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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7

       유라크네가 들어가 엘라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나머지 단원들은 마차 앞에 서서 기다렸다.

         

       다들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완연했다.

       철창에 누워 있던 우몬도 일어나 신난 목소리로 떠들어댈 정도였다.

         

       그들이 그렇게 들떠있는 이유는 엘라가 깨어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들이 내게 던지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그들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아는 것까지는 좋았다.

       모든 단원의 호감도가 한꺼번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도 뿌듯했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감사함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경외감, 기대감, 그리고 희망.

         

       에둘러 묻는 그들의 조심스러운 접근에서 나는 그들이 발렌티나로부터 내가 저주 역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입니까?”

       “단장님이…?”

       “저주 역병을……?”

         

       그들의 떨리는 눈빛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무얼 묻고자 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혹시나 우리들의 몸도…….”

       “치료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고유 특성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유전자 레벨에서 데볼루트와 단단히 엮여 있었다.

       바이오맨서의 힘으로도 그들의 몸은 바꿀 수 없었다.

         

       “단장님……?”

         

       부정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간신히 품은 희망을 선뜻 짓밟기 힘들었다.

         

       그 순간, 유라크네가 끼어들어준 게 다행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우선 우리 부단장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하죠.”

         

       그녀가 엘라를 언급하자 그들도 납득하고 물러났다.

         

       “다들 여기 기다리고 있으세요. 제가 먼저 볼게요.”

         

       유라크네의 태도는 묘하게 침착했다.

         

       그녀 역시 저주 역병의 피해자였다.

       그녀도 내가 깨어나자마자 저주 역병을 치료한 일에 대해서 캐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일까?

         

       마차 안에서 엘라와 유라크네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향실’ 기능을 쓰면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 번의 큰 위기를 겪고 나자 데볼루트를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최대한 모아두고 싶었다.

         

       거기다 상태창을 쓰는 일 자체도 썩 달갑지 않았다.

       이번 일을 통해 이것의 부작용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걸터 앉았다.

       옆에 있는 공터에서 랫맨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부단장! 기억을 잃었다! 말린 쥐고기 육포! 2장을 건다!

       -아니다! 멀쩡할 거다! 말린 쥐고기 육포! 3장을 건다!

         

       우습게도 그들은 엘라의 기억이 온전할지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하여간 이 서커스단에서 가장 팔자가 좋은 놈들이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쥐 고기를 먹는 건가?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유라크네가 단원들을 불렀다.

       그녀는 엘라가 혼란을 겪을 수도 있으니 단원들 보고 한 명씩 나서라고 했다.

         

       나도 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맞은편에서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다가왔다.

         

       “단장님.”

         

       마야는 창백한 안색으로 가디건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다친 곳은 내가 전부 치료해주었지만, 그렇다고 싸움에서 얻은 충격과 피로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마야 양, 몸은 괜찮은가요?”

       “네. 단장님 덕분이에요. 단장님은요?”

         

       그녀가 쌀쌀맞은 투로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 너머에 깃든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엘라의 앞으로 한 명 씩 다가가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그들과 얘기를 나눴다.

         

       다행히 그녀의 기억에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을 부려서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었군요.”

         

       만약 그녀가 크게 잘못 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함께해서 행복했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내 목적을 위해 진실을 감춘 채 그녀를 이용해먹었는데…….

       그녀는 순수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다가왔다.

       증오도, 애정도.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속여먹는 악마 단장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단장님 잘못이 아니에요.”

         

       마야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뇨. 제 잘못입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진상을 아는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우리가 길을 떠나기 직전, 발렌티나는 어비스의 통로가 뚫린 원인에 대한 역학 조사를 마쳤다.

       그녀는 마신에 대한 제사가 원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제사.

       나는 예전에 책을 읽었을 때, 지나쳤던 문구를 기억해냈다.

         

       마신에 대한 제사는 마신과 소통하는 모든 방법을 뜻했다.

       마도사는 제사를 통해 마신으로부터 의뢰나 보상을 받는다고 했다.

         

       그 문구를 봤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상태창이랑 비슷하군.’

         

       나는 상태창을 통해 ‘시스템’으로부터 퀘스트를 받고, 상태창을 통해 시스템으로부터 보상을 수령하고, 상태창을 통해 시스템이 제공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시스템이라는 글자를 ‘마신’으로 바꾸면, 상태창은 ‘제사’라는 글자와 동의어가 될 수 있었다.

         

       내게 상태창을 준 존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다.

         

       가장 큰 단서는 예전에 엘라가 호감도 15의 선에서 고뇌했던 일이었다.

       호감도가 15가 되자 키르쿠스가 인스피라를 제공하고, 14가 되자 인스피라를 뺏어갔다.

         

       그때부터 의심했다.

       마신이 내려준다는 축복이 어째서 ‘나에 대한 호감도’ 하나로 왔다 갔다 한단 말인가?

         

       대답은 하나였다.

       내가 시스템이라 부르는 것의 뒤에는 마신 키르쿠스가 있는 것이다.

       상태창은 그가 내게 내려주는 ‘인스피라’라고 할 수 있었다.

         

       곡예사가 보인 재주에 대한 찬사로 내려준다는 축복, 인스피라.

       그것은 다른 마신의 권능과 달리 예상할 수 없는 혼돈이기에 특별하다고 했다.

         

       내가 무슨 곡예를 보여줬을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도 못 가던 나인데.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한 가지 재주가 있었다.

         

       바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TTT는 각별했다.

         

       나는 게임 전문 유튜버였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환호와 갈채를 받은 일을 ‘공연’이라고 친다면, 나는 키르쿠스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인스피라는 각자가 보인 재주에 걸맞은 능력을 내려준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게임에서 나온 상태창을 받는 것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인스피라라 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시스템이건 키르쿠스건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내리는 힘이라는 것은 변함없으니 말이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제사가 가지는 부작용에 대해 고찰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께 데볼루트를 종속시킨다고 상태창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종속으로 얻은 수천 개의 데볼루트를 사용해서 능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상태창이 ‘제사’의 역할을 한다면, 나는 엄청난 규모의 제사를 치러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키르쿠스와 소통하는 그 행동이 어비스와의 통로를 활짝 열어버린 것이다.

         

       상태창을 사용하면, 어비스와의 장벽이 약해진다!

         

       지금까지는 소량의 데볼루트만 사용했기에, 그 장소가 대부분 도시였기에 부작용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드발체프의 주민들은 나를 비난했었다.

       나 때문에 모든 비극이 벌어졌다고.

         

       그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저주 역병도 나와 관련이 있었고, 광신도를 날뛰게 만든 것도 나였고, 어비스와 통로를 열어버린 것도 나였다.

         

       거기다 단원들을 괴물로 태어나게 한 것도 나였고, 모든 걸 다 주무를 수 있으면서 그들의 몸만은 고쳐줄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 사람도 나였다.

         

       지나칠 정도의 악업이다.

       이제 그들과 호감도를 쌓는 행위 자체가 그들에 대한 기만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망할 웃는 남자는 여전히 웃었다.

         

       “단장님,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보였나요?”

         

       나는 마야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그냥 조금 지쳐서 그랬습니다. 지쳐서…….”

         

       나를 바라보는 마야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때, 유라크네가 우리 둘을 불렀다.

         

       “두 사람도 이리 오세요!”

         

       나와 마야는 엘라를 향해 걸어갔다.

       붉은 연미복을 입은 소녀는 왁자지껄한 단원들 틈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정말 나 멀쩡하다니까! 다 기억하고 있다고!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들 행동해?”

         

       평소의 그녀다운 활기찬 목소리였다.

       그녀가 멀쩡한 것을 보니, 나도 울적한 기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단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마차 입구에 걸터 앉아 있던 엘라는 마야를 보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야.”

       “부단장.”

         

       그녀는 마야의 몸을 훑고는 중얼거렸다.

         

       “멀쩡하네.”

         

       그녀의 말에 마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둘이 또 충돌하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엘라 양, 마야 양도 다른 곳에서 싸웠습니다. 그것도 혼자서요.”

         

       나의 말에 엘라는 허리를 뒤로 빼더니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야?”

         

       그녀의 그 한 마디에 좌중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유라크네는 입을 막으며 나와 엘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도 속으로 긴장했다.

         

       이상은 없어 보였는데…….

       설마 불행한 기억을 없애는 식으로 가서 원더스타인에 대한 기억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은……?

         

       “부단장 설마…….”

       “엘라…….”

       “엘라 양……기억이…….”

         

       다들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간신히 몇 마디 내뱉고 서 있는데,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풉.”

         

       엘라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우리의 면면을 둘러보더니 곧 배를 붙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녀는 마차 바닥을 쾅쾅 들기며 데굴데굴 굴렀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서 어쩔 줄 몰라 서 있는데,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눈물을 훔쳤다.

         

       “다, 다들 왜 이리 순진해? 뭐 이런 거에 속고……그래?”

         

       그녀의 입에 떠오른 얄미운 미소를 보고 우리는 그것이 그녀의 장난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야가 옆에서 분한 신음을 삼켰다.

         

       엘라는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내가 저 얼굴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녀는 입을 샐쭉 내밀더니 팔짱을 척 끼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다른 건 잊어도 저 악마를 어떻게 잊겠어? 사람을 그렇게 노예처럼 부려먹는데.”

         

       불만 많은 표정.

       짜증스러운 말투.

         

       평소의 그녀였다.

       단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는 자신의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사신의 낫인지 뭔지도 별거 아닌 거 아냐? 식칼에 찔려도 이것보다 더 다쳤을 거 같은데.”

         

       그녀는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까딱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기억이 무사하다니 다행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모두 검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와 함께한 일은 모두 온전한 듯했다.

         

       “후후, 행운이 따른 덕분이죠.”

         

       그녀는 싱글거리는 내가 아니꼬운지 불만스러운 눈으로 쏘아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걸어왔다.

         

       바로 앞.

       코 닿을 거리까지.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뭘 걱정한 거야? 내가 당신을 기억 못 할 리 없잖아.”

       “그렇겠죠. 제가 얼마나…….”

         

       그때, 그녀가 갑자기 내 가슴에 이마를 쿵 박았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내가 그녀를 밀어내려 할 때쯤 그녀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 첫 번째 관객이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같은 짜증은 없었다.

       대신 따뜻함과 그리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사부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엘라 양?”

         

       나는 갑자기 몰려오는 불안감에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멈칫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그곳에는 반짝이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 허리를 꽉 껴안고 내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나는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내 셔츠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걸.”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단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나도 지을 수만 있다면 저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엘라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를 밀쳤다.

         

       “방금은 좀 낯부끄러운 소리를 했네! 씨, 하여간 나도 참……. 이런 소녀의 순정을 이용해서 마구 부려먹는 악덕 고용주가 뭐가 좋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눈을 마구 비벼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야, 단장.”

         

       우리 모두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_____

       저주 역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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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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