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29

        

         여러 반례들을 보면서 전부터 품었던 의문이 있다.

         네오 헤이븐의 특성이나 설정 같은 게 항상 100% 그대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면, 내 태생에 달린 추적자와의 확률적 인카운터는 어떻게 되는 걸까.

         

         흔적을 말끔하게 싹싹 지우면 현실적으로 이어질 연결 고리가 없으니 일어날 일이 없나?

         아니면 꼬리를 완전히 잘라냈다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우연이 겹쳐서 마주치게 되나?

         

         이 어수선한 세계의 일원이 된 이후 몇 달 동안 메가코프와 엮일 일이라고는 파라다이스 쪽과 깨작거리는 것밖에 없어서 안심했는데…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망할.”

         

         뇌내 필터를 거칠 새도 없이 자동으로 악담이 튀어나왔다.

         가급적 자세한 용건이나 병력 규모 밝혀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밖에 있는 놈은 짤막한 자기소개를 마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될 거라는 것처럼.

         

         두근… 두근.

         

         속에 뭐가 얹힌 것 마냥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이내 녹아내린 감정이 연료가 되어 심장의 고동을 키워 나간다. 곁에 있는 제로는커녕 불청객에게도 들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현실에서 눈 돌리고 문제를 외면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감상도 있었다.

         

         언제까지고 마주치지 않을 순 없었다. 주요 세력 중 하나를 영원히 안 보고 엔딩을 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게임이었다면 이 고생도 안 했지.

         

         사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새파랗게 질렸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반대로 무표정하게 굳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감각이 멀어졌던 팔다리에 다시금 혈류가 돌며 좁아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내 상태보다는 주변 풍경이. 그리고 무엇보다 어리둥절한 모녀가 크게 다가왔다.

         

         이 멍청아, 정신차려. 이대로 신세 지던 사람들도 휘말리게 할 거야…?!

         

         “…제로? 미안하지만 고생 좀 해줘. 정면으로 뚫을 거야.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전장을 멀리 옮긴다는 느낌으로.”

         

         –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피해가 걱정되신다면 제가 더 노력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만. –

         

         “말은 매끄러워요 아주!”

         

         거 참 듬직하네.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저렇게 노골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으니 거짓말도 진실이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찰칵! 하고.

         홀스터에서 단번에 피스메이커를 뽑아 들었다. 오랜만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머리가 채 떠올리기도 전에 움직인 엄지손가락이 세이프티(Manual Safety; 안전 장치)부터 튕겨서 푸는 걸 보니 나도 현지인이 다 됐다는 실감이 들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지면을 디딘 발에 더해질 안정감으로 치환된다.

         발 밑이 굳건해지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급함을 느끼던 마음까지 냉정을 되찾았다.

         

         …할 수 있다.

         적들의 전력은 미상. 한없이 열세일 게 분명하고 여태 겪었던 전투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고전이 예상되지만,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야 할 건 목숨뿐인 데다가 가진 짐마저 단출한 우리 측에 속도전의 우세가 있다는 건 명백.

         

         “후우…!”

         

         시선으로 정면으로 고정. 자세를 낮춘다.

         문을 열고 나서는 대로 제로의 뒤에 따라붙을 수 있도록 당겨진 활시위처럼 몸을 긴장시킨다. 이 날랜 로봇의 스피드를 따라갈 자신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문이 열리는 등의 가벼운 계기만 있더라도 튀어나갈 준비가 끝난 우리를 제지한 건, 얼핏 들으면 굉장히 무심한 슈나이더 씨의 만류였으니.

         

         “…집 앞 어지를 생각 말고 조용히 뒤쪽 비상구로 빠져나가게. 핏자국은 나중에 지우기도 힘드니까.”

         

         “네?”

         

         몸을 움찔 떨고는 되물어봤지만, 그는 그저 위치를 실비아 씨가 안내해줄 거라며 복장을 다듬고 남은 손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있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 마냥.

         

         일단 숨겨진 비상구 같은 게 가정집에 당연하다는 듯이 있는 건 둘째치고, 우리가 몰래 빠져나간다고 저들이 들이닥치지 않는 게 절대 아닐진대…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 건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지켜야 할 비전투원 두 명은 대체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걸까? …정답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싸우다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나야 선량한 자영업자로서 기업 조사에 협조하는 것뿐일세. 그 과정에서 잘 기억이 안 나는 일이나, 모르는 사람의 거취에 관해 물어보면…… 괜히 억지로 떠올려보려다가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는 노릇이고.”

         

         “…….”

         

         머쓱하게, ‘나도 나이가 들어서 예전처럼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질 않더군.’ 하고 헛기침하며 중얼거리는 은퇴 용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가코프 소속 직원과 마주쳤다고 다짜고짜 정면에서 들이받으려 한 나도 나지만 역시 베테랑이라 그런지 처세술이 아주 능숙하시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늘어지려는 이야기를 마무리해 버리시는 쿨함이란.

         

         “크흠…! 정 신경 쓰이면 나중에 놀러 와서 몇 잔 팔아주게. …집안이 많이 조용해지겠군.”

         

         굳이 티를 내지 않으려는 중년의 멋스러움 또한 겸비하신 건 정말 모두가 본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이런 성인군자를 호감도 낮으면 이상한 반복 퀘스트만 내주는 노망난 아저씨라고 떠들던 건 어느 못된 유저들이냐고…!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더 시간이 지체되면 이상하게 여길 거라며 손을 내저으시는 슈나이더 씨에게 한 번 꾸벅.

         갑자기 헤어지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는 얘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뾰로통한 채 눈물을 글썽거리는 메리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준 나와 제로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같이 지내던 동거인이 임전태세부터 갖추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상황임에도 그래도 떼 한 번 쓰지 않는 꼬마 공주님과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창고로 향하시는 가정 주부님의 모습은, 새삼스레 이들도 뒷세계에 반 발쯤은 걸친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켜주었다.

         

         본격적으로 수배지에 오르거나 도망자 신세가 되면 진짜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힘드니까, 여기서는 배려를 감사히 받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하도록 하자.

         

         찰팍…!

         

         “아, 맞다.”

         

         여기저기 젤리 같은 게 묻어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째서 두 주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있는 집에 왜 이런 이물질이 흘러 넘치고 있나 잠시 망각했는데… 메이랑 놀아주던 와중에 빠져나가는 거구나 이거? 우리 공주님은 거의 두 배로 억울하겠네.

         

         “…아나스타샤? 오른쪽에서 세번째 권총을 쏘면 돼. 알았지?”

         

         “오른쪽에서 셋…. 예?”

         

         무슨 암호일까? 비유적 표현? 그것도 아니면… 뜬금없는 수수께끼?

         

         실비아 씨의 진지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말을 되풀이하다가 질문을 던져봤지만, 그녀는 비밀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라는 것처럼 입을 닫아버렸다. 애당초 현관 쪽에서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한 말소리 탓에 크게 떠들 수도 없었고.

         

         “이거 무슨 일이신지…? 가게 대관 요청이라면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여기서 지내는 여자 용병이 한 명 있었을 것이오. 인상착의는…….”

         

         조심스럽게 선반 틈새로 그녀의 향한 팔이 꼼지락거리자, 별다른 소음도 없이 미끄러지듯 측면 벽이 열렸다.

         

         드러난 풍경은… 일종의 무기 금고실.

         각양 각종 총기와 도검, 방탄복에 방검복은 물론. 생체 임플란트 형 지갑과 통신 장치가 보편화되면서 사장되었을 크레딧 스마트 워치(Smart Watch; 컴퓨터 기능이 추가된 시계)까지 전시된 비밀 방은 확실히 숙련된 용병의 집에 있을 법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구태여 싸우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나?

         

         “…….”

         

         실비아 씨가 어서 빨리 움직이라는 듯 손을 내저으셨다. 그 제스쳐는… 들어가라고요? 이 안에?

         일단 바로 등 뒤까지 따라온 에나마의 집념에 순순히 당해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녀의 인도를 따라 내부로 들어서자.

         

         스르륵… 달칵.

         

         자연스럽게 문이 닫히고 안에는 나와 제로만 덩그러니 남았다.

         

         놈들이 돌아갈 때까지 여기 마냥 숨어있으라는 의도는… 아마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다시 보자는 슈나이더 아저씨의 인사도 있었고, 청소하느라 어질러진 창고는 누가 보더라도 의심을 사기 딱 좋았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있다는 건데….

         

         – 아샤님, 장비를 좀 빌려가도 괜찮겠습니까? 빈약한 원거리 무장을 보강할 필요가 있긴 했습니다. –

         

         “…도둑질은 안 돼 인마!”

         

         젯밥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바보를 제지한 뒤, 남자의 로망 넘치는 진열장을 쭉 훑었다.

         

         날붙이만 해도 택티컬 픽스드 나이프(Fixed Knife; 고정형 단검), 카람빗(Karambit; 발톱 단검), 날이 굽은 쿠크리(Kukri) 등이 심미안을 즐겁게 했고. 총기 또한 작은 리볼버나 자동 권총부터 대구경 중화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음… 아무리 용을 쓰고 관찰해봤자 내 눈에는 편집증적으로 완성된 은닉형 무기고로밖에 안 보인다.

         

         “분명 오른쪽에서 세번째 권총이라고 했지…?”

         

         세상엔 스스로 판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얌전히 안내된 사항을 따라야 하는 있는 법인데, 이번은 후자인 것 같았다.

         

         집어 든 핸드건을 요리조리 돌려본다.

         사이버웨어가 보내오는 정보로만 판단한다면 어디로 보나 별로 특별한 것 없는 헤이롱 제 9mm 표준 모델.

         

         이게 상황을 타개해줄 수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야. 권총을 쏘라는 건 방아쇠를 당겨보라는 거겠지? 무식하게 쏴서 부수라는 게 아니라?”

         

         – …미스 실비아의 표현이 중의적이긴 했으나, 파괴하라는 지침은 절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

         

         나름 진지한 고민에 진지한 답이 돌아와서 다행이다. 솔직히 이 좁은 공간에서 도탄 위험성을 감수하고 발포하는 것과 때려부수는 것 중 어느 쪽이 정답인지 확신이 안 섰으니까.

         

         그렇게 나는 최대한 멀리, 구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고.

         

         틱!

         위이잉—…!

         

         “오…?!”

         

         옛날 첩보 영화나 히어로 영화에서나 보던 회전형 비밀 방을 몸소 체험해보게 되었다.

         와, 이거 진짜 총이 아니라 총기 모양으로 제작된 리모컨이었다. 방아쇠가 그 버튼이고.

         

         미세한 기어 구동음과 함께 방이 180도 회전하자, 벽으로 막혀 있던 입구 대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으니. 이런 기믹은 언제든지 대환영이다 정말.

         

         – 이건 상당히 공들인 물건이군요. 내부 구조를 대충 스캔하는 정도로는 구분조차 힘들 만큼. –

         

         그럴싸해 보이면서 납득 가능한 수준의 금고실로 눈가림을 해 놓고, 또 안에 추가 장치를 숨겨 탈출로를 확보한 이중 구조에 감탄하며 어두운 통로로 들어갔다.

         

         제로의 광원에 의지해 한 1분가량 걸었을까?

         거주 구역에서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기는 어려웠는지 지하도의 출구는 꽤 빨리 나타났다.

         

         덜컹! 하고. 도중에 머리 언저리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던 걸 고려하면, 딱 최단거리로 주택 단지를 빠져나왔다 싶을 때 마주한 천장문을 들어올리고 우리는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람 따라 바닥을 굴러다니는 비닐 봉투, 그 외의 자잘한 쓰레기들.

         그렇지. 비밀통로의 끝은 또 이런 인기척 없는 골목길인 게 정취가 넘친다. 그야… 악취까지 넘치는 건 좀 문제이긴 했지만.

         

         “읏차!”

         

         내가 완전히 나온 걸 확인한 제로가 다시 맨홀 뚜껑처럼 생겨 먹은 문을 원래대로 돌려놨다.

         

         …저벅.

         

         자, 유감스럽지만 지금부터는 다시 방랑자 신세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뻔뻔하게 네오 헤이븐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아니면 아예 다른 도시로 거점을 옮기는 것도….

         

         저벅, 끼긱…!

         

         “시발, 이런 부분까지 영화랑 비슷하기를 바란 건 아닌데.”

         

         나지막하게 욕설을 뇌까렸다. 사실 뚜껑을 닫은 제로가 미동도 하지 않고 골목 끝자락을 노려볼 때부터 직감은 했다. 만약 나를 쫓아온 상대가 에나마의 추적자라면 이런 방법으로는 따돌리기 힘들다는 걸.

         

         그리고 연구소가 터졌을 때 일차적으로 달려온 추적자만 해도 넷이었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더 못난 병력만 파견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발소리가 너무 커서 일부러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소이다.”

         

         염병. 슈나이더 씨의 거짓말을 간파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쫓아왔다고?

         괜히 병과 명칭 자체가 추적자가 아니었다. 한 번 교전이 일어나면 캐릭터가 아무리 멀어져도 계속 따라오는 거지 같은 특성이 그런 방식일 줄이야.

         

         “그래서. 그쪽은 무슨 바쁜 일이 있길래, 약속까지 내팽겨치고 앞치마 두른 가정부 로봇을 앞세워서 떠나시는지…? 아무래도 소인도 받은 명령이 있는지라.”

         

         “음….”

         

         놈의 예의 없는 지적질에 나와 제로의 시선이 슬쩍 교차했다.

         정신없어서 이제 눈치챘는데 얘는 아직도 꽃무늬가 그려진 청소복을 입고 있었네. 정말… 영악하기 그지없어요.

         

         – 이런, 죄송합니다. 외출 명령을 따르느라 반납 과정을 생략했습니다. –

         

         “으휴, 조심 좀 하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처럼 기계 팔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렇게 주섬주섬, 묶었던 매듭을 풀어헤치더니.

         

       

       

         펄럭!

         

       

       

         펼쳐진 천 쪼가리가 추적자의 얼굴을 향해 내던져졌고.

         한 발의 탄환과, 한 자루의 칼날이 앞치마를 무자비하게 찢어발기며 그 뒤에 있을 적의 숨통을 노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습 되받아치기! 죽어라, 이 앞잡이 녀석!

    휴재도 했으면서 연재시간이 왜 이따구가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휴재라고 진짜 쉬지는 못 했… 크흑.

    0이시영0 님의 100코인 후원!
    아우쿠소 님의 100코인 후원! 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등장인물 일러스트 모음은… 역시 만약 한다면 공지로 해두는 게 좋을까요. 고민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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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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