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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6

       베니베니를 밟고 꺼낸 한 권의 책.

       

       어쩐지 아직까지 얼굴을 붉힌 베니가 페이지를 팔랑이며 여기저기 뒤져보기 시작하더니,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춰 섰다.

       

       “이거네.”

       

       “찾았나요?”

       

       고개를 빼꼼 내밀어 베니의 옆에 얼굴을 들이대며 책을 훔쳐보았다.

       

       볼과 볼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 하지만 정말로 닿지는 않고, 간지러운 솜털의 감각과 따스한 체온만이 전해지는 거리다.

       

       “……!”

       

       베니가 깜짝 놀란 염소처럼 빳빳하게 몸이 굳었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용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특수한 빛을 머금은 수정?”

       

       거기에는 내 달빛을 머금은 수정과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품고 있는 빛의 색이 전부 다른 일러스트가 다수 그려져 있었다.

       

       …문제는 그림만 보이고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지만.

       

       이상하다. 분명 빙의하며 생긴 자동 번역 덕에 이해 못 하는 글은 있어도 읽지 못하는 글은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니가 호다닥 멀어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으….”

       

       “베니. 이거 안 읽어지는데 뭔가요?”

       

       “…뭐긴. 요나 너 같은 사람을 대비해 만들어진 보안 마법이지! 미리 등록해 둔 마력 패턴을 입력하지 못하면 읽을 수 없도록 인지 저하 마법이 걸려있는 거야.”

       

       “왜 그런 귀찮은 짓을…?”

       

       “그건 이 책을 만든 녀석한테 물어봐.”

       

       “? 어디서 산 거 아닌가요?”

       

       “던전에서 죽은 마법사의 짐에서 발견한 건데?”

       

       오우.

       

       하기야. 베니가 모험가로 지낸 시간이 적지 않으니, 다른 모험가의 시체에서 물건을 챙기기도 하는 거겠지.

       

       “…몬스터 파밍보다 인간 파밍이 더 효율이 좋긴 해요.”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네네. 대외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죠?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할게요.”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약탈자인 줄 알아?!”

       

       “베니가 먼저 약탈자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만, 그냥 평소에 적이 많아서 약탈자에게 자주 노려질 것 같긴 해요.”

       

       “……그건 부정할 수 없지. 리디아랑 파티를 꾸리기 전까지는 진짜 매일마다 뭔가 터지긴 했어.”

       

       재차 한숨을 내쉰 베니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대형 클랜은 죄다 병신 같은 놈들뿐이라는 내용.

       

       예전에 대형 클랜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그렇게 한참을 씹어대던 베니가 결국에는 자기가 제일 강하다는 자랑으로 마무리하고서야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달빛을 머금은 수정 말인데. 사실 수정 자체는 그렇게 희귀한 게 아니야. 평범한 수정이 신력처럼 밀도 높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면 특정한 힘을 저장하는 성질이 생기거든. 그리고 미궁은…….”

       

       “멸신전쟁이 남긴 가장 큼직한 흉터죠.”

       

       “맞아. 상층부는 크게 티 나지 않지만, 중층부만 가도 슬슬 멸신전쟁의 흔적이 나타나. 심층에 가서는 거의 전장을 그대로 가져온 곳도 있고.”

       

       “7층 말이죠?”

       

       “그래. 그 빌어먹을 7층 말이야.”

       

       현시대의 최전선은 7층이다. 12층 중 7층이면 상당히 분발한 것 같지만……거기까지 내려가는 데 1,00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1,000년 중에서 200년을 7층에만 쏟아붓고 있다.

       

       아무리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공략이 어려워진다지만, 200년 동안 제자리걸음은 너무한 것 같지만….

       

       길드도, 고위 모험가들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바로 7층이 전쟁의 신의 영역이라는 점.

       

       전쟁의 신은 그 신명답게 멸신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신중 하나다.

       

       승리의 신이 아닌지라 매번 이길 수는 없었지만, 세상에 만연한 전쟁에서 끝없이 힘을 얻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래되고 격렬한 전쟁은 신도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전쟁 그 자체를 즐거워하며 숭배하는 이들이라도, 모든 삶이 투쟁으로 점철되면 정신이 무너지기 마련이니.

       

       결국 신도들은 나날이 피폐해져갔고, 전쟁의 신은 자신의 본분인 전쟁보다도 신도들을 우선시하며 뒤늦게 케어하기 시작했지만…….

       

       하필이면 그때 광기의 신이 사멸하며 전 세계에 광기의 저주를 걸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뚫고 들어오는 광기에 전쟁신의 신도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결국 완전히 미쳐버린 신도들은 살인귀 집단이 되어 살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신은 그런 신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들이자 전우를 어떻게 버리겠는가.

       

       결국 전쟁의 신이 선택한 것은 하루빨리 이 전쟁을 끝내 광기를 완전히 연소시키는 것.

       

       그는 이전보다도 더욱 공격적인 태도로 다른 신을 하나하나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오로지 신도들을 위하여.

       

       다만, 전쟁의 막바지. 이제 남은 신이 열 명 남짓한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설령 전쟁의 신이 승리하여 판 대륙의 유일신이 되더라도, 한번 피어오른 광기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싸울 상대가 없으면 자기들끼리, 그러고도 모자라면 전쟁의 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만큼 미쳐버리고 말았다.

       

       광기의 화염이 불사르는 것은 욕망이 아닌 영혼이었고, 잿가루는 다시 나무로 돌아가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결국 전쟁의 신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태어나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패배를 선언했다.

       

       다른 신들과 함께 스스로를 희생해 판 그레이브에 묻히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전쟁의 신은 영면에 들었고…미쳐버린 신도들은 자신의 신과 함께 순장되었다.

       

       그렇다보니 7층의 필드는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잔혹한 전장. 몬스터로 등장하는 것은 멸신전쟁 당시에 가장 악명높은 조직이었던 전쟁의 신도들.

       

       지금껏 찬찬히 미궁의 기믹을 파훼하고, 몬스터의 약점을 찌르던 모험가들은 7층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전쟁.

       

       7층을 공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뛰어난 사냥 실력이 아닌 전쟁 수행 능력이었다.

       

       탐험가와 사냥꾼의 기질이 반반 섞여 있던 기존의 모험가들이 고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에 7층까지 도달한 고위 모험가는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미 공략된 층은 일정 이상 스펙을 쌓거나,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다음 층에 올라갈 자격을 얻지만.

       

       아직 공략되지 않은 층에는 명백한 클리어 조건이라는 것이 있다.

       

       이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스펙을 쌓고,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려도 다음 층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7층의 클리어 조건은 바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

       

       개개인의 기량, 전술, 머릿수, 무장 상태 등등.

       

       모든 면에서 모험가 측은 미쳐버린 전쟁의 신도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과거의 기록을 통해, 하나하나가 영웅이었던 전쟁의 신의 신도들의 특징과 약점을 알아내 간신히 버티고만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

       

       다만, 예전에는 그나마도 불가능해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많이 전황이 좋아지긴 했다.

       

       그만큼 고위 모험가의 수도 늘었고, 기술 또한 빠르게 발전해 더 강한 장비로 무장했으며, 오랜 연구로 대 전쟁 신도 전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즉, 지금까지는 뛰어난 일부 모험가들이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을 뚫어 뒀다면.

       

       이제부터는 모험가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져야만 더 깊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이런 종류의 저장 수정은 미궁 깊은 곳에서 발견될수록 더 희귀한 힘을, 더 순수한 형태로, 더 많이 저장할 수 있어.”

       

       “오오…! 그럼 이건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내가 내민 창백한 빛의 수정을 바라보던 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겠지만…안에 담긴 달빛, 이 경우에는 달의 마력이지. 아무튼 그 힘의 총량과 순수함만 보면 7층에서 주웠다고 해도 믿을 정도야.”

       

       “……네? 그 정도라고요?”

       

       3성이 높은 성급이긴 한데, 하이엔드 컨텐츠에서 드랍되는 수준의 재료라니….

       

       아니지. 이건 기준이 사랑의 여신이라 가능한 일인가.

       

       우리 같은 필멸자 입장에서야 7층이 지난 200년간 변함없는 최전선이지만…사랑의 여신 입장에선 12층 중 겨우 7층 아닌가.

       

       뒤로 갈수록 더 공략이 어려워진다는 걸 감안했을 때, 3성에서 7층 수준의 템이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아무튼 엄청 좋은 템이라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베니를 바라보았으나…이어진 말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근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안에 담긴 힘이 평범하네. 달빛…정확히는 달의 마력이거든? 이건 굉장히 보편적인 에너지야.”

       

       “…어떤 효과가 있는데요?”

       

       “냉기, 어둠, 물, 고요함. 뭐 그런 것들을 강화해 줄 거야.”

       

       조금 무협 느낌으로 말하자면 음기陰氣를 증폭해 준다는 느낌이구만.

       

       “아, 한 가지 예외가 있네.”

       

       “뭔가요?”

       

       “적절히 가공하면 라이칸스로프나, 늑대 수인의 신체 능력을 강화해 줄 거야.”

       

       “늑대 수인? 혹시 엘리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응. 애초에 엘리 선배의 장비 중에 그런 거 많을걸? 이만한 물건은 없지만.”

       

       그럼 정해졌네. 이 수정은 나랑 엘리를 위한 물건을 만드는 데 써야겠네.

       

       수정이 제법 큼직하니, 둘이 쓸만한 물건을 만드는 데는 넉넉할 터.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걸로 반지 2개 만들고 싶은데 혹시 좋은 장인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바, 반지라니…흐흥. 역시 그랬던 건가. 좋아. 요나가 그렇게 원한다면야. 아, 어차피 손가락 크기나 디자인도 정해야 하니 우리 같이 장인 거리 쪽에 가볼까? 나나 요나나 손가락 굵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혹시 모르잖아.”

       

       갑자기 기분 좋아졌는지 말이 많아진 베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이거 하나는 엘리 줄 건데요?”

       

       “…….”

       

       베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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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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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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