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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계층 수호자의 소환은 대개 2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그냥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정해진 장소에서 뿅 하고 나타나는 것. 탄생 자체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다를 게 없는 리젠 형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주어진 조건을 만족해 직접 불러내는 소환 형식.

       

       1층의 가시나무 왕이 전형적인 소환형 수호자였다면, 2층의 미노타우로스는 전형적인 리젠형 수호자다.

       

       즉, 길드에서는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는지 알고, 그에 맞춰 레이드를 지원한다는 뜻.

       

       당연히 다른 클랜도 그에 맞춰 수준에 맞는 유망주를 참가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위 모험가를 동행시키기도 한다.

       

       최대한 많은 참가자가 일인 분 이상의 공적을 쌓아야 토벌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되니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없지만…여차할 때 구해줄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노타우로스는 두려워해야 할 보스가 아닌, 희귀한 자원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영광스러운 과거와 비극적인 말로를 거쳐 단순한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고 강력한, 하지만 그만큼 먹을 것도 많은 그런 짐승.

       

       심층이나 중층이면 모를까 겨우 상층의 수호자란 그런 법이겠지.

       

       그래서이리라. 나름 브리핑 주최 측인 길드 직원은 의욕 없이 기계적으로 공략법을 설명하고, 각 클랜의 유망주들 또한 대층 흘려들으며 지들끼리 딴짓을 하는 것은.

       

       “개판이네요.”

       

       “이 자리에 올 정도의 유망주라면 클랜에서 이런저런 지원을 받았겠지. 그중에는 계층 수호자의 토벌 기록도 있으니까.”

       

       “하기야. 누구나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기는 싫겠죠.”

       

       어깨를 으쓱이자 리디아가 바로 그런 거라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길드의 회의실 비스무리한 방에서 갇혀, 미노타우로스를 잡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근데 말이에요 리디아 님. 이거 듣는다고 이대로 싸우긴 해요?”

       

       “아니. 그 정도로 합을 맞추려면 이전부터 같이 싸운 경험이 있어야지. 다들 자기 클랜끼리, 혹은 자기 파티끼리 싸운 경험은 있어도 다른 이들과 손을 맞춘 경우는 없으니까 불가능해.”

       

       “쓰읍. 역시 그렇겠죠?”

       

       “응. 이 브리핑은 가끔 튀어나오는 별다른 소속 없이 자수성가한 모험가나, 신생 클랜이라 정보가 부족한 이들, 그리고 길드의 책임 회피를 위해 여는 거니까.”

       

       “책임 회피….”

       

       “이만큼이나 정보를 제공했는데도 허무하게 죽었다면 그건 당신의 실력이 부족했거나, 운이 부족해서지 길드 탓이 아닙니다. 라는 거야.”

       

       “어른은 복잡하네요.”

       

       “어린이인 요나는 단순하게 생각해도 돼. 평소대로 싸워. 단, 다른 모험가들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게 어렵단 말이죠….”

       

       내 기본 스타일은 초전박살이다. 은신하건, 그냥 단숨에 무기를 빼앗고 목을 베건, 제대로 된 교전이 되기 전에 일방적으로 조지는 것.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맷집 상대로 암살은 턱도 없고, 은신 능력은 되려 아군의 마법에 다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조지려 든다는 게 아니다. 보여야 피해서 쏘든 뭘 할 텐데, 안 보이니 빈자리라고 생각해서 쏜 마법에 내가 휘말린다는 것.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지금까지와 달리 적당한 피해만 주면 돼. 혼자 싸우는 게 아니잖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으음. 뭐,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죠.”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길드 직원의 목소리를 흘려 넘겼다. 대형 클랜 소속도 아니면서 대충 듣는 이유는 내가 오만해서도, 멍청해서도 아니다.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간다고 했더니, 엘리가 하루 종일 붙잡고 라떼는을 시전했기 때문.

       

       이런 식으로 공략 정보를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거기에 방 안에 들어찬 각 클랜의 유망주라는 것들을 보며 느낀 건데….

       

       ‘싸우면 내가 이겨.’

       

       기습까지 갈 것도 없다. 일 대 일이라면 정면에서 붙어도 이길 것 같단 말이지.

       

       이게 대책 없는 근자감인지, 실제로 내가 더 강한 건지, 아니면 엘리나 리디아 같은 정상급 강자에 익숙해진 탓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들이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인 이들의 몇몇은 내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해서 힐끔대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외모를 보고 호의를 표하는 사람,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자리에 있는 게 불만인 사람, 그리고 처음 보는 루키를 향한 흥미를 가진 사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적개심에 가까운 시선이었으니.

       

       “저 귀쟁이는 저한테 왜 저러는 걸까요.”

       

       “글쎄. 예전에 요나한테 소매치기라도 당한 거 아냐?”

       

       “설마요. 혹여 정말 제게 털린 적이 있더라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으니 알아보는 건 말도 안 되죠.”

       

       “…뭐야 그 쓸데없는 자신감.”

       

       가슴을 쭉 펴고 엣헴 거리고 있자니, 리디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거 진짜 대단한 건데.

       

       그렇게 리디아와 조용히 시시덕대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어느새 길드의 브리핑은 끝나있었다.

       

       내가 기억할 건 내일 1시까지 광장에 모이라는 것뿐이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 양팔을 번쩍 들고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으그극.”

       

       그간 가만히 있느라 살짝 굳은 관절이 뚜둑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풀어진다.

       

       한가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한층 강렬해진다. 내 옆에 있는 리디아 때문인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녀석은 없….

       

       “쯧.”

       

       아니. 있었네.

       

       아까부터 나를 노려보던 그 귀쟁이. 녀석이 내 근처까지 와서 혀를 찼다.

       

       “사내놈이 품위 없기는.”

       

       “허어?”

       

       사내놈이라는 말 자체는 지구의 기억이 있는 내겐 그리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 세계에서는 계집년 같은 꽤 낮잡아 보는 표현에 속하고 그럴 의도로 내뱉었다는 점은 화가 나네.

       

       미간을 찌푸린 리디아의 소매를 잡아 부드럽게 멈춰 세우고는 눈앞의 귀쟁이를 살펴보았다.

       

       금발, 하얀 피부, 작은 가슴, 큰 키, 단정한 외모…….

       

       전형적인 엘프 여자의 모습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두른 모든 물건이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는 점이지만.

       

       머리에 쓴 티아라에서는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고, 가슴팍의 브로치는 성물이라도 되는지 신성력이 느껴진다.

       

       기다란 귀에 몇 개나 단 귀걸이나 손가락마다 끼운 반지 하나하나가 아티팩트인 것은 물론, 입고 있는 옷의 성능은 몰라도 재질만큼은 모르가나의 로브와 동급으로 보인다.

       

       거기에 화룡점정은 역시 무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채찍은 정체 모를 몬스터의 가죽과 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능력은 알 수 없으나, 내 유니콘 단검을 넘어 리디아의 명검 컬렉션과 맞먹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세, 움직임, 시선 처리, 품고있는 오러의 양, 근육의 발달 상태 등등.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본 결과, 기껏해야 1.2 레몬 정도려나?

       

       레몬과 애플이 아직 1층에서 빌빌대고 있으니 아직 2층에 올라오기엔 무리가 있을 터.

       

       설령 어찌어찌 노가다로 스펙을 쌓아 올라왔더라도, 계층 수호자에게 도전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녀석은 이 자리에 서 있다. 아마 부족한 힘과 실력을 마도구로 보충한 거겠지.

       

       아니면 보디가드처럼 뒤에서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근육질 엘프 궁수 눈나의 도움을 받았거나.

       

       즉, 돈 거어어업나 많은 집안의 재수 없는 아가씨.

       

       상대에 대한 파악이 대충 끝났으니, 이쪽도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주기로 했다.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서 은근슬쩍 ‘소리를 먹는 발걸음’과 ‘눈보다 빠른 소매치기’를 동시에 운용해 몸에 걸친 것부터 싹 벗겨 먹어야지.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

       

       “리디아 경. 감히 조언컨데, 이 천박한 것과는 거리를 벌리시는 게 좋습니다. 언제 경의 손을 물지 모르는 방울뱀이니 말입니다.”

       

       “…뭐? 천박? 방울뱀?”

       

       싸늘하게 굳은 리디아의 표정. 평소에 워낙 덤덤한 얼굴이라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안다. 저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다급히 리디아의 소매를 넘어, 아예 손을 붙잡아 필사적으로 말리며 입을 열었다.

       

       “거, 초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기지개 좀 켰다고 천박이니 방울뱀이니 말이야.”

       

       “하! 이젠 천박한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하군.”

       

       “…….”

       

       뭐지. 진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년의 전 재산을 털기라도 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진심 어린 경멸을 보내긴 힘들 것 같은데.

       

       어이가 없어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하기야. 잠깐이나마 그분을 홀렸으니, 보통 천박한 놈이 아니겠지.”

       

       “……그분?”

       

       대체 누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녀석이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 요즘 헛소문까지 퍼뜨려 가며 찾는 분 말이다.”

       

       “……!”

       

       이브인가. 하기야. 척 봐도 엘프 고위층 딸내미 같은데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해 그분이라고 지칭할 정도의 인물은 이브뿐이겠지.

       

       “그분은 지금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셨다.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취하는 중이니 네놈같은 버러지가 달라붙어 방해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흐음. 그러니까 이브 씨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네?”

       

       “하! 이제와서 네놈처럼 사특한 것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당장 이곳 판 그레이브를 떠나라, 그렇지 않는다면 아예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어 주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브를 들먹이며 나를 모욕하더니, 이제는 판 그레이브를 떠나라 협박하는 녀석.

       

       다만 녀석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브의 단서를 알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방긋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나랑 이브 씨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야?”

       

       “…감히!”

       

       무어라 격분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대로 책상에 내리꽂았다.

       

       콰앙!

       

       온갖 마도구가 작동한 덕에 상처 하나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되짚어 보는 녀석.

       

       그런 그녀의 눈앞에서 단검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하나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지금 너한테 뭘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이제부터 직접 알아내겠다는 소리였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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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EP.129





       계층 수호자의 소환은 대개 2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그냥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정해진 장소에서 뿅 하고 나타나는 것. 탄생 자체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다를 게 없는 리젠 형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주어진 조건을 만족해 직접 불러내는 소환 형식.


       


       1층의 가시나무 왕이 전형적인 소환형 수호자였다면, 2층의 미노타우로스는 전형적인 리젠형 수호자다.


       


       즉, 길드에서는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는지 알고, 그에 맞춰 레이드를 지원한다는 뜻.


       


       당연히 다른 클랜도 그에 맞춰 수준에 맞는 유망주를 참가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위 모험가를 동행시키기도 한다.


       


       최대한 많은 참가자가 일인 분 이상의 공적을 쌓아야 토벌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되니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없지만…여차할 때 구해줄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노타우로스는 두려워해야 할 보스가 아닌, 희귀한 자원에 가까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영광스러운 과거와 비극적인 말로를 거쳐 단순한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고 강력한, 하지만 그만큼 먹을 것도 많은 그런 짐승.


       


       심층이나 중층이면 모를까 겨우 상층의 수호자란 그런 법이겠지.


       


       그래서이리라. 나름 브리핑 주최 측인 길드 직원은 의욕 없이 기계적으로 공략법을 설명하고, 각 클랜의 유망주들 또한 대층 흘려들으며 지들끼리 딴짓을 하는 것은.


       


       “개판이네요.”


       


       “이 자리에 올 정도의 유망주라면 클랜에서 이런저런 지원을 받았겠지. 그중에는 계층 수호자의 토벌 기록도 있으니까.”


       


       “하기야. 누구나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기는 싫겠죠.”


       


       어깨를 으쓱이자 리디아가 바로 그런 거라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길드의 회의실 비스무리한 방에서 갇혀, 미노타우로스를 잡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근데 말이에요 리디아 님. 이거 듣는다고 이대로 싸우긴 해요?”


       


       “아니. 그 정도로 합을 맞추려면 이전부터 같이 싸운 경험이 있어야지. 다들 자기 클랜끼리, 혹은 자기 파티끼리 싸운 경험은 있어도 다른 이들과 손을 맞춘 경우는 없으니까 불가능해.”


       


       “쓰읍. 역시 그렇겠죠?”


       


       “응. 이 브리핑은 가끔 튀어나오는 별다른 소속 없이 자수성가한 모험가나, 신생 클랜이라 정보가 부족한 이들, 그리고 길드의 책임 회피를 위해 여는 거니까.”


       


       “책임 회피….”


       


       “이만큼이나 정보를 제공했는데도 허무하게 죽었다면 그건 당신의 실력이 부족했거나, 운이 부족해서지 길드 탓이 아닙니다. 라는 거야.”


       


       “어른은 복잡하네요.”


       


       “어린이인 요나는 단순하게 생각해도 돼. 평소대로 싸워. 단, 다른 모험가들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게 어렵단 말이죠….”


       


       내 기본 스타일은 초전박살이다. 은신하건, 그냥 단숨에 무기를 빼앗고 목을 베건, 제대로 된 교전이 되기 전에 일방적으로 조지는 것.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맷집 상대로 암살은 턱도 없고, 은신 능력은 되려 아군의 마법에 다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조지려 든다는 게 아니다. 보여야 피해서 쏘든 뭘 할 텐데, 안 보이니 빈자리라고 생각해서 쏜 마법에 내가 휘말린다는 것.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지금까지와 달리 적당한 피해만 주면 돼. 혼자 싸우는 게 아니잖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으음. 뭐,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죠.”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길드 직원의 목소리를 흘려 넘겼다. 대형 클랜 소속도 아니면서 대충 듣는 이유는 내가 오만해서도, 멍청해서도 아니다.


       


       미노타우로스를 잡으러 간다고 했더니, 엘리가 하루 종일 붙잡고 라떼는을 시전했기 때문.


       


       이런 식으로 공략 정보를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거기에 방 안에 들어찬 각 클랜의 유망주라는 것들을 보며 느낀 건데….


       


       ‘싸우면 내가 이겨.’


       


       기습까지 갈 것도 없다. 일 대 일이라면 정면에서 붙어도 이길 것 같단 말이지.


       


       이게 대책 없는 근자감인지, 실제로 내가 더 강한 건지, 아니면 엘리나 리디아 같은 정상급 강자에 익숙해진 탓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들이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인 이들의 몇몇은 내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아까부터 이쪽을 계속해서 힐끔대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외모를 보고 호의를 표하는 사람,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자리에 있는 게 불만인 사람, 그리고 처음 보는 루키를 향한 흥미를 가진 사람.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적개심에 가까운 시선이었으니.


       


       “저 귀쟁이는 저한테 왜 저러는 걸까요.”


       


       “글쎄. 예전에 요나한테 소매치기라도 당한 거 아냐?”


       


       “설마요. 혹여 정말 제게 털린 적이 있더라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으니 알아보는 건 말도 안 되죠.”


       


       “…뭐야 그 쓸데없는 자신감.”


       


       가슴을 쭉 펴고 엣헴 거리고 있자니, 리디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거 진짜 대단한 건데.


       


       그렇게 리디아와 조용히 시시덕대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어느새 길드의 브리핑은 끝나있었다.


       


       내가 기억할 건 내일 1시까지 광장에 모이라는 것뿐이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 양팔을 번쩍 들고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으그극.”


       


       그간 가만히 있느라 살짝 굳은 관절이 뚜둑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풀어진다.


       


       한가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한층 강렬해진다. 내 옆에 있는 리디아 때문인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녀석은 없….


       


       “쯧.”


       


       아니. 있었네.


       


       아까부터 나를 노려보던 그 귀쟁이. 녀석이 내 근처까지 와서 혀를 찼다.


       


       “사내놈이 품위 없기는.”


       


       “허어?”


       


       사내놈이라는 말 자체는 지구의 기억이 있는 내겐 그리 기분 나쁜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 세계에서는 계집년 같은 꽤 낮잡아 보는 표현에 속하고 그럴 의도로 내뱉었다는 점은 화가 나네.


       


       미간을 찌푸린 리디아의 소매를 잡아 부드럽게 멈춰 세우고는 눈앞의 귀쟁이를 살펴보았다.


       


       금발, 하얀 피부, 작은 가슴, 큰 키, 단정한 외모…….


       


       전형적인 엘프 여자의 모습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두른 모든 물건이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는 점이지만.


       


       머리에 쓴 티아라에서는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졌고, 가슴팍의 브로치는 성물이라도 되는지 신성력이 느껴진다.


       


       기다란 귀에 몇 개나 단 귀걸이나 손가락마다 끼운 반지 하나하나가 아티팩트인 것은 물론, 입고 있는 옷의 성능은 몰라도 재질만큼은 모르가나의 로브와 동급으로 보인다.


       


       거기에 화룡점정은 역시 무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채찍은 정체 모를 몬스터의 가죽과 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또한 정확한 능력은 알 수 없으나, 내 유니콘 단검을 넘어 리디아의 명검 컬렉션과 맞먹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세, 움직임, 시선 처리, 품고있는 오러의 양, 근육의 발달 상태 등등.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본 결과, 기껏해야 1.2 레몬 정도려나?


       


       레몬과 애플이 아직 1층에서 빌빌대고 있으니 아직 2층에 올라오기엔 무리가 있을 터.


       


       설령 어찌어찌 노가다로 스펙을 쌓아 올라왔더라도, 계층 수호자에게 도전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녀석은 이 자리에 서 있다. 아마 부족한 힘과 실력을 마도구로 보충한 거겠지.


       


       아니면 보디가드처럼 뒤에서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근육질 엘프 궁수 눈나의 도움을 받았거나.


       


       즉, 돈 거어어업나 많은 집안의 재수 없는 아가씨.


       


       상대에 대한 파악이 대충 끝났으니, 이쪽도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주기로 했다.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서 은근슬쩍 ‘소리를 먹는 발걸음’과 ‘눈보다 빠른 소매치기’를 동시에 운용해 몸에 걸친 것부터 싹 벗겨 먹어야지.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


       


       “리디아 경. 감히 조언컨데, 이 천박한 것과는 거리를 벌리시는 게 좋습니다. 언제 경의 손을 물지 모르는 방울뱀이니 말입니다.”


       


       “…뭐? 천박? 방울뱀?”


       


       싸늘하게 굳은 리디아의 표정. 평소에 워낙 덤덤한 얼굴이라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안다. 저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다급히 리디아의 소매를 넘어, 아예 손을 붙잡아 필사적으로 말리며 입을 열었다.


       


       “거, 초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냐? 기지개 좀 켰다고 천박이니 방울뱀이니 말이야.”


       


       “하! 이젠 천박한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하군.”


       


       “…….”


       


       뭐지. 진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년의 전 재산을 털기라도 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진심 어린 경멸을 보내긴 힘들 것 같은데.


       


       어이가 없어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하기야. 잠깐이나마 그분을 홀렸으니, 보통 천박한 놈이 아니겠지.”


       


       “……그분?”


       


       대체 누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녀석이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 요즘 헛소문까지 퍼뜨려 가며 찾는 분 말이다.”


       


       “……!”


       


       이브인가. 하기야. 척 봐도 엘프 고위층 딸내미 같은데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해 그분이라고 지칭할 정도의 인물은 이브뿐이겠지.


       


       “그분은 지금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셨다.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취하는 중이니 네놈같은 버러지가 달라붙어 방해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흐음. 그러니까 이브 씨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네?”


       


       “하! 이제와서 네놈처럼 사특한 것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당장 이곳 판 그레이브를 떠나라, 그렇지 않는다면 아예 발붙일 곳이 없도록 만들어 주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브를 들먹이며 나를 모욕하더니, 이제는 판 그레이브를 떠나라 협박하는 녀석.


       


       다만 녀석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브의 단서를 알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방긋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나랑 이브 씨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야?”


       


       “…감히!”


       


       무어라 격분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대로 책상에 내리꽂았다.


       


       콰앙!


       


       온갖 마도구가 작동한 덕에 상처 하나 없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되짚어 보는 녀석.


       


       그런 그녀의 눈앞에서 단검을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하나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난 지금 너한테 뭘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이제부터 직접 알아내겠다는 소리였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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