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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7

        버멜이 태양을 못 보고 지낸 지도 며칠이 흘렀다.

       

        ‘돌아가시겠군.’

       

        비타민 D 합성이 안 되니 뼈가 흐물거리는 듯하다. 이래서 빛을 보고 사는 게 중요하다.

       

        형광등이 있기야 했지만,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엘프로 빙의한 버멜에게는 이 공간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기껏해야 스무 평 되는 공간.

       

        별로 넓지도 않은데 사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다. 마치 어릴 적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보던 방공호처럼 생겨먹었다.

       

        이런 으스스한 장소에서 몇 날 며칠을 살다 보면 사람이 미친다. 폐소공포증까진 아니더라도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실시간으로 와닿는다. 버멜은 퀭한 눈을 비비며 통조림을 깠다.

       

        ‘판타지 RPG 물에서 혼자 아포칼립스를 찍고 있다니.’

       

        명백한 장르 드리프트였다. 그래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아무렴. 죽는 것보다야 이런 곳에 처박혀 사는 게 낫지.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였다.

       

        버멜은 제국에서 손수 개발한 P-레이션을 까먹으며 일정을 점검했다.

       

        ‘1막도 벌써 후반부로 왔구나.’

       

        <다키스트 아카데미아>는 총 세 파트로 나뉜다.

       

        1막이 틸레트 아카데미.

        2막은 일리야드 아카데미.

        3막은 마왕과의 결전.

       

        DLC로 수인 아카데미… 같은 게 있지만 그건 100년 뒤 이야기니까 당장은 상관없고.

       

        플레이어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라면 틸레트 아카데미에서 지낼 날도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장 버멜 자신만 하더라도 1학기 만에 자퇴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사장의 배려 덕택에 교양관 지하에서 숨어 지내고는 있었지만.

       

        다른 고인물 같았으면 이 시점에서 엘프 나라로 가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버멜이 그러지 않고 여기서 버티는 건 순전히 어느 소녀 때문이다.

       

        “에테르….”

       

        동향 사람이 타락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가끔가다 급발진하기는 하지만…. 또 계약이니 뭐니 하면서 인생을 딱딱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20년이 넘는 세월을 홀로 싸워온 버멜에게는 가뭄에 내린 단비같이 반가운 존재였다.

       

        그러니 마왕군 손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여기에 남았다. 

       

        주책맞은 일이라는 건 안다. 여기에 이러고 남아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차라리 적 AI가 저능아처럼 변하는 ‘쉬움’ 난이도라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변칙적인 패턴을 구사하는 최고 난이도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보는 게 낫다.

       

        “하다못해 계약한 정령이라도 있었으면 좋았는데…….” 

       

        버멜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늘이 억까라도 하는 걸까? 정체 모를 살기를 느끼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길게 생각할 거 없었다. 저 멀리 복도에서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로즈마리의 것이다.

       

        버멜에게는 게임 지식이 있었으니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오히려 여태껏 왜 안 오나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버멜은 미리 준비해 둔 캐비닛으로 숨었다. 캐비닛은 이 방과 마찬가지로 철제로 이루어져 있어 로즈마리의 스코프가 탐지하지 못한다. 또한 벽과 구분할 수 없도록 안쪽에 설치해 놓았다. 육안으로 발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좁아….’

       

        원래는 사람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보니 양팔을 자유롭게 움직이긴 글렀다.

       

        – 쿵, 쿵, 쿵.

       

        – 터엉─!!

       

        버멜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만약 여기서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게임 오버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숨죽여야 한다. 그것만이 당장 살길이다.

       

        “……찾았다.”

       

        순간 심정지 올 뻔했다.

       

        한 손으로 문짝을 뜯어낸 로즈마리가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생명체라도 있으면 일단 죽이고 볼 기세였다.

       

        “…어라. 아무도 없네?”

       

        로즈마리는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며 바이올린 현을 빙글빙글 돌렸다. 

       

        “정말 아무도 없어? 없으면 나 조금 섭섭할지도…. 저기 밖에서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힝힝거리는 시늉을 하며 눈가를 부비적거리는 로즈마리.

       

        “어여쁜 공녀님이 울고 계시잖아. 이래도 안 나와?”

       

        로즈마리의 연설은 5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저게 평범한 소녀였다면 조잘거리는 게 귀엽다는 정도로 감상을 그쳤겠지. 하지만 상대는 괴물이다. 그리고 지금 이 게임의 추정 난이도는 ‘최상’이다. 그 말인즉, 언제든지 변칙적인 패턴을 적이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바로 지금처럼.

       

        – 쾅! 쾅! 쾅!

       

        포기하고 돌아가려는가 싶더니, 갑자기 스태프로 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로즈마리는 미친년처럼 바이올린 현을 휘둘렀다. 대패질을 하듯 철로 된 벽이 잘게 썰린다. 제 딴에는 이걸 연주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가위로 자른 종이처럼 말끔한 절단면을 담긴 벽면에서 열감이 솟아오른다. 버멜은 캐비닛 안에서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봤다. 이윽고 로즈마리는 자신이 있는 곳에도 칼질을 해댔다.

       

        캐비닛 사이로 철사 같은 현이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서 참아냈다.

       

        그러다가 왼팔에 뜨듯한 열감이 들었다. 팔 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진짜 좆망겜…….’

       

        쾅!

       

        오른쪽 눈 바로 곁을 뚫고 지나가는 스태프의 모습에 버멜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조금만 더 아래였으면 그대로 귀가 잘려 나갈 뻔했다.

       

        “와. 진짜 지랄하지 말라고 해.”

       

        툴툴거리는 로즈마리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저 대사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짜로 없다고? 이 엘프놈 대체 어디 간 거야?”

       

        20분이나 난도질을 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로즈마리는 마력초를 한 대 더 태우더니 카메라처럼 생긴 무언가를 소환했다. 이후 난도질한 자국을 원상복구하고 방의 사각지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이 또한 게임에선 거의 나오지 않았던 패턴이다.  

       

        설치에 또 세 시간이 걸렸다. 시간을 대강 셈해보니 새벽 4시는 된 것 같았다.

       

        “후아암.”

       

        로즈마리가 하품을 하며 스태프를 거둘 때까지 버멜은 잠들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방을 정리하고 나간 이후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밖에 나가면 바로 걸린다.’

       

        정확히 어떤 카메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천하의 로즈마리가 설치한 물건이다. 절대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 덜컹

       

        그 뒤로 얼마나 흘렀을까.

       

        지하실에 있다 보니 시간관념이 무뎌진다.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새벽인지 오밤중인지 모르겠다. 언제일까. 바깥소리를 들어보면 점심시간인 듯한데.

       

        캐비닛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갇혀 꾸벅거리고 있자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왔다.

       

        “……!”

       

        반가운 얼굴이다.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냈다. 그리고는 사각에 놓인 카메라를 하나씩 후려쳐 가며 부숴댔다.

       

        “이제 나와도 돼.”

       

        렌즈 박살 나는 소리가 여섯 번 들리고 나서야 소녀가 입을 열었다. 버멜은 캐비닛 문을 발로 뻥 차며 앞으로 엎어졌다. 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흑사병 때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만했는데.

       

        마수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이 쏠리자 지옥이었다. 이대로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하다. 버멜은 숨을 헐떡이며 에테르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고 여기 온 거야?”

        “오늘 로즈마리가 수업 시간 내내 졸더라고. 밤늦게까지 뭐하냐고 물었더니 공부했다더라?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해서 자연스럽게 너 때문이란 걸 알게 됐지.”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맙다. 너 아니면 진짜 죽을 뻔했어.”

        “감사 인사는 넣어둬. 안 그래도 지금 시간 없거든.”

        “시간이 없다니?”

        “지금 점심시간이야. 로즈마리는 다른 애들한테 묶어놓고 몰래 빠져나왔어. 지금은 스코프도 못 켤 테니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빨리 돌아가야 돼.”

       

        에테르는 대충 인사하고 나갔다. 버멜의 시선은 그 궤적을 망연히 쫓을 뿐이었다.

       

        “이걸 알았다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게임 지식을 활용하여 미래를 대하였다.

       

        처음 몇 년은 잘 들어맞았다. 미래를 예견할 때마다 놀라워하는 소꿉친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치 예언자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스토리에 마수들이 점점 개입하기 시작할수록. 

       

        세상은 자신이 알고 있던 방향과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방금 것만 하더라도 로즈마리의 감시카메라 설치를 예지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 소녀는 달랐다.

       

        아니, 저 빙의자는 달랐다.

       

        이 세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수의 움직임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물론 그녀가 금안족인 것도 한몫하겠지만.

       

        저 친구는 천재다. 본 전공인 물리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에도 천부적이다.

       

        – 널 착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오히려 그러니까 남을 잘 믿지 못하는 건가…?’

       

        버멜은 어제 에테르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곱씹었다.

       

        자신은 현실이 게임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여 정해진 미래를 준비했고, 예측과 실제가 다르면 당황하여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반면 에테르는 처음부터 이 세상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했고, 예측과 실제가 다르더라도 재빨리 전략을 변경하여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제야 버멜은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너무 지식으로만 날로 먹으려고 했어.’

       

        그런 마인드로는 못 깬다. 지금 정신상태로는 해피 엔딩이 요원하다.

       

        그렇다면 바꿔야 한다.

       

        ‘이다음 에테르는 분명히 카이뤼삭 교수님을 찾아갈 거야. 플레어를 소형화한다고 했으니까,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겠지.’

       

        기존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구축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한 ‘생각’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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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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