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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6

       새해가 찾아왔다.

       

       21살이 된 프란체는 이제 영애가 아닌 어엿한 레이디라고 불릴 나이.

       

       하지만 그녀가 불리는 이름은 레이디 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사치품 사업을 독점한 대부호.

       

       마법사들의 왕이라 부를 수 있는 마탑주.

       

       페델리안 사자 패를 가진 유일한 귀족.

       

       데카르트 공작가의 주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모든 걸 잃은 삶이었다.

       

       “공작님, 가벼운 산책은 어떠세요? 날씨가 아직 쌀쌀하지만, 쌓인 눈이 밟혀서 기분이 좋아요.”

       

       폐인과도 같은 프란체를 보다 못한 헬레나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작님…….”

         

       헬레나는 축 늘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밝게 웃으며 즐거움으로 가득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이리 변할 줄은 몰랐다.

         

       “공작님, 우유를 넣은 홍차를 준비할까요? 설탕도 좋고요. 아니면 벌꿀차는 어떠세요?”

         

       계속 말을 걸어봤지만 무응답. 실어증을 걸린 사람과 같다.

         

       ‘공작님…….’

       

       진 바렌베르크가 떠난 이후. 프란체는 늘 저런 상태다.

       

       눈빛에 생기가 없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좋아하던 그 홍차도 이젠 마시지 않는다.

       

       공작령의 업무는 집사장 플뤼겔이 대부분 처리하고 있고, 사업은 엘반 자작이, 마탑 운영은 카자르가 하고 있다.

       

       프란체는 이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그 무엇도 하고 있지 않다.

       

       정확히는,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공작님, 필요한 게 있으시거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종을 울려주세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헬레나는 안쓰러운 눈빛을 거두고 프란체의 침실을 나갔다.

       

       “…….”

       

       진이 사라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프란체의 삶은 크게 변화했다.

       

       1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모든 세상이 다시 흑백으로 변하여 색을 잃었다.

       

       상실감과 깊은 슬픔으로 인해 일상적인 활동들에 대한 흥미와 의욕이 사라졌고, 그토록 연구하던 <간절한 영원의 노래>도 해독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영혼을 결속한다면 죽어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 마법이라면 어떻게든 이어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다.

       

       차마 진에게 나를 위해서 고통을 참아줘, 죽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어 줘,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아파하는지, 어떤 비명을 지르는지 코앞에서 지켜봤으니 말이다.

       

       프란체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 결과로 웃음조차 잃어버려 지루하고 공허한 시간만을 보내고 있다.

       

       서서히 죽어가는 감정.

       

       그러던 그때. 덜컥, 침실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말꼬리처럼 묶은 새하얀 머리카락. 붉은 선홍색의 눈동자가 프란체를 응시했다.

       

       “공작님.”

       

       카자르였다.

       

       프란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카자르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금방 흥미를 잃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공작님, 제 말을 들어주세요.”

       

       청아한 카자르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진중했다.

       

       “…….”

       

       역시나 예상대로 프란체는 답이 없었다.

       

       긴 물결처럼 이어져 찰랑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어 푸석해져 버린 지 오래고, 에메랄드처럼 빛나던 녹음의 눈동자는 탁기에 물들어있다.

       

       그녀는 그저 투박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창밖만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하아…….”

       

       카자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휘저었다. 이대로면 프란체도 죽는다. 이는 진도 바라지 않을 터.

       

       ‘어쩔 수 없어. 이 방법밖에.’

       

       우선 진을 찾아서 얘기라도 나눠야겠다. 프란체에게 생긴 마음의 병이 훨씬 심각하니까.

       

       “공작님, 제게 방법이 있어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며 대답이 없는 프란체. 카자르는 말을 이었다.

       

       “우선 진 씨를 찾을 거예요. 그리고 그 지병을 어떻게든 해결해볼게요. 이전과 달리 저는 초월 마법사가 되었으니까요.”

       

       진에게 새겨진 마법진은 초월 마법사가 초월자의 영혼을 매개체 삼아서 만든 마법이다.

       

       비록 이제 막 초월 마법사에 입문했을지라도 단서는 찾아낼 수 있을 터. 일말의 희망은 있는 셈이다.

       

       “제가 진 씨를 검사하면서 발견했던 모든 걸 말씀드릴게요. 듣기만이라도 해주세요.”

       

       침대에 걸터앉은 프란체가 천천히 카자르를 응시했다. 카자르는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음, 우선 진 씨한테 새겨진 마법진부터 말씀드릴게요.”

       

       여전히 미동이 없는 프란체였지만, 카자르는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전에 진 씨의 몸 상태를 검사했을 때, 두 가지의 마법진이 발견됐어요. 시간과 이동에 관련된 마법이에요.”

       

       살며시 고개를 든 프란체가 카자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동자가 생기를 잃어 더이상 빛나지 않았다.

       

       “저는 이게 진 씨의 지병과 관계가 없다곤 못 보겠어요.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겠죠. 지금의 제가 다시 검사하면 뭔가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카자르는 프란체의 손을 어루만졌다. 마치 현재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온기를 잃다 못해 한없이 차가운 손길이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두 가지예요.”

       

       이대로면 정말 프란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싶어서 생각한 방법이었다. 부탁을 받은 것도 있고 정이 들은 것도 있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모습은 절대 못 본다.

       

       “첫 번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진 씨를 찾아서 제가 그 사람의 몸을 연구할 거예요. 공작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건 위험하니 불가능하겠지만, 제가 대신 말을 전해드릴 순 있어요.”

       

       카자르는 “두 번째로 넘어갈게요.”하곤 말을 이었다.

       

       “진 씨는 마법진을 새긴 게 초월 마법사라고 했어요. 당사자라면 그 지병도 알고 있겠죠. 분명 해결할 방법도 알고 있을 거고요. 그 사람이랑도 만나봐야 해요.”

       

       워낙 제멋대로인지라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초월 마법사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게 공작님을 위해 생각한 두 가지 방법이에요. 특히 두 번째는 쉽지 않은 문제라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고민에 빠진 걸까? 아니면 생각을 그만둔 것일까. 카자르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애써 삼켰다.

       

       ‘진짜, 그 사람 나중에 보기만 하면 정강이가 부러지도록 차버릴 거야. 열 번, 아니 스무 번.’

       

       떠나는 이유가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지라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지 말았어야지.’

       

       생각은 이렇게 해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카자르 또한 알고 있다. 분명 진은 프란체와 거리를 두려고 했겠지.

       

       다만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못 했을 뿐이다.

       

       카자르는 입술을 머금고 다시 프란체를 바라봤다. 여전히 답은 없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제가 생각한 건 이 두 가지예요. 생각이 정리되시면 종을 울려서 헬레나에게 전해주세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고개를 휘젓곤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둘 다…….”

       

       프란체가 조용히 읊조렸다. 카자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네?”

       “둘 다 하라고.”

       

       조금만 스쳐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음성에 카자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알겠어요. 그럼 우선 첫 번째부터…….”

       

       카자르가 말하던 도중, 별안간 프란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둘 다 동시에 진행하렴.”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고대 마법서를 카자르에게 건넸다.

       

       “너는 영혼 결속 마법을 해독해.”

       “…네?”

       

       카자르가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프란체는 눈을 얕게 뜨고 마법서를 들이밀었다.

       

       “여기에 있는 거 다 알아. 간절한 영원의 노래. 네 말을 듣고 결심했어. 어떻게든 진을 살릴 방법을 찾은 다음, 다신 도망치지 못하도록 영혼 결속을 걸어버릴 거야.”

       

       설마 했는데 거기까지 해독했던 건가. 되도록 거절하고 싶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대로면 프란체가 죽게 생겼으니.

       

       “…알겠어요.”

       

       카자르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마법서를 받아들었다. 룬어 해독은 완료했지만, 마법식을 풀어야 하고 실험도 해야 하는데…….

       

       ‘마법식은 금방 풀 수 있지만, 실험이 문제네.’

       

       프란체와 진의 영혼을 결속시키기 전, 안전을 위해 실험은 필수다. 다만, 누구를 가지고 실험을 하냐가 문제다.

       

       곤란함을 숨기지 못한 카자르가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어루만지자, 프란체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실험체가 필요해요.”

       “실험체?”

       “네. 마법을 실험할 인간이요.”

       

       마수에게 사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인간과 마수의 영혼은 질 자체가 다르다.

       

       괜히 마수로 실험했다가 오차가 발생하면 되돌릴 수도 없으니 인간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걱정하지 말렴.”

       “어쩌시려고요?”

       “판옵티콘의 사형수들을 데려올 거야.”

       

       확실히. 그들이라면 실험체로 적합하다. 죽음으로도 속죄하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그런데 괜찮을까요? 아무리 사형수라고 해도 공작님께서 인간을 데리고 마법 실험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꽤 성가실 거 같은데요.”

       

       죽어도 마땅한 벌을 저지른 사형수에게 누가 동정을 품을까 싶지만, 현재 프란체의 권위를 노리는 귀족들이 많다.

       

       분명 사형수라는 정보만 빼서 트집을 잡을 터…….

       

       “상관없어. 내겐 진이 더 중요해.”

       

       프란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해하는 이는 죽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모두에게 말해서 차근차근 계획을…….”

       “아니, 너는 결속을 준비하렴. 다른 건 내가 직접 주도할 거야.”

         

       진을 찾는 일이다. 이미 자신을 한 번 속였던 이들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길 생각은 없다.

       

       곧장 나갈 준비를 마친 프란체. 움직이기 편한 승마복에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엑시드에 다녀올 거야. 케일과 라데아에겐 미리 말해두렴.”

       

       카자르는 “네, 알겠어요.”하고 대답한 뒤 침실을 나섰다.

       

       “후…….”

       

       프란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이 쉴 틈 없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책감. 그럼에도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욕심에서 나온 자기혐오.

       

       어떤 판단을 내려도 모두 프란체의 의견을 존중했을 거다. 그러나 차마 결정할 수 없었다. 영혼 결속을 하더라도 결국 진이 죽는다는 건 다름이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이 죽지 않는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법을 찾을 거야.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날 거야.’

         

       카자르가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원흉으로 추측되는 초월 마법사와 전쟁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진의 병을 치료할 거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영혼을 결속시켜 버릴 거다.

       

       프란체는 에메랄드 목걸이를 꾸욱 쥔 채 눈을 부릅떴다. 모든 방법이 실패한다면 진과 같이 자신도 죽겠다는 결심이었다.

       

       ‘진, 여기선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야.’

       

       이 애정이 담긴 목걸이를 주지 말았어야지.

       

       키스하며 사랑을 속삭일 때 확실히 거부했어야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할 거니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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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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