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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9

       삶의 기운이 사라져 아무런 생명체도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환경.

         

       촘촘하고 단단한 철창 틈새로 보이는 건 오로지 새하얀 눈밭뿐.

         

       어지럽게 불어오는 찬 바람에 숨을 들이쉬면 콧속이 얼어붙고, 내쉬면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온다.

         

       동상이 되어버린 나무들은 얼어붙은 대지 위에 남아 황량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연은 허물어져 정적함을 강조한다.

         

       음침한 침묵이 난무하는 여기는 제국의 북부 끝자락.

         

       재앙의 파도가 강림하는 중심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러 들어오는 죄수들이 가득한 곳.

         

       최후의 유토피아라 불리는 ‘판옵티콘’이다.

         

       “거지 같은 것들.”

         

       쯧, 카서스는 피떡이 된 죄수를 굽어보며 혀를 찼다. 그의 주먹에는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으으…….”

         

       두껍기 그지없는 주황색 가죽 겉옷이 피로 물들어 변색했다. 이대로 놔두면 냄새가 심할 터.

         

       “거기, 너. 겉옷을 내놔라.”

       “예, 예?!”

       “겉옷 내놓으라고.”

         

       카서스의 살기 어린 시선에 죄수 한 명은 서둘러 겉옷을 벗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이건 네가 입어라.”

         

       자신이 입고 있던 피로 물든 가죽 겉옷을 건네고, 다른 죄수에게 받은 깨끗한 겉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피떡이 된 죄수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네 이름이 뭐였지?”

       “아, 아델리안입니다…….”

       “내가 분명 첫 날에 보여주지 않았나?”

         

       우웅! 카서스는 왼손에 오러를 활성화해 칼날을 만들었다.

         

       “나를 건드리면 죽는 게 낫다는 사실을.”

         

       푸슉! 카서스의 오러가 담긴 손날이 아델리안의 사타구니를 쑤셨다.

         

       “아아아악!!”

         

       다리 사이가 피로 흥건해지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아델리안. 비릿한 쇠냄새가 코 끝에 맴돈다.

         

       “이제 남자로서 구실을 못하게 되었군.”

         

       휙. 카서스는 손날을 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경과 고환을 절단했다. 겁도 없이 나한테 덤빈 증거가 될 테니 친구들한테 자랑해라.”

         

       그대로 걸음을 옮겨 떠나려던 찰나.

         

       “아, 죽으면 곤란해지니 그놈 잘 챙겨라. 이 광경을 봤으니 순순히 내 말을 듣는 게 좋겠지?”

         

       경고와도 같은 말에 죄수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맡겨만 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다른 놈들에게도 알려두겠습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것들. 전형적인 쓰레기들이다. 카서스는 경멸의 시선을 남긴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거지 같군.’

         

       판옵티콘은 제국 각지에서 극악이라 불리는 범죄자들이 모이는 곳. 힘으로 정리해도 좁디좁은 이곳의 지위를 위해 끝도 없이 덤벼든다.

         

       페르시아 공작가의 후계자라 해도 이는 피할 수 없었다. 허나, 한쪽 팔이 없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는 군.’

         

       판옵티콘에 처음 수감 되던 날,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게 성욕을 풀기에 좋겠다며 온갖 오물들이 들러붙었다.

         

       ‘그런 쓰레기들이 달라붙지 않게 음경과 고환을 절단했건만…….’

         

       덤벼드는 건 여전하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후자로 보는 게 맞겠다. 판옵티콘에 들어올 정도면 다들 실력에 자신이 있을 테니. 거기에 카서스는 한쪽 팔이 없으니 더욱 만만하게 보였을 것이다.

         

       ‘거기에 거지 같은 소문까지 퍼지고.’

         

       쓰레기, 오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카서스가 죄수의 사타구니에 손을 갖다 대는 광경을 목격한 간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진 상태. 간수는 카서스가 남성을 범하는 거로 착각해 이상한 말까지 돌았다.

         

       「그 페르시아 공작가에서 온 놈, 진짜 동성애자던데?」

       「황족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죄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동성애로 온 거였어?」

       「어쩐지, 높은 귀족인데도 판옵티콘에 온 이유가 있었구만.」

       「취향은 어찌나 고약한지, 관계를 맺은 남성은 음경과 고환을 잘라버린다더군.」

         

       수치스러웠다. 이 오명을 쓰게 한 프란체 데카르트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소문은 널리 퍼졌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태.

         

       빠득. 카서스의 이가 갈렸다.

         

       ‘거지 같은 것들.’

         

       기회만 있다면 죽이고 싶다. 치욕을 주고 싶다.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싶다. 프란체 데카르트. 그년이 했던 말과 도발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허나 판옵티콘에 수감 된 이상 나가는 건 불가능.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썩어야 한다.

         

       ‘빌어먹을.’

         

       과거를 곱씹으며 험상궂은 얼굴로 감옥에 들어오자, 근처에 머물던 죄수들이 겁에 질려 피했다.

         

       “비, 비켜드리겠습니다.”

       “앉으시지요…….”

       “야, 다들 자리 비워!”

         

       그렇게 6인실을 독방으로 사용하게 된 카서스. 자리에 앉아 눈이나 좀 붙이려고 했건만.

         

       “죄수, 카서스. 면회 요청이다.”

         

       간수가 찾아왔다.

         

       “면회…?”

         

       순간 카서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판옵티콘에서 면회 요청? 황족이나 대귀족이 아닌 이상 불가능이다.

         

       ‘황족이 찾아올 리는 없고.’

         

       아마 페르시아 공작가에서 왔겠지. 인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건지.

         

       “지금 나가지.”

         

       카서스는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초월 구속구를 손에 든 간수가 카서스를 인도해 면회장으로 향했다. 분명 페르시아 공작가에서 온 인물이라 생각했건만…….

         

       “…소미레?”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성녀님, 면회 제한 시간은 5분입니다. 물품 반입은 불가능하며 대화만이 가능합니다.”

         

       소미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5분은 너무 짧은데, 10분 정도만 주시면 안 될까요? 죄인이 참회의 시간을 갖기엔 너무 부족합니다.”

         

       원래라면 대귀족이 요청해서 절대 들어주지 않을 부탁이지만, 간수는 방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의 부탁이신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당연히 들어야지요! 하하!”

         

       간수는 그리 말하곤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카서스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소미레를 바라봤다.

         

       “무슨 일로 왔지?”

         

       살기가 담긴 듯한 날카로운 음성. 현재의 카서스는 복수귀가 되어 사랑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오랜만에 봤는데 상당히 까칠하시네요. 제가 여자라서 그런 건가요?”

         

       카서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놀리러 온 것인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됐어요.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갈게요.”

         

       소미레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왔어요.”

       “…나를 돕겠다고? 왜?”

       “복수하고 싶으시잖아요?”

         

       카서스는 눈을 얕게 뜨고 소미레를 쏘아봤다.

         

       “공짜는 아닐 테고. 오른팔과 가문을 잃은 내게 원하는 게 있나?”

       “원하는 건 없어요. 그저 당신에게 하는 속죄지요.”

         

       산뜻한 미소를 짓는 소미레. 예전의 카서스라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속죄라, 웃기는군.”

         

       위선도 정도껏 부려야지. 판옵티콘에서 지내며 사고가 썩을 대로 썩어버린 카서스는 코웃음 치며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바람을 이뤄드리는 것뿐이에요.”

         

       전혀 들을 생각이 없던 카서스였지만.

         

       “지금 진 바렌베르크가 사라진 거 아시나요? 프란체 데카르트의 곁에서 떠났어요.”

         

       그 말을 듣자 이내 소미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예요.”

         

       구미가 당긴다. 진 바렌베르크가 없는 프란체라면 죽이는 게 수월할 터. 그럼 그토록 염원하던 복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판옵티콘에서 꺼내드릴게요. 태자 전하와 저의 힘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지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소미레.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은 넘어가주지.”

         

       카서스에게 있어선 다시 찾아오지 않을 철호의 기회인지라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럼 오늘 바로 수속을 밟고 꺼내드릴게요. 제가 딱히 원하는 건 없어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걸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누가 들어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쓸데없는 말. 카서스는 이를 가뿐히 무시하고 질문했다.

         

       “오른팔의 치료는 불가능한가?”

       “불가능해요.”

       “어째서지?”

       “저도 위치가 있는지라.”

         

       황족에게 칼을 들이민 죄인을 판옵티콘에서 꺼내는 것도 엄청난 혜택이다. 오른팔까지 치료하는 건 바랄 수 없겠지.

         

       “알겠다. 출소 날짜는?”

       “오늘 내에 가능할 거예요.”

         

       소미레는 싱긋 웃곤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면회실을 나갔다.

         

       ‘드디어 기회가 왔군.’

         

       저 소미레가 왜 속죄를 운운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건지 모르겠다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

         

       ‘프란체 데카르트. 곱게 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 * *

         

         

       프란체는 계획에 필요한 사람들을 공작저로 불러모았다.

         

       카자르, 케일, 라데아, 셀다스. 총 넷이었다.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할게.”

         

       첫 번째는 셀다스였다.

         

       “엑시드는 제국 각지에 퍼진 어쌔신을 총동원해서 대륙 전체를 샅샅이 뒤져. 필요한 자본금은 내가 준비할 거야.”

         

       현재 데카르트 공작가에서 썩어 넘쳐나는 게 돈. 엑시드 전체를 고용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다.

         

       “알겠다. 추적에 들어가는 어쌔신의 인원은 천 명 정도 될 거다. 자본이 많이 필요할 거 같은데.”

         

       프란체는 “그 정도는 문제없어.”하며 대답했다.

         

       “다음은 케일. 공작가의 기사단과 함께 북부에 있는 판옵티콘으로 가서 사형수들을 인솔해와. 얘기는 해둘 테니 몸만 가면 될 거야.”

         

       케일은 “알겠다.”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라데아의 업무는 변하는 거 없어. 어딜가든 나를 따라다니면서 호위하면 돼.”

         

       원래라면 라데아도 추적에 포함시키고 싶지만, 성녀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는 이상 경계를 풀어선 안 된다.

         

       “카자르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움직여서 제국을 수색하고, 케일이 사형수들을 인솔해오면 바로 결속 마법을 실험해.”

         

       탐색과 색적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가 동원된다면 추적이 훨씬 쉬워진다. 단점은 해외로 내보낼 수 없다는 것 정도.

         

       “네. 그럼 탐색이 특기인 마법사들을 추려내서 의뢰를 내릴게요.”

         

       이것으로 기본적인 브리핑은 끝. 프란체는 본론을 꺼냈다.

         

       “다음은 초월 마법사 관련이야.”

         

       초월 마법사 얘기에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일단 이전에 말했던 대로 내 권력을 이용해서 만남을 주선해볼 거야. 만나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 볼 생각이고.”

         

       케일이 물었다.

         

       “만약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거야.”

       “…알겠다.”

         

       사실 생각할 것도 없다. 초월 마법사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카자르의 연구에 기대는 수밖에.

         

       카자르가 답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영혼 결속을 걸고 진이 죽을 때 같이 죽어버리면 그만.

         

       ‘같이 죽는 걸 거부해도 소용없어.’

         

       프란체는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진을 감금시킬 계획이다.

         

       ‘이러면 분명 진도 어쩔 수 없겠지.’

         

       누구보다 사랑하는 진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지만…….

         

       ‘나도 같이 죽을 테니 진도 이해할 거야.’

         

       현재 프란체에게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럼 이만 작전 브리핑은 끝이야. 다들 바로 움직여.”

         

       진 바렌베르크 추적이 시작됐다.

         

       ‘절대 내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진은 말타고 이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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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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