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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 진행도]

       

       [화계마도 : 1049/1049]

       [수계마도 : 440/992]

       [지계마도 : 591/1007]

       [공계마도 : 174/824]

       [미분류 : 23/149]

       

        [와, 그래도 어떻게든 원소마도 하나를 끝까지 익히셨네요. 이건 존경스러울 만해요.]

       

        도서관에서 마지막 화계마도를 익힌 나는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기뻐하기는 이르다. 집에 돌아가려면 아직 세 분야의 원소마도와 미분류마도가 남아있다. 얘네들까지 마무리 지으려면 못해도 2~3년이 더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까지 나온 화계마도를 다 이해하긴 했는데, 만약 다른 걸 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새 화계마도를 개발한다면 그것도 익혀야 할까?

       

        [앞으로 새로운 화계마도가 나오더라도 익히실 필욘 없어요. 그야 여기까지 해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점에 올랐다는 증거잖아요?]

       

        다행스럽게도 이 점은 여신이 참작해주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양장본은 리스트에서 화계마도 목록을 전부 빼 버렸다. 

       

       즉, 다시 말해서….

       

        [◆ 진행도]

       

        [수계마도 : 440/992]

       [지계마도 : 591/1007]

       [공계마도 : 174/824]

       [미분류 : 23/149]

       

       이렇게만 보인다는 뜻이다.

       

        이제 틸레트에서 공부할 건 수계마도와 지계마도 뿐이다. 공계마도와 미분류 마도는 일리야드 아카데미로 도처를 옮긴 뒤 마무리를 지을 계획이다. 그때까지 수소폭탄 개발도 마치고, 마왕을 잡은 뒤 적당히 이곳에서 퇴장해 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겠지.

       

        [굉장히 신나 보이시네요.]

       

        당연하다. 오랜만에 본 목표가 진척되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조금만 더 버티면 치맥을 뜯을 수 있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디 보자, 오늘 남은 일정이…….

       

        “로테, 슬슬 가자.”

        “으응….”

       

        책상에 엎드려서 쪽잠을 자고 있던 로테를 일으켜 세웠다. 오후 일정은 다름 아닌 플레어 소형화 실험이다.

       

        얼마 전 카이뤼삭 교수에게 AFM 비슷한 장비를 소개받고 돌파구를 떠올렸다. 오늘은 그것을 검증하는 날이다. 

       

        “그런데 소형화는 왜 하려는 거야?” 

        “가능한 한 작게 만들면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술식을 짜낼 수 있을 테니까.”

        “그게 피치블렌드를 사용하는 마법과 관련이 있어?”

       “있고말고.”

       

        제국에 뿌리 뻗은 마수를 척살한다는 목표 말고도 플레어를 소형화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플레어를 소형화하고 나면 그것보다 더 복잡한 마법도 정교하게 스크롤로 찍어낼 수 있어. 피치블렌드 마석을 활용할 폭발형 마법도 그중 하나겠지.”

       

        핵무기는 자고로 경량화가 중요하다. 같은 위력이라면 가볍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제작한 폭탄을 어떤 방식으로 투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훗날이다. 지금은 하고 있는 연구에나 집중하도록 하자.

       

        나와 로테는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히 요기한 뒤 화계마도 연구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오랜만에 와보는 곳이다. 하스펠트 교수 밑에 있었을 시절에는 여기가 주된 일터였는데.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는 거의 와 본 적이 없다. 덕분에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감각이 들었다.

       

        화계마도 연구소라고는 하나 하스펠트의 연구실만 있는 건 아니다. 이 건물은 독립된 단과대학처럼 여러 연구실이 각방을 쓰고 있는 구조였다. 따라서 대형 규모의 실험실만 해도 80개가 넘어간다. 과연 틸레트,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아카데미다.

       

        -똑똑

       

        우리는 먼저 물품을 총괄하는 관리소 문을 두들겼다. 이곳에서 카이뤼삭 교수가 말한 유사 AFM이 있나 없나를 물어보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연식이 꽤 된 녀석이었다.

       

        “신품이 들어온 이후로는 안 쓴 지 10년이 넘었을 거예요.”

        “제 기능을 못 하나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한번 보실래요?”

       

        관리자의 인도를 받아 비품실에서 현미경을 꺼내왔다. 그리고 이쯤에서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째 생김새가 AFM보다는 STM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전자 대신 마소를 터널링해서 물질 구조를 관찰하는 장치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관리자는 무언가를 툭 꺼내 던져주었다.

       

        “매뉴얼이에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니 이걸 참고하면서 사용하시면 돼요.”

       

        솜사탕처럼 뽀얀 먼지를 털어내고 티슈로 닦아내니 제법 깔끔해진 현미경. 렌즈나 조리개도 방치되어있던 기간에 비하면 보존 상태가 나쁘지 않다. 분해능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계산한 결과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와 로테는 곧바로 매뉴얼에 따라 장비를 세팅했다. 그러던 중 로테가 한 가지를 물었다.

       

        “나노미터 단위의 조작은 정령의 도움 없이는 못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미심쩍어. 마이크로미터도 가능한데 왜 나노미터는 안 되는 걸까, 하고 말이야.”

        “음…. 너무 세밀한 조작이라서?”

       

        지구에서는 정령 없이도 하는데 뭐…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로테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라고 생각해. 다른 방법을 동원하면 정령의 도움 없이도 나노공정을 할 수 있겠지.”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테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현미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약간의 조정 끝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창이 띄워진다.

       

        슬슬 실험을 시작할 때였다.

       

       

        **

       

       

        실험에서 알고자 하는 건 딱 한 가지.

       

        -정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노미터 단위의 스크롤을 만들 수 있는가?

       

        나노미터 단위의 스크롤을 만들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카이뤼삭 교수가 이미 이 분야의 권위자다.

       

        다만 그걸로 ‘플레어’를 소형화하는 건 다른 문제다. 플레어는 굉장히 복잡한 스크롤이고, 정령의 도움을 받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한 걸음 만에 성공이다 실패다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애당초 이번 실험의 목표는 플레어를 만드는 게 아니다. 현미경으로 마전지 표면을 관찰하면서 원하는 마소를 탐침으로 자유자재 옮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예정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현미경에는 시료 표면을 긁어주는 탐침이 존재한다. 탐침에는 얇고 기다란 외팔보가 달려있는데, 흔히 캔틸레버라고 불리는 것이다. 탐침의 기능 자체는 STM과 흡사하고, 정보를 읽어 들이는 방식은 AFM과 닮았다.

       

        이 캔틸레버에 플레어를 조사하여 마소 감지기에 투영하자 마전지의 표면이 스캔되었다.

       

        “와, 플레어를 이렇게 사용할 수도 있구나.”

       

        플레어 스크롤에서 공격력을 담당하는 부분을 제거하면 평범한 빛줄기가 된다. 이건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건 뭐, 그냥 레이저네.”

        “레이저?”

        “아기 플레어를 그렇게 부르려고.”

        “아기 플레어라니….”

       

        로테가 쿡쿡 웃었다.

       

        “에테르는 가끔 별난 말을 한단 말이야.”

        “내가 별나?”

        “응. 천재는 다 그런 걸까?”

        “천재라니…. 난 천재가 아니야.”

       

       그런 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에게나 붙는 수식어다.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데.

       

        “아냐, 너 천재 맞아. 아니라고 하면 기만인 거 알지?”

        “허어.”

        “너 같은 친구랑 이런 거 같이 할 때마다 난 네가 부러워. 뭘 하는데 막힘이 없잖아. 솔직히 질투가 안 나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

        “…너와 같이 이러고 있으면 나까지 고양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뭔가 새로운 거에 눈이 뜨였다고 해야 하나?”

       

        그러더니 로테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스크롤을 한 장 꺼냈다.

       

        “이건 광선 끝을 뾰족하게 식각할 수 있도록 고안해 낸 마법이야. 네가 만들었던 스크롤을 응용해서 한번 만들어 봤어.”

        “이런 걸 언제…?”

        “나도 너에게만 묻어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실제로 마력을 흘려보니 첨단이 아주 날카로운 빛이 새어 나왔다. 플레어는 아니지만, 플레어를 닮았다. 이걸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로테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사근사근한 미소를 보내는 로테.

       

        “대가는 일한 만큼 받아야지. 자, 실험에 써줘. 분명 필요한 곳이 있을 거야.”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였다.

       

        로테는 이번 연구에서 자신의 기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플레어를 만들 때 내가 대부분을 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러면 원래 목표에 더욱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세팅을 바꾸고 로테가 준 스크롤을 부착했다.

       

        조각칼로 석상을 다듬는 것처럼 현미경에 달린 미세한 탐침으로 마전지에 하나씩 길을 새긴다.

       

       식각하는 과정에서 로테의 스크롤이 많은 기여를 했다. 끝이 예리하게 연마된 광선 무리가 마전지의 표면을 사각사각 긁는다.

       

       작업은 세 시간에 걸쳐 진행했다. 도선에 마석 두 개가 직렬로 연결된 간단한 회로를 새겼다. 반도체 공정에서 금속 배선을 까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됐다.”

        “됐어!”

       

        장비를 끄고 장갑을 벗었다. 만든 마전지는 마감 처리를 한 뒤 미리 가져온 상자에 고이 모셔놓았다.

       

        “이걸 교수님들께 보여주면 좋아하실 거야.” 

        “정령마도 없이도 이런 걸 만들었다고 말이야?”

        “응. 못 믿으시면 다시 하면 되는 거잖아.”

       

        실험실을 나오면서도 로테의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게 됐으니 우라나이트로 마수를 일섬할 수 있는 폭탄도 가볍게 만들 수 있어. 절멸급을 모두 쓰러뜨리고 마왕까지 잡아낸 다음에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겠지?”

        “…그러겠지.”

        “있잖아, 구천지대계를 모두 토벌하고 나면 우리 한 영지에서 같이 지내는 거 어때?”

       

        갑자기 의중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예상치 못한 로테의 발언에 나는 떫은 웃음을 지었다.

       

        “으, 응…?”

        “어차피 우리 둘 다 졸업하면 전쟁터로 갈 거 아냐. 그때까지 우라늄 폭탄을 먼저 만들어놓고, 실전에 투입되면 이 기나긴 전쟁을 우리 손으로 확 끝내버리는 거야. 그러면 우리 둘 다 큰일 날 이유도 없겠지?”

        “그, 그렇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지금처럼 일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쇼트 케이크랑 홍차를 하나씩 가져다 놓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마법 연구를 하는 거야. 정말 기대된다.”

       

       뭔가 김칫국을 마시는 것 같은데, 썩 나쁜 노후생활은 아니다. 

       

       “그래서 대답은?”

       

        로테는 아기 송아지처럼 눈망울을 반짝거렸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나로선 부정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 나는 아무리 늦어도 수 년 이내에 이 세계를 떠날 예정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꺼내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괜히 고개를 저었다가 로테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긴 싫다. 내가 괴물이라는 걸 알려서 돈독했던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두렵다. 

       

       어쩌면 로테를 일리야드에 교환학생으로 보내는 이유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다. 로즈마리의 눈총을 사는 것을 떠나서, 훗날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으니까.

       

        나는 몇 초를 고민하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로테의 시선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곱씹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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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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