.”

     

    기슈타의 약속을 받은 라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기슈타가 생각했다.

     

    ‘라스가 어머니를 고치면.’

     

    자신의 의무도 끝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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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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