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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8

       *

         

         

         “순서를 정해야 해.”

         

         

         이자벨은 결연한 눈으로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견정한 의지가 빛나는 두 눈이 샛별처럼 푸르게 빛났다. 용사의 핏줄 다운 설득력이었다.

         

         

         “힘으로 정할까요?”

         

         

         하루 하고도 반나절만에 세 개의 요새를 붕괴시켰다는 전설이 있는 위대한 마법사의 딸, 엘피헤라는 두 눈에서 보라색 마력을 타닥타닥 튕기며 일어섰다.

         

         

         “힘! 그럼 팔씨름으로 하는 거 어때?”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바다를 물들였다는 에이나르를, (적어도 무력만큼은) 꼭 닮은 에시디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 끝에 잡혀 있던 쇠막대가 우득, 하고 부서졌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주사위로 하죠. 제가 맨 마지막에 던질게요.”

         

         

         손재주 하나만으로 엘더 뱀파이어를 죽이고 프리첸카야 뒷골목의 왕좌를 차지한 흡혈귀 여군주의 제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동안….

         

         

         “아니, 나 진짜 집에 가고 싶어지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이 상황. 저만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상식적으로 한 사람한테 여러 명이 꽂혔으면 이렇게 앉아서 얘기할 상황이 아니지 않나?”

         

         

         어쩌다보니 용사 파티의 상식을 담당하게 된 오스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여기 어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그냥 이 시간에 기사학부 친구들(대부분 여자다.)이랑 놀러 가거나, 차라리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편이 건설적이겠지 싶던 차였다.

         

         

         “그건 상식적인 상황에서나 그렇지.”

         “비상시엔 비상한 방법이 필요한 법이죠.”

         “삼촌 성격에 지금 우리한테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자벨은 좌중을 훑었다. 짙은 패배감이 용사 파티 위에 암운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이렇게 둘 수는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이 녀석들은 거의 전부 경쟁자다. 어느샌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호시탐탐 이반을 노리는 맹수들이었다.

         

         하지만 경쟁은, 적어도 시작선 앞에 서긴 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일단 적어도 가능성이 있는 수준까진 손을 잡아야 해.”

         

         

         이것이 용사 파티가 공유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설령 축첩을 허용하는 한이 있어도…!’

         ‘적어도 첩이든 처든 일단 결혼식장까지 끌고는 갈 수 있어야 의미가 있어!’

         ‘그래도 본처는 엘프인 게 맞겠지?’

         

         

         전근대 판타지 세상이라 하더라도 축첩이 떳떳한 일은 아니다. 몇몇 대귀족들이나 눈치를 봐가며 슬며시 첩을 하나 더 들이고 본처에게 등짝을 얻어 맞는 식이다.

         

         대귀족 가문의 혼사란 당연히 귀족간의 결합을 의미했다. 이 시대 귀족들의 혼인은 오히려 21세기보다 더 평등한 경우가 잦았다. 첩을 들이는 순간 처가와의 관계가 냉각되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일처가 공공연한 사회상 속에서, 한 남성에게 여러 여자가 동시에 구애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대부분 혀를 차며 지탄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조차도 마왕(예대 입시생) 토벌을 위해서라면 공산 수괴 소련과의 연합 전선에 거리낌이 없었던 바.

         

         때때로 대의와 거시적 전략 목표를 위해서라면 오월동주는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법이다. 키탈저 사냥꾼들도 3대 1 비대칭 전술을 표준 교범으로 채용했을 정도였으니.

         

         란체스터 법칙에 의거하자면 충분한 숫자는 질적 우위를 압도하는 법이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인정할 건 인정하자, 얘들아. 내가 먼저야.”

         “솔직히 우선순위로 따지면 제가 제일 먼저일 거 같은데요. 인간들이 보통 연단위 시간을 헤아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긴 들었지만, 이건 확실히 정하고 가죠.”

         

         

         엘피헤라(12년 전 조우), 에시디스(8년 전 조우)의 치열한 다툼 끝에, 용사(첫 대면 후 6개월차)는 파티의 분란을 외부의 조언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돌겠네….”

         

         

         그렇게 끌려온 작전입안자, 유진은 작게 탄식했다. 세 여신 앞에서 ‘누가 미스 유니버스 그리스일까요?’를 골라야 했던 파리스의 심정이 이랬을까.

         

         적어도 세 여신은 선물을 가져와서 골라달라고 선제시를 했지만, 용사 파티는 운명과 타협 따윈 하지 않는다는 점이 차이라 하겠다.

         

         

         “드로안, 칼리온, 틸레스, 크라실로프 순으로 가죠.”

         “아싸!”

         “예—!!”

         “왜! 기준이 뭐에요!!”

         

         

         유진은 여성진의 머리 위를 살피며 조용히 대답했다.

         

         

         “레벨 역순이요.”

         “아.”

         

         

        *

         

         

         “근데 생각 해보니까, 우리 학교에 드로안 출신 학생이 없지 않나?”

         

         

         각 학생들을 출신 국가로 묶고 차례차례 첩자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는데, 드로안엔 신입생이 없다.

         

         드로안 출신 신입생이라고 해봐야 모르드와 에시디스가 전부였고, 모르드는 허스칼이다. 심지어 드로안 반군한테 빈사 상태가 될 때까지 얻어맞은 경력이 있는 허스칼이었다.

         

         첫 단추부터 난관이었다. 오스왈드가 인상을 찌푸리자, 유진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뭐 언제는 첩자를 잡으려 했답니까? 데이트 코스나 짜주려고 했지. 일단 형님께 에시디스 양 먼저 데리고 나가라 말하면 그만이죠!”

         “하긴, 그렇죠?”

         “그렇죠! 별 걱정을 다 하시네요.”

         

         

        *

         

         

         이반은 다소 당혹스러운 눈으로 에시디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시선을 돌리라는 계획상 따로 불러 나오긴 했는데, 에시디스의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래서 제가 마침? 우연히? 참 놀랍게도! 식당을 예약했는데 실수로! 2인으로 예약했지 뭐에요! 마침 잘 됐죠?!”

         

         

         에시디스는 쫑알거리며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프리첸카야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레스토랑이었다.

         

         파인다이닝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대다. 그러나 경제 인구가 급증하며 부유한 평민층이 생겨나자, 귀족들의 식문화를 판매하는 식당은 그리 드문 개념이 아니다.

         

         

         “….”

         

         

         이반은 별 말없이 차려진 음식들을 차례로 먹었다. 기름지고 달다. 크라실로프식 요리들이 으레 그렇듯, 추운 지방 특유의 고열량 식단이 주를 이루었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들이 모두 낯익었다. 크라실로프의 귀족 음식은 이미 충분히 경험해본 바 있었다. 주로 승전 연회에서, 대귀족들의 기름진 입술 사이에서.

         

         그 시절이 떠오르는 식단이다. 이반은 달그락 거리는 고급 식기를 묵묵히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망했네…!’

         

         

         에시디스는 참람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삼촌이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내비쳤을 때가 식사 시간이었으니, 이 참에 이 도시 최고의 맛집으로 이끌고 가자는 계획이 성대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드로안과 달리 이 나라는 식문화가 대단히 발달한 동네였다. 에시디스는 유학 반년 만에 이 도시의 맛집 리스트를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 중에 고르고 골라 엄선한 식당인데 꽝이라니. 에시디스는 슬픈 표정으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남들도 좋아하리라 믿는 드로안 사람 다운 실패였다.

         

         

        *

         

         

         [인물 : 에시디스 에이날스도티르에 대한 호감도]

         [25(중립적)]

         

         

         “대체 뭘 하면 반나절만에 점수가 떨어져서 오지?”

         “식당을 갔다는데요.”

         “형님이 먹을 걸 좋아했으면 평소에 그딴 걸 먹고 다니지 않았겠죠.”

         

         

         유진은 이마를 감싸쥐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킹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진 맙시다..”

         “에시디스 양은 오케스트라 지휘과 차석이에요.”

         “지휘과가 바이킹보다 못한 건 굳이 언급하지 맙시다.”

         

         

         지휘자란 교향악단 내의 모든 악기에 통달해야 하며, 동시에 모든 파트를 총체적으로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제 막 20살이 된 어린 신입생들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외부에서 보기에 이 나이대 지휘과 학생은 그냥 지휘봉 흔드는 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본디 어느 업계든 한 길을 우직하게 파는 스페셜리스트가 여러 방면에 골고루 능통한 제너럴리스트보다 유리한 법인지라, 신학의 길을 우직하게 파고든 유진에게 지휘과는 드로안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 음대생이 없었으므로 빠르게 다음 논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엘피헤라 양에게 맡겨 봅시다. 호수에 뱃놀이 갔다고 했죠? 우리 어디까지 체크했죠?”

         “칼리온은 방금 끝났고, 틸레스는 이제 막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거 이렇게 진지하게 해야 될 일이에요? 진짜 마족 스파이가 있을 리가 없잖아.”

         “대충 했다가 나중에 형님한테 들키면 관계도가 ‘적대적’ 될 수도 있잖습니까.”

         “오.”

         

         

         3초 안에 죽고 싶지 않았던 유리와 오스왈드는 별말 없이 수긍한 뒤 다음 학생들을 향해 떠났다.

         

         

         “으아악?! 당신들 누구야! 이거 놔!!”

         “쉿, 페트릭 씨. 당신은 이제부터 저 남자와 고향 친구가 됩니다.”

         “쟨 누군데! 이거 놔! 너희 내가 누군지…!”

         “쉿, 조용히. 이 동전에 집중하세요.”

         

         

         납치된 학생은 맑은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저 남자의 이름은요?”

         “내… 친구… 예브게니…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했던…. 동성혼이 합법인… 나라에서 식을….”

         “…왜 그런 설정을 짜는 겁니까, 자꾸?”

         “그게 더 재밌잖아요.”

         

         

         이미 반 이상 엘프가 되어버린 오스왈드는 피식 웃으며 동전 걸린 실을 흔들었다.

         

         

        *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용사 파티가 돌아가며 하루 씩 데이트를 나가고, 그 사이 이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친해지며’.

         

         그렇게 이주가 흘렀을 시점.

         

         용의 선상에 올라온 13번째 학생을 조사하던 유진은 멈칫, 시선을 올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친밀도를 올리자마자 상태창이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퀘스트 등재!]

         [“???급 퀘스트” 틸레스에 드리운 암운.]

         [당신은 틸레스 귀족가 사이에 떠도는 음모를 감지했습니다. 과거, 동부 전선에서부터 이어져온 기나긴 전화의 씨앗이 지금 막 발화하고 있습니다.]

         [목표 : 틸레스 3대 백작가의 내전 저지.]

         [선택 목표 : 질 베르 드 에타크리히의 생존.]

         [선택 목표 : 막시밀리앙 드 이투알레와의 조우.]

         [부가 목표 : 파괴된 영지가 총 15개 이하로 유지될 것.]

         [부가 목표 : 틸레스 왕가의 존속.]

         [보상 : 연합 왕국의 존치 10년 연장.]

         

         

         “와… 씹.”

         

         

         유진은 입술을 잘게 씹으며 침묵에 잠겼다.

         

         마족의 첩자?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뭐, 있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뭐? 연합 왕국의 존치? 질 베르나 막시밀리앙은 그, 용사 파티 양반들 아냐?

         

         ???급 퀘스트? 이거 형님 죽이라는 퀘스트랑 같은 난이도 표기인데…?

         

         

         “이거 아무래도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닌 거 같네.”

         “많이 심각해요?”

         “생각보다 더요. 형님 불러와요. 지금 데이트고 뭐고 놀고 있을 때가 아냐.”

         

         

         유진은 탄식하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진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왜 일이 또 이렇게 꼬이는 건데. 하면서.

         

         

       

       

       

       

        Ep 18. 아카데미물의 데이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휴, 대학 생활이란 아카데미물의 세금과 같은 것.
    세금 납부가 끝났으면 이제 국세청은 다음달까지 볼 일 없는 거잖아요?
    마참내 이제 이반 시점으로 돌아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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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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