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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아.”

     

    아셀라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책을 넘기다가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였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미세한 상처였지만 곧 틈이 벌어지고 얇은 선혈이 새어나왔다.

     

    “화, 화, 황녀님. 응급처치를.”

     

    대기하던 클로에가 당황하며 왕진가방을 꺼내들었다. 아셀라가 손을 내미니 클로에의 움직임이 굳었다.

     

    벌써 한 달 넘게 잠을 설쳐 눈 아래 깊게 피로가 가라앉은 그녀였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종이 위의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 지 오래였다. 그녀는 핏방울을 책 위에 비벼 닦아버리고는 휴짓조각처럼 꾸깃, 페이지를 구겼다.

     

    “…하.”

     

    상처가 났는데도 연고도 밴드도 처방되지 않았다.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아셀라는 고개를 숙여 눈두덩이를 손바닥에 파묻고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연락은?”

     

    “…아직.”

     

    시녀장의 짧은 대답에 아셀라가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라스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어떤 외지에 있길래 편지 한 통 못 보내는 걸까.

     

    아니면 글자로도 얘기하기 싫을 정도로 자신이 싫은 걸까.

     

    …여태 그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했을까.

     

    그래서 더는 못 참고 화가 났을까.

     

    돌아온다면 앞으로는… 조금은 잘해줄까.

     

    칭찬도 해 주고, 상도 내리고.

     

     

    하지만 방법을 모르는데.

     

    자신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방법 따위는 모른다.

     

    제국의 황녀로서 알 필요도 없었다.

     

    평생 봐온 것이라곤 이미 머리가 차 서로 무너뜨리려 안달이 난 형제들.

     

    그리고 그 카밀라.

     

    여태 황궁의 성벽 안이 아셀라의 세상의 전부였기에.

     

     

    그만큼 라스가 얼마나 자신에게 커다란 존재였는지, 점점 더 깨달아간다.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갈망도 함께 목을 죄어온다.

     

    ‘라스는 나를 고치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다고 했어.’

     

    그 말에 거짓은 없을 터.

     

    이대로는 라스가 돌아오더라도 또 반복되어 버린다.

     

    라스는 자신을 고치고 공을 쌓으리라.

     

    한참이나 뱃속을 괴롭히던 병마가 사라지는 건 그녀로서도 더없이 기대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에게 또 빚을 지게 된다.

     

    아셀라는 인정했다. 지금 월광궁과 아셀라의 위상이 이만큼이나 세워질 때까지 라스에게 빚진 게 많다고.

     

    아셀라의 능력만으로 이룬 게 아니다. 라스와 함께 만들었다.

     

    라스도 말은 안 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자신보다 헤이케를 높게 평가했을 것이라고 아셀라는 추측했다.

     

    헤이케는 자신과 달리 혼자서 목휘궁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으니까.

     

    ‘라스가 나를 고치기 전에.’

     

    자신이 헤이케보다 가치 있는 인물이라고.

     

    주치의로서 섬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황제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다른 이는 필요 없다.

    라스의 인정이 필요했다.

     

    인정받은 만큼 사랑받을 건 당연하니까.

     

    그의 진심만으로 사랑받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자신이 아니라 헤이케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렇게나 화가 났었다.

     

    마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라스와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의무뿐인 관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새 약혼식도 왜 그렇게 충동적으로 진행했는지 안다.

     

    그도 자신처럼 의무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주길 바랐다.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인간이 아니야.’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스가 돌아올 때까지 능력을 증명해 놓겠다.

     

    드르륵, 아셀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목휘궁으로 향한 아셀라는 헤이케를 찾았다.

     

    “드문 일이군. 네가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업무 중이던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적의 앞이다. 아셀라는 한층 당당한 태도와 위압 넘치는 눈빛을 고수했다.

     

    “헤이케, 1연대의 4중대가 한 달 반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던데, 외부에서 장기 임무라도 수행하고 있니?”

     

    “기밀이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그녀가 라스의 행동에 도움을 줬다고는 추측하고 있었다.

     

    지금의 반응으로 확신했다.

     

    또각, 아셀라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헤이케를 내려다보았다.

     

    “내 허가도 없이 월광궁의 신하를 차출해 공동임무를 진행했다면.”

     

    아셀라가 콕 집어 본론을 말했다.

    헤이케는 그녀의 용건이 라스라고 짐작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나에 대한 도발로 봐도 되겠니?”

     

    헤이케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디까지나 추측 아닌가. 중상모략이 될 일방적인 해석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나는 무르지 않다, 아셀라.”

     

    도발은 도발로 받아치겠다.

    분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대답이었다.

     

    덧붙여, 아셀라가 원하는 라스의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미도 포함됐다.

     

    승계권자끼리 서로 원하는 건 실력으로 빼앗는다. 당연한 상식이었다.

     

    “여태 고귀한 척은 다 하더니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암표범이.”

     

    “하나 충고하마, 아셀라. 발톱을 항상 드러내고 다니면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실로 유효한 충고였다.

     

    실제 다른 승계권자와 크게 충돌했던 아셀라에 비해, 헤이케는 게오르크와 소규모로 몇 번 싸웠을 뿐이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의 자멸과 공멸을 노린다. 모두 승계전에서 전략적으로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강자는 발톱을 숨길 필요가 없어. 달려드는 먹이를 모두 찢어발기면 그만이거든.”

     

    아셀라가 황금빛 눈동자로 헤이케를 뚫어버릴 듯 쏘아보았다.

     

    “월광궁과 목휘궁의 승부야. 패배자는 승계권을 잃는다.”

     

    “받아주마.”

     

    가볍게 식사 약속이라도 잡듯, 덤덤하게 서로의 모든 걸 건 승부가 성립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셀라가 강하게 요구했다.

     

    “내 혼약자와 한 번이라도 더 말을 섞었다간 네 목을 따 버리겠어.”

     

     

     

    ***

     

     

     

    나는 천룡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걸음을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싱글벙글하며 아침도 안 먹었건만.

     

    “저건 뭐야.”

     

    그다지 달갑지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후, 후, 후, 후!

     

    우리의 위치는 고기 마을. 천룡의 침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가깝다 해도 곰을 타고 30분은 달려야 하는 거리다. 분지 평원 지형이기에 시야 안에 들어오기는 한다.

     

    그 분지의 반대편, 동쪽에서 새하얀 것들이 우르르 내려오며 평원을 물들이고 있었다. 꼭 빙산이 무너져 흘러내리는 것 같다.

     

    “망원경.”

     

    “여기 있습니다.”

     

    눈사태가 아니라 전부 설인이었다. 털은 하얗고 몸은 새까만.

     

    “와, 저게 뭐냐.”

     

    “천룡이 눈을 뜬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보시면 침소의 마나 회오리도 강해졌습니다.”

     

    휴고의 말대로 평원 중앙에서 솟아오른 회오리는 구름을 뚫을 정도의 높이까지 쏘아지고 있었다.

     

    “바로 가야겠어. 쟤들도 속도가 빨라서 아슬아슬하겠는데.”

     

    “전쟁이다!!”

     

    등 뒤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 깜짝 놀랐다. 기슈타였다.

     

    “너희들 전원 무기를 들어라! 탈것 마을에게 전부 꺼내오라고 해!”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에 부족민이 바쁘게 움직인다. 마물곰과 매머드가 고삐를 차며 포효했다.

     

    “긴 하루가 되겠군요.”

     

    싸울 준비를 마친 타냐가 검을 허리춤에 차며 곰에 올랐다.

     

    “어떻게 할지요, 선생님.”

     

    “나는 천룡에게 향하겠어. 그때까지 호위를 부탁해. 이후에는 기슈타와 함께 침소를 방어해. 설인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있으면 토벌하고.”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휴고에게 물었다.

     

    “그쪽 상황은 어떻대?”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현장 근무 중이던 돌프가 발견했습니다만, 화가 나서 침소에 들어오려는 인간을 전부 거부하며 위협한다고 하더군요.”

     

    “잠들 땐 혼자였는데 일어났더니 몸에 링거 꽂혀있고 의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당황할 만하지. 일단 가보자고.”

     

    쿵, 쿵. 매머드의 발소리와 함께 기슈타가 나타나 내게 말했다.

     

    “라스, 나는 빙하족을 쓰러트려야 한다! 이번엔 적의 숫자가 많아. 전장에는 나오지 마라!”

     

    “확인했어. 대신 원군 좀 불러도 돼?”

     

    “원군? 몇 명이나 되냐?”

     

    “제국 최고의 기사로 이백.”

     

    이백이라는 숫자에 기슈타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얼마든지 데려와라!”

     

    “소대장.”

     

    “예!”

     

    소대장이 목에 걸고 있던 아티팩트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신호가 발신된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타냐의 뒤에 올라탔다.

     

    “싸우러 가자!!”

     

    기슈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부족민 전원이 높게 솟아오른 마나 회오리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달리기를 약 30분.

     

    “아― 라라라라라!!”

     

    선봉에 선 기슈타가 호기롭게 도끼를 빙빙 돌리며 가속했다.

     

    매머드가 전속력을 내며 브레이크도 잡지 않는 것이 대놓고 전력을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많군요.”

     

    타냐가 덤덤하게 감상을 냈다. 벌써 마나 회오리에 거의 근접한 설인 무리는 과장 조금 보태면 설탕과자에 몰려든 개미떼와 비슷했다.

     

    “목표에 다 와 간다. 단장, 조금만 속도를 올려!”

     

    “이미 최대입니다. 부족하군요.”

     

    그녀의 말대로 설인들이 우리보다 조금 더 빠르다.

     

    침소를 방비하는 부족민들이 있긴 하지만 저만한 숫자여서야 오래 버티진 못한다.

     

    “조련사! 준비는 됐냐!”

     

    “됐다, 족장님!”

     

    기슈타가 탈것 담당의 대답을 듣고는 고둥을 꺼내 숨을 불어넣었다.

     

    ―뿌우우우!

     

    잠시 후에 지면이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만한 숫자가 뛰어서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땅 밑이다. 지진이었다.

     

    얼마 안 있어 콰아아앙!!

     

    돌진해오던 설인 대군의 바닥 한복판이 갈라지며 안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다.

     

    깨끗한 해수가 흩뿌려지며 무지개를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저거 수염고래야?”

     

    “물고기 잡을 때 편하다!”

     

    길이가 50미터는 되는데. 절대 어획용은 아니다.

     

    하늘로 날아오른 고래가 착지하며 지면의 얼음을 깨부수고는 다시 잠수한다. 설인 대군이 셀 수도 없이 갈려 들어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하하하! 건강해 보이는군!”

     

    기슈타가 넉살 좋게 그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한 차례 적의 진군 페이스를 늦췄지만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뭔가 하는군요.”

     

    설인들이 자기들끼리 손을 잡아 포진을 이루더니, 캐터필터처럼 한 명씩 침소를 향해 던져대기 시작했다.

     

    투석기도 아니고 슝슝 설인이 날아온다.

     

    방어진은 별안간 머리 위에서 떨어진 설인을 상대하게 됐다.

     

    “머리를 쓰긴 쓰네. 골치 아픈데.”

     

    “이쪽도 날아온다!”

     

    부족민의 외침.

     

    별안간 쿠웅! 우리 진로에도 설인이 떨어지고 달리던 곰 몇 마리가 걸려 넘어졌다.

     

    “그놈이야!”

     

    기슈타가 긴박하게 외쳤다.

    조금 다른 착지 소리가 있었다.

     

    다른 설인보다 훨씬 거대하고 털까지 시꺼먼 한 놈이 서 있다.

     

    손에는 어디서 뽑아왔는지 광물 기둥을 통째로 들어 무기로 쓰고 있었다. 저거 아다만티움인가?

     

    ―후!!

     

    설인 대장이 무기를 휘두르니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기슈타의 매머드가 적중당했다. 크게 굴러 착지하는 기슈타.

     

    “어이!”

     

    “라스, 너는 어머니께 가라!”

     

    그녀가 도끼를 들고 호기롭게 설인 대장에게 뛰어들었다.

     

    ‘여기가 고비겠어. 설인은 이게 전력이겠지. 전멸시키면 악마의 피도 사멸시킬 수 있을 거야.’

     

    반대로 천룡을 빼앗기면 본래의 역사와 같은 결과가 되고 만다.

     

    나는 타냐와 함께 길을 재촉했다.

     

     

     

    침소에 도착해서 지하로 내려간다.

     

    의사와 부족민 몇 명이 입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선생님, 오셨군요!”

     

    “천룡은?”

     

    입구로 진입하며 모습을 확인했다.

     

    눈을 뜬 천룡은 침소에서 일어나 고개를 치켜들고 당장에라도 우리를 잡아먹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앞에 맨정신으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뿜어내는 마나의 파동이 어마어마하다.

     

    “아까부터 저런 태도라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흠.

     

    그래도 악룡은 아닌데 다짜고짜 치료해 준 사람을 죽이고 그러진 않겠지.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아, 병원이오. 안심하세요. 저주가 영 좋지 못한 곳에 맞았어요.

     

    아니지, 이러면 더 화낼 것 같고.

     

    일단 정중하게 인사하자. 나는 침소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선생님!”

     

    천룡이 눈을 더욱 부릅떴다. 마나의 태풍에 온몸이 날아갈 듯 들썩였다.

     

    뼈도 못 추리겠어, 일시 후퇴다.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나를 치료했는가.

     

    드래곤은 입을 안 열고 말을 하는구나.

     

    “예, 제가 책임자입니다. 의사 라스 고트베르크라고 합죠.”

     

    천룡은 대답 않고 나를 다시 노려본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네.

     

    착실히 진료를 받으셨으니 선물을 드릴까.

     

    나는 가운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사탕 드실래요?”

     

    침묵이 흐른다.

     

    잠시 대치가 이어지고.

     

    ―맛있어 보이는군.

     

    천룡이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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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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