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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오늘도 어김없이……라고 하기에는 고작 어제 시작한 운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하늘과 이수아의 강권에 이기지 못하고 또 운동하러 온 결과, 나는 다시 한번 건어물이 되고 말았다. 아마 며칠만 있으면 내가 이렇게 건어물이 되는 것도 ‘어김없이’가 되겠지. 특히 유하늘 눈치를 봐야 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고.

       

       우레탄 바닥에 대짜로 뻗어서 한참을 헥헥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운동장 한 바퀴 만에 뻗었다. 어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못 뛰었지만, 오늘은 어제 뛰었기 때문에 제대로 뛰지 못했다. 여기 오기 전부터 팔다리가 아팠는데 제대로 뛸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물론 그런 핑계를 다 떼어놓고 생각해도 예사라의 체력이 나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참 동안 헥헥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나를 내려다보는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유하늘과 이수아는 어제처럼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로 안 괜찮아.”

       

       나는 아이들이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다.”

       

       남다운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뭐, 그래도 생전 운동 처음 하는 녀석들은 다 그러니까.”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 사람이 처음부터 체력이 빵빵할 수는 없을 테니까.

       

       “…….”

       

       확실히, 남다운은 나를 볼 때마다 ‘칫’하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나에게 명확한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를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하는 아이들보다는 덜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산발한 금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는, 사실 이런 게임 속 세상에선 ‘양아치 캐릭터’로 분류될 법한 헤어스타일인데도 제대로 부 활동도 하는 모양이고. 원래 운동부는 성실한 놈들이 하는 거니까.

       

       하긴, 원래 이런 캐릭터들이 묘하게 성실한 부분이 있지. 그러면서도 지각하거나 수업 빼먹고 당당하게 굴기도 하고.

       

       아니면 양아치 캐릭터가 뭔가 계기를 가지고 성실해진다는 것도 클리셰 중 하나이기도 하고.

       

       “…….”

       

       나는 남다운을 빤히 올려보다가,

       

       “선배.”

       

       불쑥 말을 걸었다.

       

       “뭐.”

       

       남다운은 남다운 아니랄까 봐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쪽으로 오고 나서 아이들에게 일부러 말을 건 적은 없지만, 사실 말을 건다고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수업 째 본 적 있어요?”

       

       “넌 갑자기 뭔 소리를 하냐.”

       

       내 뜬금없는 질문에, 남다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라야?”

       

       유하늘은 놀란 표정으로 나와 남다운을 번갈아 보았다.

       

       “야, 그런 거 아니다. 나는 그런 적 없어.”

       

       유하늘과 눈이 마주친 남다운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 머리 물들이고 산발을 한 게 딱 학교 수업 몇 번 빼먹었을 사람으로 보여서.”

       

       “그러니까 아까부터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자신이 도와주고 있는 후배가 갑자기 시비를 걸자, 남다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건 내 허약한 몸을 보고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다운이 남들보다 천성이 착해서 그런 걸까?

       

       뭐, 둘 다일지도 모르지.

       

       “내가 금발이라 양아치면, 쟤도 양아치게?”

       

       “저, 저는 자연 금발인데요!”

       

       남다운이 이수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그러냐. 미안하다.”

       

       남다운은 이수아의 대답을 듣고 바로 사과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남다운을 보며,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날 힘까지는 없었고, 그래서 일단은 다리를 쭉 펴고 상체만 들어 자리에 앉아있는 모양이 되었다.

       

       “아니면, 그 헤어 스타일은 정말로 좋아서 하고 다니는 거?”

       

       “내가 좋아서 하고 다니지 않으면 왜 하고 다니겠냐고. 너, 아까부터 말투가 어째 시비 거는 것 같다?”

       

       너 같은 건 한주먹거리도 안 돼, 라고 말하는 듯, 남다운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음.

       

       역시 나에 관한 호의 보다는 사람의 본질을 보여주는 능력일까?

       

       사실, 나는 남다운과의 관계는 그렇게 돈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뭐 좋은 관계여서 나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유하늘이라는 열쇠보다는 중요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예사라는 원작에서 남자 캐릭터들과 얽혀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하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관계가 ‘쉽게 망가지지 않을’ 성격을 가진 상대를 파악하는 것은 나의 생존확률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모여있는,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들을 포함하면.

       

       “좋아요, 믿어 줄게요.”

       

       “아니, 니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하아, 됐다.”

       

       남다운이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저보다 1년 일찍 다니기 시작한 선배에게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그러던가.”

       

       나와 대화할 의지를 잃지 않은 남다운에게, 나는 얼마 전부터 한가지 생각하던 질문을 꺼냈다.

       

       “이 학교에 넘기 쉬운 담장이 있을까요?”

       

       “……뭐?”

       

       *

       

       “아, 그렇구나. 그 차에 원해서 탔던 게 아니구나…….”

       

       어느새 유하늘, 이수아, 남다운은 내 주변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있었다. 원래라면 이 자리도 누가 사용할 자리이긴 했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웬만해서는 내 주변에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걸 왕따라고 한다면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지만, 그냥 써먹기 쉬운 상황이라고 본다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실제로, 다른 축구부원들은 저 먼 곳에서 이쪽을 흘끔거리면서도 자기네들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남다운, 너는 갈 필요 없는 거냐?

       

       갈 필요 없으니까 안 가고 여기 죽치고 앉아있는 거겠지만.

       

       “응. 내가 정문으로 나가면 반드시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 차에 탈 수밖에 없어.”

       

       “그래서 담을 넘어 도망가겠다고?”

       

       남다운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했다.

       

       “나쁠 것도 없잖아요. 하루 정도는 그냥 걸어서 집으로 가는 것도.”

       

       내 말에, 의외로 이수아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억압하는 자들로부터의 탈출이라니. 멋져…….”

       

       아니, 그렇게 감동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뭐, 말리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

       

       “선배! 사라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요!?”

       

       유하늘도 내가 억지로 차에 타고 간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정의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치며 남다운을 바라보았다. 유하늘이 얼굴을 불쑥 내밀자, 남다운은 윽, 하면서 몸을 뒤로 살짝 물렸다.

       

       이쪽으로 오고 나서 유하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유하늘이 얼마나 예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미남 미녀가 많아 보이는 이쪽 세계 기준으로도 꽤 예쁜 편에 속할 것이다. 사실 이런 미연시 속의 플레이어블 여캐는 일러스트상 대체로 예쁜 편이니까. 대한민국 재계를 책임지는 주요 그룹의 아드님들과 이어지려면 당연히 개연성이 빠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뭐, 도울 방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남다운은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학교 뒤편의 담은 별로 안 높기는 해. 내가 담 앞에 섰을 때 대충 요 정도?”

       

       남다운은 자신의 쇄골 앞쯤을 손으로 슥 그어 보이며 말했다. 아마 예사라의 정수리가 닿을락 말락 한 수준인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넘어가려고 하면 넘어갈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건 넘어갈 때의 이야기고, 넘어가서 내려가기에는 조금 더 높을 거다. 네 체력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누가 넘겨주면 되죠.”

       

       내가 시원하게 대답하자, 남다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누가?”

       

       “…….”

       

       나는 남다운과, 유하늘과 이수아를 번갈아서 한 번씩 바라보았다.

       

       “내가?”

       

       “저는 좋아요!”

       

       유하늘은 손을 번쩍 들며 찬성했다.

       

       “사라와 함께 걸어서 하교해보고 싶었으니까!”

       

       “저, 저도…….”

       

       이수아는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리고 그런 우리 셋을 보고, 남다운은 한숨을 푹 쉬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

       

       “나는 절대로 담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너희들이나 넘어가라.”

       

       담 넘어가기 딱 좋게 생긴 얼굴인 주제에.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지. 아까 잔뜩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지만 남다운은 대충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나를 찌릿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말로 꺼내지는 않아서인지 남다운도 말로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여기야.”

       

       학교 부지 안쪽 깊숙한 곳, 점점 높아지는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 남다운이 말한 곳이 나왔다.

       

       학교 입구는 부지의 낮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굽이굽이 올라가는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지형 자체가 서서히 높아진다. 하지만 학교 담의 절대적인 담의 높이는 그대로라서, 완만한 경사를 계속 올라 가장 높은 곳으로 가면 담은 확실히 적당히 큰 사람이 그 너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얕아졌다.

       

       다행히 지형 자체가 높아지는 것이라 반대편도 크게 높이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정말로 여기로 넘어갈 거냐?”

       

       남다운이 나에게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네.”

       

       매일 넘어갈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탈출 루트 몇 개 정도 알아놓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수업 도중에 야반도주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기왕 억지로 체력을 키우게 된 김에, 예사라의 피지컬로 해결할 수 있는 탈출로를 여기저기 만들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중에 개구멍이라도 찾아볼까.

       

       “너희 둘도?”

       

       “네!”

       “네!”

       

       이수아와 유하늘이 한마음으로 외치자, 결국 남다운 다시 한번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쉬었다.

       

       *

       

       “좋아. 거기서 다리를 담 너머로 넘겨.”

       

       남다운이 내 팔을 꽉 잡은 채로 말했다.

       

       “지, 진짜 놓으면 안 돼요?”

       

       “담 넘겠다고 한 본인이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쩌냐. 그래, 안 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리 너머로 넘어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다리를 담 너머로 넘겼다.

       

       “으앗!”

       

       “아, 내가 말 않았나? 담 너머에 처마가 있거든. 아마 네 발로는 안 닿을 거다.”

       

       “그,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요!”

       

       나는 소리치면서 발을 버둥거려보았지만, 남다운의 말대로 발이 닿는 곳이 전혀 없었다.

       

       나와 남다운은 담을 너머 마주 보고 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나는 담 위에 상체를 거의 다 올리고 다리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남다운은 그런 나의 앙 팔을 꽉 붙잡아주고 있는 형태였다. 남다운이 손을 놓기만 하면, 아마 나는 그대로 지붕 처마 밑으로 뚝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뭐, 걱정 마. 이쪽에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을 뿐이거든? 아마 떨어진다고 해도 다칠 일은 없을 거야.”

       

       “아, 잠깐!”

       

       “왜, 뭐.”

       

       “그, 고맙다고요.”

       

       이제 와서야 그런 소리를 하는 나를 남다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감사 인사가 너무 늦었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남다운은 히죽 웃었다.

       

       “그럼, 잘 가라.”

       

       남다운이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 몸이 담 지붕을 타고 쭉 미끄러져 내렸다.

       

       “으햐악!”

       

       나도 모르게 그런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추락한다고 느끼기도 전에, 발이 바닥에 툭 닿았다.

       

       “…….”

       

       비명을 질렀다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담이었다.

       

       아니, 믿지 못했다는 것은 아닌데.

       

       “내려줄 거면 말을 하던가!”

       

       내가 소리치자, 담 너머에서 “내려달라며!” 하고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뭐, 도와달라고 한 주제에 너무 틱틱거리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렸다. 주변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쩍 하고 얼어붙었다.

       

       “…….”

       

       내 치마 앞부분이, 들려있었다. 뭐랄까, 장르가 달랐다면 뭔가 달려♂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깔끔하게.

       

       내가 뻣뻣하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내 교복 치마가 스륵 내려오며 그 아래에 있던 존재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쭈그려 앉아있는,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금발 태닝 여고생이었다. 등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금발로 물들였지만, 머리카락 뿌리 부분은 새로 머리가 자라 색이 다시 까맣게 돌아오고 있었고, 피부는 옅은 갈색. 오른쪽 귀에는 피어스를 하나 했고, 조끼 아래 입고 있는 교복 셔츠는 단추를 세 개씩이나 풀어서 조끼 위로는 그대로 셔츠가 열려 있었다.

       

       양 귀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을 끼고,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이 입 밖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마도 나의 속옷이 있었을 자리를.

       

       그 얼굴은 이수아나 남다운처럼 조금 빛나고 있었다.

       

       ……아니, 이 게임의 마지막 히로인을 만나는 건 좋긴 한데.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이런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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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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