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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마탑 1층 플랫폼 한구석에 해주학파의 라운지가 신설되고, 완공식을 마친 지 일주일 가량이 흘렀다.

        새로 생긴 라운지는 어둡고 습하지도 않았으며 널찍한 창문까지 나 있어 마치 별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열차가 지나다닐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늑한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게 어디인가.

        무엇보다 사감실에 두었던 얼음정수기와 함께 가벼운 먹을 거리들이 놓인 바와 휴계실, 그리고 ‘서로눈이맞은남녀가단둘이들어가면셋이될때까지절대로나오지못하는방’도 있었다.

       

        루퍼트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설계도에 이런 구역을 넣은 적이 없다는데 자연적으로 생긴 거겠지, 조심해야겠다.

       

        “그래서 당분간 여기서 지내겠다고?”

        “정보부 관사는 아무래도 여러 사람에게 눈치 보이니까. 그리고 기숙사 사감 일도 해야 하는데 매일 수련의 층까지 왔다갔다 할 수는 없잖아.”

        “흐응, 뭐…… 시설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생활부에 거주 허가는 받은 거지?”

        “아마도?”

       

        비번이라 나를 찾아온 시엔은 매의 눈으로 라운지 이곳저곳을 조사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도 떨어져 있나 살피는 모양인데 프리나는 당분간 보물방의 저주를 푸느라 내려오지 못할 것이기에 책 잡힐 일은 없었다.

        아직도 내가 자신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그녀에게 기억을 되찾았노라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려 이렇게 주말부부 같은 느낌으로 지내고 있지만 뭐 괜찮으려나.

       

        ‘살살이의 난’을 진압한 기념으로 제작한 ‘1/10 사이즈 메릴린 ver.2’피규어를 장식장에 넣던 와중 창밖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시엔 언니다!”

        “시엔 경이라고 해야지.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시지?”

        “옆에 있는 사람은 혹시 남자친구에요?”

        “저희도 마법 가르쳐주세요!!”

       

        외모로나 실력으로나 마탑에서 유명인사인 시엔을 창밖에서 사람들이 알아보았다.

        본인은 임무에 방해될 뿐이라며 부끄러워하지만 이런 경우가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다.

        대합실 1층 건물은 접근성이 좋았던 탓에 금새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지만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는 해주학파도 당당하게 양지로 올라온 몸, 오히려 세간의 인식을 바꿀 좋은 기회인 것이다.

       

        “친구는 장래 꿈이 뭐죠?”

        “저는 뛰어난 원소술사가 되고 싶어요!”

        “오, 저런. 하지만 여기 들어온 이상 친구에겐 해주술사가 되는 미래밖에는 없답니다. 마탑을 졸업할 때쯤엔 굳게 닫힌 취업문과 세간의 손가락질, 끊임없는 환청과 환시로 인해 저주술사로 영락해버리겠지만 그것도 나름 좋은 삶이랍니다?”

        “흐아아앙!!!”

       

        음, 아직 이른가.

        울음을 터뜨린 어린아이가 철길로 몸을 던지려던 것을 겨우 막고 돌아오자 시엔이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너 애들 울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

        “울리다니, 현실을 알게 해준 것뿐인데.”

        “뭐, 그건 그렇네. 이 앞에 잠깐 시간 있어? 나 여기 좀 더 구경해보고 싶은데. 특히 이 방이라든가…….”

       

        시엔이 ‘남녀가어쩌구저쩌구’방을 곁눈질하며 내게 일정을 물었지만 오늘은 주말, 아쉽게도 선약이 있었다.

        나는 평소 잘 피지도 않는 책을 흔들며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극마법 수업이 곧 끝나거든, 교수님 데리러 가야 해.”

        “교수라면…… 비나 네타니아? 마탑에서 제일 가는 순혈 마법사를 네가 왜 챙겨?”

        “1학기 때부터 수업 조교였고 이번에 니플헤이르 사람에게 챙겨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

        “흐응, 그렇구나…….”

       

        벽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시엔.

        자존심 강한 그녀였기에 직접 입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일련의 행동과 왼쪽 아래로 내려간 시선은 명백한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시엔은 비나와 직접 마주친 적이 있다.

        내가 사악한 치안부의 계략에 빠져 대학원생 신분으로 경매장에 팔려갔을 때였다.

        그때 비나가 나를 구매하려고 했던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충분히 걱정될 것이다.

       

        “야.”

        “응?”

        “있잖아…… 안 가면, 안 돼?”

       

        부끄러움이 가득 담겨 호소력이 배가 된 목소리와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그리고 바짓단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복사뼈가 나를 유혹했다.

        이런 요망한 짓은 또 언제 배운 거야.

        아무래도 나랑 같이 살며 내 취향에 맞춰가다 보니 고지식하고 딱딱한 시엔에게도 변화가 생긴 듯했다.

       

        “아니면 나랑 잠깐 관사에 들렸다 가던지. 마침 너한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미안, 다음에 보자.”

       

        그러나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의 책상 서랍 위에서 세 번째 칸 안쪽에 내 목 둘레와 꼭 맞는 ‘엘리시아의 복종’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기숙사의 얼음 정수기에 설화수를 제공받는 대가로 크리스티나와 했던 약속이 있었다.

        매일 비나를 비원의 층에 있는 글레시아 학파의 연구실로 데려다 주고, 주말 중 하루는 오후 동안 돌봐주는 것.

        철저한 비즈니스맨인 나는 계약내용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엡실론 관으로 향했다.

        수업이 끝난 강의실에 남아있던 몇몇 학생이 조교인 내 얼굴을 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비나 님은 어디 계셔?”

        “바로 옆 휴게실이요.”

        “고맙다.”

       

        단상 뒤편에 난 문을 노크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비나가 있었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뭘 하나 싶어 자세히 살펴봤더니 책상 아래에 위치노트를 숨긴 채 갤질을 하는 중이었다.

       

        ====

        [공지 : 필독! 최근 득세 중인 ‘황금별’에 대한 관리자의 행동강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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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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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또 뭐라고.

        중요한 업무라도 보는 줄 알았네.

        최근 작성글 목록을 확인해보니 세로드립 하나를 쓰기 위해 온갖 게시판에 천개가 넘는 글을 도배해 놓았다.

        몇몇 사람들은 하루에 20시간을 갤질하는 나보고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짜 광기는 눈앞에 있었다.

       

        ====

        [메]

        [———컷———]

        [테]

        [오]

        [는]

        [얼]

        [음]

        [마]

        [법]

        ====

       

        “까드득.”

       

        일단 컷, 부계정을 동원해 도배를 멈추자 그녀의 입에서 사나운 소리가 났다.

        뒤이어 나를 알아차린 비나는 언짢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사감, 개추에요.”

        “개추입니다, 비나 님.”

        “그게 무슨 무례한 발언인가요.”

       

        음, 이 특이한 인사도 내가 자신에게 쓰면 무례한 건가?

        영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정신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나는 비원의 층에 가져다 놓아야 할 연구노트와 일지 등을 정리했다.

        덤으로 비나에게 강탈당해 부계정으로 쓰이고 있는 수강생들의 위치노트도 따로 빼놓으며 다시 안부를 물었다.

       

        “좋은 점심입니다 비나 님, 식사는 하셨나요?”

        “아뇨, 아직이에요.”

        “그럼 저랑 같이 드시는 건 어떤가요? 마침 저도 오후 내내 시간이 비어서요.”

        “그건…… 오늘 하루동안 저와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인가요?”

       

        말이 잘 통해서 좋군.

        우리 비나가 사회성은 떨어져도 지능이 모자라는 부류는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일어나더니 한쪽 손을 곱게 내뻗었다.

        일정하게 박음질된 검은 면사 아래로 수정처럼 아름다운 손톱들이 비쳤다.

       

        “드디어 사감이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요. 안내하세요.”

        “좋습니다.”

       

        크리스티나가 비나를 내게 맡기며 신신당부한 것이 있다.

        절대 니플헤이르와 관련된 마법이나 지식을 유출하지 말 것이며, 다른 학파와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만 조심한다면 어떤 일을 벌인다고 해도 니플헤이르는 내게 트집을 잡지 못할 것이다.

       

        요람 밖으로 나온지 고작 반 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이나 다름없는 비나에게 있어 손을 잡고 마탑 1층의 도시를 돌아보는 것은 굉장한 자극이었다.

       

        “신기하네요, 마력이 탁한 사람이 많아요.”

        “1층은 외부인들도 얼마든지 입장이 가능한 곳이니까요.”

        “사감도 탑 밖에서 왔다고 했죠. 사감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좀 멉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천천히 이야기해 드릴게요.”

       

        시스테인 파크부터 상업지구, 전지의 비석이 세워진 대광장에 이르기까지 마탑의 활기는 날이 갈수록 그 크기를 더해가는 듯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을 천천히 거닐고 있으면 좀 불안했지만, 천방지축인 비나가 소란을 피울 낌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하게 달싹거리는 입꼬리와 빠르게 깜빡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약간은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진작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얼마 전까지도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니플헤이르에 민폐를 끼친다며 혼나기를 반복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그간 바쁘다고 신경을 덜 썼던 게 미안해졌다.

       

        “맛있었어요. 다음은 어딜 갈 건가요?”

        “마침 이 다음 골목에 있는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니 보러 가죠. 마침 제게 티켓이 있습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후, 시스테인 파크에서 상영하는 극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

        오늘 아침 사감실에 있는 얼음 정수기가 퉤! 하고 내뱉은 티켓을 내밀자 손쉽게 입장이 가능했다.

        사악한 용살자에 맞서는 마녀들이 성신의 사도를 쓰러뜨리고 발푸르기스를 구한다는 진부한 내용.

        이미 성신제 때 봤던 거라서 2회차 관람인 나와 다르게 비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팝콘을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만족하셨나요?”

        “나쁘지 않았어요. 특히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용살자가 던진 필멸의 창을 대마녀가 특급 주술 ‘신(神)이 사라진 세계’로 받아칠 때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저도 똑같이 생각했었습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즐거웠어요.”

       

        공연이 끝나자 시간은 어느덧 늦은 저녁으로,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다.

       

        흥, 흐흥-.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 가던 비나는 돌연 몸을 돌리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건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얕은 파문이 담겨 있었다.

        일렁이는 호수에 비친 것은 마차에서 내린 남녀 한쌍이 손을 잡고 들어가는 휘황찬란한 건물이었다.

       

        “사감, 오늘은 갑작스러웠지만 사감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어…… 감사합니다.”

        “그러니 저도 표현은 서툴지만, 이 말만은 전해두려고 해요. 지금이 아니라면 분명 말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장갑을 벗은 비나의 손이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말투는 여전히 덤덤했지만, 그 안에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사감을 만난 뒤로 가끔씩 이곳에 통증이 느껴져요.”

        “네?”

        “조금씩 강해지다가 최근에는 잠잠했는데, 오늘은 가장 심했어요. 제가 사감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들은 모두 이 기분을 해소하고 싶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첫 만남 때부터 나를 사용인으로 부리려 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리 불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나는 비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니플헤이르의 순혈 마법사 답지 않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지금까지 마음고생이 심하셨군요.”

        “…….”

        “오늘 밤에는 저택에 돌어가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요?”

        “제가 다 인도해 드릴 테니 안심하고 몸을 맡기세요.”

        “……네.”

       

        나는 서로의 시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올려다보는 비나의 턱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에 그녀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서서히 눈을 감았다.

        까치발을 드는 비나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준비했던 물건을 천천히 씌워 주었다.

        얼굴이 통째로 덮이는 감촉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제 선물입니다.”

        “???”

        “스트레스가 쌓이신 줄도 모르고…… 걱정 마세요, 이것만 쓰고 있으면 어떤 사고를 쳐도 니플헤이르 측에서는 비나 님인 줄 모를 테니까요.”

       

        나는 비나에게 씌운 것과 똑같은 비추가면을 하나 더 꺼내서 내 머리에 뒤집어쓰며 말했다.

       

       “요즘 누군가의 이름을 팔면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좀 보여서요.”

       

        ====

        [공지 : 필독! 최근 득세 중인 ‘황금별’에 대한 관리자의 행동강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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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밤놀이를 하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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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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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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