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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늦은 밤.

     그레이 지브롤터가 국왕의 인장이 찍힌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지브롤터로 돌아간 날.

     “공주.”

     카르멘 왕비는 하루 전과 똑같은 구도로 한 사람을 초대했다.

     “네가 참으로 부럽구나.”

     “…….”

     카르멘 왕비는 앞에 다소곳이 앉은 금발의 소녀, 나리아 공주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렇게 지브롤터 변경백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사랑…?”

     나리아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요?”

     “그레이 지브롤터.”

     “그가 저를 사랑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하, 신경이 쓰이나 보다? 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걸 보아하니.”

     나리아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이 쓰이는 건 맞지만, 어머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뭐?”

     “어머님과 그레이 경이 나눈 이야기를 생각해보면…그는 그저 ‘반정’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반정.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옹립한다.

     “아버지께서 저지른 추행이 지브롤터에 피해를 줬으니,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닐까요.”

     “자기 어머니를 건드린 거?”

     “아들이라면 누구나 어머니를 건드린 자에 대해 불쾌해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비와 공주가 나누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단어.

     “제게 주어진 정보로만 판단하자면.”

     나리아 공주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탁자에 놓인 다과만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답이 없다. 당장 바꾸기에는 유일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제가 아직 미성년이다. 그렇다고 10년 동안 가만히 있자니, 나라가 굴러갈 꼴이 답이 없어 보인다.”

     “…….”

     “그래서 어머니와 손을 잡으려고 한 게 아닐까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축출하기 위해서.”

     “정말이지, 그레이 그 아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요즘 10살 아이들은 머리에 30살 먹은 어른이라도 들었니?”

     “설마요.”

     나리아 공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가볍게 들이켰다.

     “저는 그저 있는 정보를 토대로, 그 사람의 행동 원리를 분석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레이가 너를 지지하기로 한 이유가 단순히 현 국왕이 답이 없어서 그렇다?”

     “예.”

     “흐흥, 이런 건 어린아이 같다니까.”

     카르멘 왕비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 아이는 너를 좋아한다. 첫눈에 반했든, 아니면 네가 공주라는 게 취향이든. 어쩌면 국서(國壻)를 노리는 걸지도 모르지.”

     “여왕이 된 이후, 제 남편이 되려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네가 죽으면 왕위를 물려받고, 혹은 너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왕이 되는 거지.”

     “지브롤터의 중앙 진출을 귀족들이 바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모르가니아와 손을 잡는 게 아니겠어? 우리는 지브롤터에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 후후.”

     카르멘 왕비는 검지로 자기 입술을 쓸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야기하면 할수록 너희 둘, 정말이지 닮았구나.”

     “저와, 그레이 경이?”

     “10살 답지 않은 것도 그렇고, 머리가 나이에 맞지 않게 똑똑한 것도 그렇고.”

     “그레이 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거겠죠.”

     나리아 공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탕을 집었다.

     “어머니는 저보다 더하셨잖습니까.”

     “얘는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뿐입니다. 이미 10살이 되기도 전에 공작가의 행정업무를 일부 담당하셨잖아요?”

     “그래, 그래. 너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우리 같은 ‘천재’들은 나이에 맞지 않지. 다만….”

     카르멘 왕비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모르가니아 혈통의 여인들이 대대로 머리가 똑똑했던 것과 달리, 지브롤터는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좋게 평가할 수는 없어.”

     “지능, 말씀이십니까?”

     “아니. 정치. 행정. 권력 싸움. 그런 방향으로의 머리말이지.”

     지브롤터에 대대로 내려오는 재능이 있다면, 당연히 검에 대한 재능일 것이다.

     “지브롤터 가문은 왕국을 지키는 방패인 동시에, 가문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배출했단다. 당대에 이르러 소드 마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마스터 급인 분이 머리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죠.”

     “그래. 그들은 중앙 정치에 흥미가 없었거나, 관심이 없었던 거지. 그런데….”

     카르멘 왕비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네 아버지, 국왕 전하께서 기어이 벌집을 쑤셔버렸으니.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구나.”

     “…….”

     “그래도 말이 통하는 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너는 모를 거다. 여차하면, 유사시에는….”

     “지브롤터의 반역, 배신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래.”

     반역.

     반정과는 조금 다르다.

     “다행히 제국으로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잖니.”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에 대한 반역과, 노스트럼 왕국에 대한 반역은 천지 차이니까.

     “딸. 지브롤터 변경백은 내가 잘 안다. 그는 내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 하지만….”

     카르멘 왕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들, 그레이 지브롤터를 조심하거라. 그는 우리와 달라. 초대 지브롤터 이후로 지금까지, 그런 지브롤터는 없었어.”

     “…….”

     “그 아이는 단순히 뛰어난 머리, 재능만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대화의 속에는…’경험’이 깃들어있었어.”

     “마치, 중앙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귀족처럼 말입니까?”

     “비슷한데 조금은 다르구나. 굳이 이야기하자면, 자기가 변경백으로 한 10년은 백작가를 운영해본 그런 느낌?”

     “…어머니.”

     나리아 공주는 차를 전부 들이켜버렸다.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하셔서 그런지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만 들어가셔서 주무시죠.”

     “얘는.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니?”

     “어머니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제일 위험한 존재잖습니까. 지브롤터에서 이런 날을 위해 갈아온 칼날.”

     “그런 그가, 너를 왕으로 옹립하고 싶다고 했지.”

     두 모녀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명심하렴. 그레이 지브롤터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지브롤터보다 더 지브롤터다운 인간이란다.”

     “아까는 다르다면서요.”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근본이 지브롤터인 건 변하지 않지. 뭐랄까, 돌연변이?”

     “국왕을 바꿔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게 지브롤터답다는 겁니까?”

     “아니. 지브롤터는 말이지.”

     카르멘 왕비는 나리아 공주를 향해, 진심으로 부럽다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미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족속들이란다.”

     * * *

     “지브롤터 가문은 대대로 나라에 미쳐있었지만, 저는 아닙니다.”

     “돌아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냐.”

     서재, 아버지를 독대한 자리에서 입을 열자마자 한 소리를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결과는?”

     “어차피 본론으로 들어갈 거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본론도 절차가 있으니.”

     아버지와 아들로서 나누는 친교가 ‘다녀왔다, 고생했다’ 딱 두 문장으로 끝난다.

     

     “그래. 반역을 위한 준비는?”

     “아버지. 아직 반역은 명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능왕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떡밥은 던져놓았습니다.”

     “아쉽군. 아직은 노스트럼의 공작가라는 건가.”

     “명분이 부족하니까요. 지브롤터처럼 충절에 미친 건 아니지만, 그들은 권력에 미쳐있으니까요.”

     이상할 건 없다.

     “중요한 건 그들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자금이 필요하고, 그들은 그 자금을 적절히 승인해줬습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니까.

     “계획서는 승인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편지를 써주신 덕분에 카르멘 왕비의 허가를 받기 수월했습니다.”

     “음.”

     카르멘 왕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버지가 그녀에게 편지를 쓴 것도 전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한 것.

     “카르멘이 뭐라고 하더냐.”

     “자신을 이용하는 걸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게 연심 아니겠습니까.”

     “카르멘에게 몹쓸 짓을 했군.”

     “하지만 받아주지 않을 거 아닙니까?”

     “당연한 소리.”

     아버지는 다소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으나, 곧 표정을 굳히며 정색했다.

     “내 안에는 오직 샬롯뿐이다.”

     자식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당분간은 모르가니아 공작가와 상호견제를 이어 나갈 겁니다. 대외적인 시선이 필요하니까요.”

     “그들이 과연 우리와 뜻을 같이할까?”

     “공작가가 반드시 노스트럼의 가문일 필요는 없죠.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한, 10년?”

     미래, 카르멘은 노스트럼의 성을 포기하고 모르가니아의 성을 복구했다.

     ‘노스트럼을 버리고 제국의 공작이 되었지.’

     그리고 ‘모르가니아 섭정’으로서, 식민지 노스트럼을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10년 동안 무능왕이 싸지른 온갖 오물을 치우느라 많이 고생했고, 황제의 손을 잡았다.

     “카르멘 왕비,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모르가니아 대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권력입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지.”

     “대신 권력만 유지할 수 있다면, 반정이든 반역이든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스스로 ‘무능왕의 축출’을 결단하지 않는 한.”

     “설마.”

     아버지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쓰레기의 아이를 낳고 뒷바라지를 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축출하려고 했으면 진작에 했어.”

     “그래서 10년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10년이 지나면 뭐 달라지는 게 있느냐?”

     “앞으로의 10년 동안 무능왕이 저지르는 뒷수습에 질려서,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어야겠죠?”

     쐐기는 전쟁 중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혼자서 후방으로 도망을 간 것.

     ‘아내랑 자식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으니.’

     ‘카르멘 왕비를 버리고 나리아 공주에게 수도를 맡겼다’라는 게 결정타가 된 게 사실이다.

     “저희는 저희대로 준비하면 됩니다. 최소한 무능왕을 끌어내려 단두대로 목을 치든, 아니면 제국과 함께 왕도를 짓밟든.”

     “그 준비는….”

     “무력.”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

     “예. 아버지는 강하십니다. 왕국 최강의 소드 마스터시죠.”

     

     그렇게 ‘내가 이미 있는데’라고 시선을 보내봤자.

     “하지만 아버지. 당신께서는 어머니가 인질로 잡히거나 하면, 냅다 전장을 내팽개치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갈 거 아닙니까.”

     “……아니, 그.”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에게는 빈말로라도 ‘둘 다 구해야지’라거나 ‘너희를 구할 거란다’라고 해주십시오.”

     “…….”

     “그래야 어머니도 속으로는 좋아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브롤터가 가진 무력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솔직한 말로, 지브롤터의 무력 중 95%는 아버지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되겠느냐?”

     “예.”

     “97%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는 전쟁을 아직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소드 마스터라는 건 겉치레가 아니야.”

     “예. 하지만 비교는 가능하죠. 백작가 전체의 전력이 300이라고 하나면, 아버지가 9,700인 셈이잖습니까?”

     “음.”

     표정은 바뀌지 않지만, 눈빛에는 뿌듯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아버지. 그건 왕국 내에서의 내전을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죠.”

     “…….”

     “제국의 주력 무기는 무엇입니까. 검입니까? 창? 활?”

     “…이것이지.”

     덜커덩.

     아버지가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다.

     “제국의 마도공학으로 만들어진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무기. 10년 동안 궁술을 갈고 닦은 궁사를 한순간에 머저리로 만들어버리는 파렴치한 무기.”

     철컥.

     “총이 아니더냐.”

     검처럼 길지만, 형태는 길쭉한 원통형의 끝에 손잡이가 달린 물건.

     ‘그립네.’

     머스킷.

     ‘구형인가? 처형할 때 가끔 쏘고는 했는데.’

     제국이 약 10년 전에 개발한 무기로, 지금 이 시점에는 대규모로 양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마도 병기 중 하나다.

     “그레이. 이 물건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머스킷입니다.”

     “아니. 틀렸다. 이것은 매직 미사일 싸개다.”

     “…….”

     틀린 말은 아니다.

     안에 들어가는 탄환은 매직 미사일이 담긴 마력의 구체니까.

     

     “공교롭게도 이따위 물건들을 사용해봐야, 1만 명이 와도 나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마탄이 날아와도 오러로 베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참으로 소드 마스터다운 답변이시네요.”

     “그래. 그런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제국은 협곡을 넘어설 생각을 못 하지.”

     아버지는 머스킷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전력을 더 강화한다면, 저들이 과연-”

     “저희가 연구하고 개발하고 강화해서, 제국에 비싼 값에 팔아버리죠. 몰래.”

     “……?”

     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뭐, 제국은 그냥 농담입니다. 대신 제국산인 척, 밀수품으로 팔아치우는 건 괜찮겠죠.”

     저렇게까지 커진 건 처음 보는데.

     “관문 사다리 정비 사업으로 모르가니아 철광에서 질 좋은 철강이 들어올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예산을 함부로 빼돌리지 못하게 실제 자재로 보급할 예정이죠.”

     나는 책상으로 다가가 머스킷을 들었다.

     “하지만 구름다리 정비에 그만한 철근이 필요할 리가 없잖습니까. 녹슨 부분을 통째로 교체해도 30%는 남을 겁니다. 그러니….”

     “너, 설마.”

     “예.”

     머스킷은 강철로 만들어진다.

     “공사용 철근을 빼돌려, 몰래 무기 개발을 하는 겁니다. 누구도 모르게.”

     “…….”

     “예. 반역이죠. 국고횡령에 더불어, 그걸로 군수물자를 비밀리에 만든다. 심지어 그게 제국의 주력무기. 그런데…반역, 어차피 할 거 아닙니까?”

     철컥.

     “제게 전권을 맡겨주신다면, 우리 백작가가 가진 전력을 배로 올려보겠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하러 가셨을 때, 저와 백작가의 병사들이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무력을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드 마스터 없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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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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