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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7

     

    “어떻게 생각해?”

     

    천둥족 부상자를 치료한 후에, 설인들의 피를 검사한 자료를 검토하며 휴고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신경계 감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라고 생각합니다. 호흡계는 아니고.”

     

    “피를 통해 전파되는 계열이야. 악마의 피지. 해충을 통해서도 옮을 수 있어. 다행히 이 지역에 벌레는 없지만.”

     

    “위험하군요.”

     

    “설인의 상태를 보면 증상은 세포 상해, 착란, 공격성 강화. 대신 세포가 사멸하기 직전 팽창하면서 근섬유를 강화해.”

     

    쉽게 말하면 광폭화다. 생명력을 대가로 힘을 얻는다.

     

    “마치 흑마술 같군요.”

     

    “흑마술은 마족의 마법이지. 마족에서 흑마술을 발달시키는 놈들은 주로 악마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대처법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처음 봤던 환자에도 감염자가 있었어. 하지만 증상은 발생 전이었지.”

     

    “예.”

     

    “증상 발생 전이면 감염 상태여도 백신으로 치료가 가능해. 파상풍 주사와 항생제도 같이 처방하자. 백신 개발 전에 발병해버리면 격리해서 자가 완치하길 바랄 수밖에.”

     

    “백신, 예방제 말씀이시군요. 빨리 필요하겠습니다.”

     

    “그래. 바로 개발 착수한다.”

     

    환경은 이렇지만 어쩔 수 없지.

     

    혈액 샘플은 많이 있다. 바이러스를 채취해서 연금술로 병원체를 약화해 제작할 예정이다.

     

    “당분간 최근 수렵한 육류 먹지 말라고 천둥족에 공지 내려둬. 만들어지면 부상자들부터 접종하겠어. 첫 마을로 이동할 준비도 해 둬.”

     

    “알겠습니다.”

     

    휴고가 먼저 움막을 나섰다.

    나는 손바닥을 비벼 [추출]을 시전했다.

     

     

     

    ***

     

     

     

    “후.”

     

    작업이 끝났을 땐 어둑한 밤이었다.

     

    나는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기대서 기진맥진한 몸을 늘어뜨렸다.

     

    “고생하셨습니다. 휴고를 불러올까요.”

     

    “어, 부탁해.”

     

    타냐를 시켜 휴고에게 백신을 들고 첫 번째 마을로 향하도록 했다.

     

    브루노나 소대장은 여기에 있지만 주사를 놓을 줄은 모르니 휴고를 기다려야한다.

     

    클로에가 있으면 작업이 더 빨랐을 텐데.

     

    지금은 아셀라를 담당하느라 바쁘겠지.

     

     

    [No. 101 : 마력폭주 29% ]

     

     

    수치가 안정적인 걸 보니 푹 자는 것 같다.

     

    숫자에서 아셀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없으니 기회라고 몰래 커피를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클로에는 아셀라가 억지를 부리면 절대 막지는 못했을 테니.

     

    “나 참.”

     

    외지에 나왔다고 향수병에 걸린 것도 아닐 텐데, 어째 아셀라의 잔소리가 약간은 그리웠다.

     

    “일은 끝났나, 라스.”

     

    “음? 아, 기슈타.”

     

    어느새 기슈타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먹을래?”

     

    그녀가 품에 한 움큼 과일을 안고 와서는 하나를 내게 내밀다가 자기 입에 먼저 우겨넣었다.

     

    맛있긴 해. 쓴맛 빠지고 육즙 많은 자몽 느낌이랄까.

     

    과일을 하나 받아 우물거리니 그녀가 내게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부상자들을 고치기 위한 일이라고 타냐에게 들었다.”

     

    “초동 대처는 끝났어. 임상이 안 돼서 조금은 불안하지만 잘 먹힐 거야.”

     

    연금술로 몇 번 검증했으니 틀림없다.

     

    “음, 어려운 건 잘 모르겠다만. 라스 네가 한 일이니 분명 잘 되겠지!”

     

    기슈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을 내비쳤다.

     

    의학도 치유술도 전혀 모르는 그녀이기에 확실하게 나를 신용한다. 실제로 부상자를 고치는걸 눈앞에서 봤으니까.

     

    오히려 마음에 드네.

     

    “어머니에게 가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하겠나? 나는 상관없다만, 피곤하면 내일로 미뤄도 된다.”

     

    “지금 가자. 어차피 바로 고치긴 힘들 테니 상태라도 파악하고 싶거든.”

     

    “알았다. 탈것을 준비하지.”

     

    시원하게 받아들인 기슈타와 어둠이 깔린 평원으로 나선다.

     

    달빛이 사방에서 반사되고 있었기에 어둡지는 않았다.

     

    뒷좌석에 탑승하니 기슈타가 내 팔을 자기 허리춤으로 끌어 당겨갔다.

     

    “더 단단히 붙잡아라. 떨어져도 안 잡아준다?”

     

    “놀리지 마. 나 진짜 무서워.”

     

    “하하하하! 아랴!”

     

    둘이서 평원을 내달린다.

     

    들썩이는 안장 위에서 기슈타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

     

     

     

    “여기인가.”

     

    얼음 평원의 중앙부에 도착했다.

     

    가까이 와서 보니 돌무덤은 생각보다 사이즈가 컸다.

     

    “이 주변은 얼음이 녹아있는데.”

     

    은은히 온기가 퍼지고 있어서 두껍게 입은 옷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천룡의 마나 회오리의 영향 같았다.

     

    “여기부터는 주의해라, 라스. 나를 정확히 따라오지 않으면 벌집이 된다.”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

     

    “수도 없이.”

     

    탁, 기슈타가 내 팔목을 끌어당기고는 조심스레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빙글빙글 돌아 무덤에 도달한다. 웅장한 장식이 된 정문은 내버려 두고 구석의 비밀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화륵, 기슈타가 횃불을 켰다. 공기가 조금 탁해서 마스크를 썼다.

     

    “여기도 미로다. 처음 오면 길을 잃는다.”

     

    “상당한 보안이네.”

     

    “멍청한 놈들일수록 마나에 끌리기 마련이지. 마물이 가장 심하고, 바위족과 빙하족도 다를 바 없어. 우리는 그런 놈들과 오래 싸워왔다.”

     

    마침내 최하층에 도달했다.

     

    거대한 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지금은 이빨이 꽉 물려 꼼짝도 안 한다.

     

    그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문 자체가 거대한 전설급 아티팩트나 마찬가지였다.

     

    문의 중앙에 파인 홈의 모양은 굉장히 익숙했다.

     

    ‘폭풍석이 들어갈 자리야.’

     

    기슈타가 홈의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여기에 들어갈 돌의 이름은 라푸게타. 폭풍을 부르는 돌이라는 뜻이야. 왜 그런지 알고 있나, 라스.”

     

    “폭풍을 일으켜서?”

     

    “아니. 그 돌에 그런 대단한 힘은 없어. 그건 그저 모든 걸 열 수 있는 열쇠다.”

     

    “열쇠라.”

     

    “안에 얼마나 위험한 게 들어있어도 전부 열어버려서 폭풍이 일어나 버리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 돌이 탄생했을 때 세상의 모든 봉인은 바보가 되었지!”

     

    그러니까, 기슈타의 말에 의하면 이 문도 아뮬렛도 폭풍석과 세트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문과 아뮬렛이 먼저 세상에 있었다. 이 문은 내용물을 봉인하고, 아뮬렛은 강력한 능력을 감추고 있다.

     

    폭풍석이 나타나자 둘은 물론이고 다른 전설급 아티팩트도 잠금부의 모양이 변했다는 건가.

     

    ‘겨우 돌멩이가 왜 전설급인가 했더니만.’

     

    그런 중요한 물건이니 역시 기슈타가 가지고 있었나, 생각하는 찰나.

     

    ―쿠구궁!

     

    기슈타가 층계참 옆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밀어 움직이더니 아래 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폭풍석이었다.

     

    “그 위험한 걸 거기다 놔?”

     

    “가지고 다니면 잃어버리잖나.”

     

    집 열쇠를 현관 화분 밑에 놓고 다니는 느낌인가.

     

    차라리 도어락으로 해놓지 그랬어.

     

    기슈타는 별 망설임도 없이 폭풍석을 홈에 끼워 넣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번쩍 빛이 일고는 쿠구궁!

     

    무슨 원리인지 내 키의 다섯 배는 되는 거대한 석문이 절로 열렸다.

     

    “라스, 이 분이 어머니다.”

     

    “오.”

     

    안은 원형 콜로세움 같은 구조였다.

    신전 같은 느낌이었는데, 층계 아래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존재를 목도할 수 있었다.

     

    “이게 진짜 드래곤이구나.”

     

    여태 인류가 용이라고 부르던 존재들도 충분히 용처럼 생겼고 와이번과는 구분할 정도로 위엄이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새하얗고 거대하며 아름다운 몸체는 존엄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밖에서도 관측된 마나 회오리는 그녀의 숨에 불과했다. 그 무엇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무색의 마나가 콧김과 함께 흘러나온다.

     

    다만 그 피부는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거무죽죽하게 타서 염증이 범벅되어 있었다.

     

    “옛날에 전쟁이라도 있었나?”

     

    “전설에 의하면 사룡과 싸우고 스스로 잠에 드셨다고 해.”

     

    “조금 가까이서 볼게.”

     

    나는 긴 계단을 내려가 조심히 천룡에게 다가갔다. 찬찬히 몸을 살폈다.

     

    “진단.”

     

     

    ―――――――――――

     

    부상 : 화학성 중증 화상

    부상 : 접촉성 피부염

    부상 : 열상

     

    ―――――――――――

     

     

    “화학성 화상이라. 이 검은 물질이 주기적으로 자극하며 부상을 일으키는 상황이야. 자연치유는 불가능해.”

     

    비유하자면 지속뎀 –1, 지속힐 +1로 영원히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 상태다.

     

    사룡과 전쟁이 있었다고 했지.

     

    내가 만났던 사룡은 2대째다. 천룡이 1대 사룡을 토벌하고 부상이 치유될 때까지 스스로 봉인할 생각이었으나, 영영 안 낫는 상처라곤 몰랐던 거다.

     

    “저주인데 이거.”

     

    우선 해주가 필요하겠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화상을 제거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면적을 생각하면 대량의 연고도. 드래곤도 신체는 도마뱀이니까 파충류고, 코르티코스테로이드도 유효하려나.

     

    다음엔 치유주문.

     

    드래곤의 거대한 피통을 채우려면 초대량으로 때려 부어야 한다.

     

    “라스, 좀 어때 보이나.”

     

    기슈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는 가능해 보여. 다만 사이즈가 커서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그러면?”

     

    “약제는 내 제약공장의 약제사들을 동원해서 만들어야겠고, 지금 쓸 수 있는 의사는 열 명 정도 있어. 걔들을 다 동원해도 시간은 꽤 걸리겠어.”

     

    “외부인이 어머니를 본다고? 그건 안 돼!”

     

    아니나다를까, 기슈타가 강하게 반발했다.

     

    “뭐, 기슈타 네 입장은 잘 알아.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 혼자서 작업해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언젠간 가능할 테고.”

     

    “그러냐…?”

     

    “대신 이번엔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나는 기슈타에게 본론을 꺼냈다.

     

    “그 폭풍의 돌을 잠깐 빌리고 싶어. 이 아뮬렛의 문제 때문이야. 1주일 정도.”

     

    “음.”

     

    기슈타가 팔짱을 끼고 턱을 끌어당겼다.

     

    “라스, 알겠지만 그 돌은 어머니의 방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위험해져.”

     

    “나도 잘 알아. 제대로 관리할게.”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네가 다녀오는 동안 이 문을 열어놓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슈타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

     

    “어려운 선택이지.”

     

    “그래, 정말 어렵다. 대체 나는 뭘 골라야 하는가!”

     

    “뭐, 생각해보고 얘기해주면 나도 나은 대안을 디벨롭해보겠어.”

     

    기슈타는 한참을 끙끙대며 발을 굴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나 어려운 선택이다. 대체 야식으로 멧돼지와 연어 중에 뭘 먹어야 한단 말이냐!”

     

    뜬금없는 기슈타의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야식 메뉴 말이다. 왜 항상 고르기 이렇게나 힘든 것이냐, 라스!”

     

    “아니, 폭풍석 얘기였잖아.”

     

    “음? 아아, 그건 진작에 결정했다. 네 말대로 침소에 의사를 들여 어머니를 고치기로 했다.”

     

    중요한 결정은 천둥보다도 빠르게 시원하게 내리시는 족장님이었다.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그보다 고기는 당분간 먹지 말라니까.”

     

    “여기엔 고기밖에 먹을 게 없다! 예전부터 저장해놓은 거니 괜찮아. 바싹 마른 거다.”

     

    “그러면 나도 나눠줘.”

     

    돌아가서는 기슈타와 육포를 뜯었다.

     

    방향성도 정해졌겠다, 내일은 타냐를 시켜 본대에 다녀오라고 해야겠다.

     

     

     

    ***

     

     

     

    라스 일행이 떠나고, 대기 중인 본대는 며칠째 전전긍긍이었다.

     

    “중대장님, 정말 진입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안에서 사령관 선생님이 어떻게 되셨을지…”

     

    “소대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아티팩트가 알려올 것이다. 비상 연락도 없으니.”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 고문당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으음….”

     

    의견이 분분하던 찰나, 안에서 발소리와 함께 그들이 기다리던 모습이 나타났다.

     

    “중대장님, 진언입니다.”

     

    타냐가 대기 명령을 전하고는 월광궁 의사 부대와 접선했다.

     

    “기밀입니다.”

     

    타냐가 덤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안에 환자가요?”

     

    이야기를 들은 의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희가 뭘 진료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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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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