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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8

     

    고트베르크 제약공장.

     

    몇 개의 동과 창고, 기숙사까지 지어지는 거대한 부지의 그 공장은 건축 마무리 단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본동은 마감만을 남겨놓고 있어, 내부는 당장에라도 가동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연고를 대량으로 발주하셨어요. 시험 가동해볼 좋은 기회에요.”

     

    네리아가 조막만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월광궁의 파견 의사가 육성해오던 제약사들이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됐다.

     

    우선 재료 발주부터.

    아직 상단과 정식 계약이 체결된 건 아니기에 단가는 아주 저렴하진 않았지만 네리아는 짧은 시간 안에 협상을 해냈다.

     

     

    제약사들이 며칠에 걸쳐 만든 약제를 포장하면 짐꾼들이 마차를 끌고 가문의 기사들이 호위한다.

     

    “도련님의 물건입죠? 맡겨주십쇼, 목숨보다 소중히 옮기죠. 진짜 목숨만큼은 아니고요.”

     

    보리스가 책임지고 마물의 숲을 돌파해 짐을 본대까지 옮긴다.

     

    모험가들이 인계받아 봉우리의 틈새를 가로질러 얼음 평야 입구까지 가져간다.

     

    “물건이다, 의사 선생에게 전달해. 알아듣지? 전. 달.”

     

    모험가 대장이 천둥족 부족민에게 강조하니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너희보다, 똑똑하다.”

     

    “뭐?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나는 A급 모험가야. 무려 마검사라고. 마법 알아 마법? 마력도 마력이고 지능이 높아야만 쓸 수 있는 인류의 신비… 어거걱!”

     

    부족민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대장의 다리를 무너트리자 그가 눈밭에 고꾸라졌다.

     

    “순간이동! 마법!”

    “근육이 곧 지능이다!”

    “이놈 봐라! 얼이 빠졌군! 하하하하!”

     

    껄껄대는 부족민을 보고 대장이 머리의 눈을 털어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호기롭게 마물 곰에 탑승해 짐을 썰매에 끌고 출발한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다.

    목표는 평야 중앙의 돌무덤이다.

     

    안전을 위해 함정은 해제해 두었다. 해제할 수 없는 함정이 있는 곳은 출입할 수 없도록 철책을 설치했다.

     

    그만큼 많은 천둥족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두텁게 했다.

     

     

    지하, 천룡의 침소에서는 월광궁의 의사 부대가 진료를 보고 있었다.

     

    장비는 모두 들어왔다. 환자의 크기도 크기다 보니 천룡의 위로 사다리와 발판도 설치됐다.

     

    마치 어선을 건조하는 듯한 모습이다.

     

    “8번 구역 교대 부탁합니다!”

    “펠릭스, 신성력 회복됐으면 치유주문 이어서 부탁해.”

     

    의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구역별로 나눈 천룡의 피부 상처를 치료하고 경과를 기록한다.

     

    “4번 구역 해주 완료됐습니다.”

     

    휴고가 아뮬렛의 가동을 멈추며 땀을 닦았다. 천룡의 옆구리에서 검은 산성이 바스라지며 사라지고 붉은 피부가 드러났다.

     

    “수고했어. 5번 구역 해주는 내가 맡을 테니 쉬고 있어. 여기 세척!”

     

    라스가 휴고에게서 아뮬렛을 옮겨 받아 목에 걸었다.

     

    “인간, 물건이다!”

     

    쿵, 부족민들이 짐차에서 꺼내온 박스를 차례차례 쌓았다.

     

    그것을 목격한 라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도착했군요.”

     

    “좋아, 어디.”

     

    라스가 박스를 열어 커다란 통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손 가득히 푹 펐다.

     

    손등에 발라 성질을 분석하고는 만족했다.

     

    “강화만 걸면 바로 쓸 수 있겠어. 전원 주목! 손 남는 의사는 세척 끝난 구역에 연고 접착 시작한다!”

     

    의사들이 새하얀 가운을 흩날리며 일제히 움직였다.

     

    천룡의 망가진 피부에 소독이 들어간 후 연고가 발리고 리넨 천으로 덮인다.

     

    이어지는 치유주문.

     

    회복과 부상의 제자리걸음을 반복하여 영영 돌아올 일 없었던 천룡의 체력이, 지금 이 순간 회복되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어. 경과 관찰하면서 부작용 보이면 바로 보고해.”

     

    의사들이 라스에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

     

     

     

    천룡의 치료엔 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대륙을 창조했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고대의 존재다.

     

    면적도 면적이고 약제나 주문을 얼마나 빨아먹는지, 체력통이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외형만 보면 많이 나았어. 진단.”

     

     

    ―――――――――――

    부상 : 화학성 경증 화상

    부상 : 접촉성 피부염

    ―――――――――――

     

     

    화상 때문에 낫지 못하던 옆구리의 열상은 해주 후 꿰매 치유를 유도했다.

     

    피부염도 육안으로 보기엔 많이 좋아졌다. 병원체가 확실히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상태창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 위대한 존재를 수차례 진단하였습니다.

    · 진귀한 경험으로 인해 [진단B]가 [진단A]로 랭크업 했습니다.

    · [진단]의 모든 능력이 개방되었습니다.

    ―――――――――――

     

     

    “오.”

     

    진단은 처음으로 A랭크에 도달한 스킬이다.

     

    본래 스킬은 랭크가 오를 때마다 성능이 좋아지거나 천장이 높아진다는 느낌이었다.

     

    진단은 처음에는 부상과 위치가 개략적으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증상과 부상이 구분됐고, 위치도 점차 상세해졌다.

     

    그래도 기본 스킬이기에 극적인 변화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숨겨진 능력이라도 있었나.”

     

    일단 환자를 만나면 진단부터 사용해야 하니 가장 많이 쓴 스킬이지. 경험치가 쌓일 만도 했다.

     

    다시 천룡에게 실험해볼까 하는데 기슈타가 나를 찾아왔다.

     

    “라스, 오늘도 바빠 보이는군!”

     

    “그렇지 뭐. 그래도 순조로워. 이 페이스면 얼마 안 가 완치되겠어.”

     

    “그런가, 어머니가 눈을 뜨시는가. 기대되는군!”

     

    나는 기슈타를 슬쩍 돌아보았다.

     

    ‘얘한테 진단을 써본 적은 없었네.’

     

    워낙 튼튼해서 여태 상처 하나 안 났으니.

     

    ‘진단.’

     

     

    ―――――――――――

    · 이름 : 기슈타 칼라무리베

    · 체력 : 87 / 95

    · 상태 : 건강하나 약간의 스트레스와 긴장

    · 부상 : 약한 자상 >>이력을 펼칩니다.

    · 위치 : 등 (좌측 승모근)

    · 기분 : 기대감

    ―――――――――――

     

     

    ‘엄청 상세하게 나오네.’

     

    체력이 수치로 직접 보이는 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위독한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으니.

     

    이력도 정리되니 훨씬 편리해졌고.

     

    ‘환자의 기분이 나오네.’

     

    희한한 기능이었다. 뭐, 환자를 이해하기 편해진 것은 틀림없다.

     

    ‘부상이 있었어.’

     

    티가 안 나는 등이고 기슈타가 티를 안 내서 미처 몰랐었다.

     

    “기슈타, 등 다쳤어?”

     

    “음? 잘 모르겠다. 낮에 빙하족과 전투가 있긴 했었다.”

     

    “보여봐.”

     

    “으음…”

     

    기슈타가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움츠리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마음대로 해라.”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에 힘을 꽉 주고 모피를 훌렁 벗어던지는 기슈타.

     

    옷을 살짝만 내리면 됐는데.

     

    기슈타가 풍성한 머리칼을 틀어 앞으로 돌려 넘겼다.

     

    드러난 그녀의 등을 살폈다. 추운 지방에 살아서 그런지 얼음 평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새하얗고 매끄러운 등이었다.

     

    쇄골과 어깨뼈가 들썩이며 탄탄한 삼각근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렇다고 외형상 일반 제국민에 비해 부피가 아주 크진 않았다.

     

    섬유 구조가 다른가 보네. 흥미가 간다.

     

    상처는 뒷목 아래에 조그맣게 나 있었다.

     

    “살짝 긁힌 정도네. 설인의 손톱이 방어구를 뚫은 모양이야.”

     

    “아아, 큰놈이 있었다. 그놈이 대장 같다. 또 보이면 머리통을 뽑아줄… 우힛.”

     

    소독해서 연고를 바르니 기슈타가 기묘한 소리를 냈다.

     

    밴드를 붙여 마무리했다.

     

    “됐어.”

     

    “…손가락이 길군, 라스.”

     

    “이래저래 유리하지.”

     

    수술할 때도 좋고.

     

     

    [녹아■■, ■■고, 이어지다 36% → 52%]

     

     

    이건 왜 갑자기 이렇게 올라?

     

    묘하다고 생각하며 상태창을 치우니 기슈타가 호다닥 모피를 입었다.

     

    “으음… 혹시 다른 여자도 평소에 그렇게 만지냐?”

     

    “다른 여자?”

     

    뭐, 아셀라야 매일 만지긴 했지.

     

    ‘아셀라의 한계까지 대략 한 달 반 남았나.’

     

    슬슬 서둘러야 할 시기이긴 했다.

     

    지금이라면 당장이라도 폭풍석을 훔쳐서 황실로 복귀할 수는 있겠지. 낮에 치료 작업을 할 땐 문을 열기 위해 꽂혀있다.

     

    하지만 그랬다간 기슈타와 관계가 파탄난다. 대악마는 역사대로 현계해 나중에 맞붙어야 할 거고, 기슈타와 협상도 불가능해져 천둥족과도 전쟁이 일어난다.

     

    예정대로 천룡의 치료가 끝나면 아셀라에게 늦지는 않는다. 여기서 발생하는 열세 개의 배드엔딩도 삭제할 수 있으니 이쪽이 상책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기슈타가 나를 보고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하하! 친구에게는 숨길 것 없다. 연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의 표정 아니냐, 라스. 늘 이야기하던 황금의 소녀를 떠올리고 있었나.”

     

    “황녀님 말이지, 어떻게 알았어.”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한 달이나 됐으니 보고 싶을 만하겠지.”

     

    내가 아셀라를 생각할 때마다 표정이 바뀌나, 그건 몰랐네.

     

     

    그간 기슈타가 궁금해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제국의 이야기를 조금씩 해주었다.

     

    내가 내의원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히 아셀라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기슈타도 나와 아셀라의 관계를 안다.

     

    “라스, 황금의 소녀를 두고 그렇게 함부로 다른 여자의 몸을 만지는 건 안 좋다. 오해를 사지 않겠나.”

     

    “진료였잖아. 일이라고. 그리고 나랑 아셀라는 얘기했지만 조금 복잡해서.”

     

    기슈타에게 대충 얘기하긴 했었다.

     

    제국에는 정치적으로 혼약하는 일이 많다는 것, 연애 혼약으로 발표하긴 했어도 여전히 아셀라의 승계권을 위한 전략이라는 이야기 등등.

     

    야생에서 살아온 기슈타가 내 이야기를 전부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할 것 있겠냐. 그녀가 라스 너를 열렬히 애정하는 건 확실하지!”

     

    “뭐, 유능한 신하라서 아껴주긴 해.”

     

    “남자로서 말이다!”

     

    기슈타가 힘을 주어 강조했다.

     

    “남들에게 애정하는 혼약자라 자랑한다. 밤에는 동침하며 숨기지 않는다.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영역표시가 아니냐!”

     

    기슈타가 껄껄댔다.

     

    그야 미래의 일까지는 이야기할 수 없었으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황제 아셀라는 누구보다도 치유사 라스를 혐오하며 괴롭히던 인간이었다.

     

    ‘이번 회귀는 10년 전이라서 조금 다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아셀라는 내가 알던 황제만큼 악인이 아닐 것이다.

     

    추측보다는 희망에 가깝긴 하다.

     

    그래도 순수악이냐 중도악이냐의 차이 정도고, 아셀라가 가진 재능이나 남들 위에 서는 기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다.

     

    “제국민들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머리만 쓰다가 세월이 다 가겠어.”

     

    기슈타가 갑갑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 대용으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때가 지나 후회해도 늦는다. 너는 황금의 생각이 궁금하지도 않나?”

     

    아셀라의 생각이라.

     

    …궁금하긴 하다.

     

    미래에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아 더더욱.

     

    그녀와 많은 악연을 가지고 있어 수도 없이 전제를 가져야 하는 나보다,

     

    들은 이야기만으로 단순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슈타가 오히려 정말로 옳다면.

     

    ‘혼은 많이 나겠지만.’

     

    조금, 월광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얼마 안 있어 희소식이 들려왔다.

     

    “선생님.”

     

    아침, 휴고가 내게 보고했다.

     

    “천룡이 눈을 떴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두두다다님 100코인 후원 감사해요오! 명절 연휴네요. 독자님들도 푹 쉬시면서 재밌는 글 많이 읽으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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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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