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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기사들은 대부분 귀족 집안 출신이다.

       기사 서임을 받고, 집에서 독립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집안의 원조를 받는 편이 더 좋은 건 당연한 노릇.

       특히 귀족 자제들이란 놈들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산 놈들이다.

         

       심각한 경우에는 제 손으로 몸도 못 씻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는 괴상망측한 응석받이 놈들도 있다.

       뭐, 기숙사 생활이 당연한 아카데미를 다니거나, 기사 생활에 익숙해지면 차츰 그런 경향도 사라지지만.

         

       허나 차츰 나아진다 해도, 응석받이로 평생 살았는데 그게 금방 고쳐질까?

         

       기사가 된 상황에서도 시종을 달고 사는 이들도 많은 것이다.

       보모나 집사가 항시 대기하며 그들이 무언가 불편한 게 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오는 모습이 연출되는데….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를 거다.

         

       특히 이한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고, 솔직히 좀 쪽팔리지도 않느냐며 혀를 차는 경우도 있었다.

         

       한데…….

         

       “허어, 리한이 시녀를 데리고 오다니, 처음 있는 일이군?”

       “복장을 보니 왕실 시녀 같은데? 누군가 하사한 건가?”

       “미모가 대단한 숙녀 분이군, 차라도 한 잔하고….”

       “…네 뒤에 리한 있다.”

       “헉!”

         

       …그 쪽팔린 상황이 자신에게 벌어졌다.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라질.”

         

       이한은 욕지기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저 아름다운 숙녀 분은 누구시더냐?”

       “아름다워? 맹해 보이는 게 아니라?”

       “…좀 노곤해 보이시긴 하는군.”

         

       제이크는 친구가 처음으로 데리고 온 숙녀를 마주하며 이한의 등을 찰싹 때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애인이나 부인도 만들지 않고, 홀로 독신을 고집하는 이한이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던가.

       사실 몸에 문제가 있거나,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

         

       “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왠지 기분 나쁘다?”

       “흠흠, 내가 뭐라고 했다고. 생사람 잡지 마.”

       “…아닌가?”

         

       …귀신같은 놈.

         

       눈치에도 경지가 있다면 오러 유저가 아닐까 싶다.

       제이크는 슬쩍 눈치를 본 뒤, 기사단 훈련장 끝자락에 위치한 잔디밭에 앉아, 노곤한 얼굴로 잠이 들려는 여성을 봤다.

       침도 흐르는 것이 언제 잠들지 모르겠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긴 하는군.”

       “하아.”

       “정말 무슨 사이냐? 네가 고용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냥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둬. 본의는 아니고. 그리고 쟤는 금방 돌려보낼 거야.”

       “흐음. 혹 왕실에서 지명 의뢰가 온 것이냐?”

       “…….”

       “내가 말을 아끼도록 하지.”

         

       제이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실 시녀가 있는 대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한 것인지.

         

       가끔 있다.

         

       왕실에서 기사를 지목하여 명령을 내릴 때가.

       영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며, 무조건적인 비밀로 지켜져야 할 의뢰.

       비록 왕실에서 지목된 것이 부럽고 질투가 들긴 하나, 왕족의 결정에 토를 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족에 대한, 팬드래건 왕가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은 신분관계 없이 모두가 간직하고 있으니.

         

       “잘해보도록 해라. 응원할게.”

       “의뢰가 뭔 줄 알고.”

       “의뢰 말고, 저 아가씨와 말이야. 조금 맹해 보이긴 해도 아름다운 아가씨지 않나, 하하!”

       “…….”

       “응? 왜 갑자기 한기가….”

         

       이한은 이놈을 패버릴까 고민했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도 애인 갖고 싶다, 이 자식아!’

         

       서럽지만 어딜 가서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

       이한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속으로 인견 마냥 울었다.

         

       * * *

         

       레이라 윈터.

       시녀의 이름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인 상황이지만, 이 상황을 만든 못된 아줌마가 미운 거지, 저 맹한 시녀가 미운 건 아니니, 이름 정도는 기억해둬야겠지.

         

       “시녀님, 앞으로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십죠. 그것도 아니면 궁으로 가시던가.”

       “아니에요, 기사님. 그래도 맡은 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해요. 돈 받고 일하는 거잖아요, 헤헤.”

       “…….”

         

       좀 머리가 맹할 뿐이지, 착한 애다.

       나이도 이제 스물 둘.

       색안경을 안 끼고 보면 아주 착실하고 열심히 하려는 기특한 여성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일할 때마다 물건이 하나둘씩 파괴된다는 게 문제지만.

         

       ‘그 아줌마, 혹시 내 살림 다 작살내게 하려고 얘 보낸 거 아니야?’

         

       의심과 확신, 그 어딘가에 머문 미묘함을 느낄 때였다.

         

       “귀여운 아이군. 너한텐 아깝거늘.”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니쇼. 가끔 보면 아재가 더 암살자 출신 같은 거 알아?”

       “소싯적 친구 중에 암살자 놈이 있긴 했지. 내 손으로 죽이긴 했다만.”

       “…….”

       “허허.”

         

       미친 영감 같으니.

         

       살벌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데도 도저히 허풍으로 들리지 않는 게 이 영감의 단점일 거다.

       허나 저 단점조차 누군가는 찬사하며 아첨할 테지.

         

       “웬일로 여기 있대, 오늘은 회의 안 가?”

       “그런 곳을 왜 나 같은 늙은이가 갈까. 젊은 놈들이 알아서 할 테지.”

       “여전히 마이웨이네.”

         

       노인과 같은 백발이지만, 백발에는 촉촉할 정도로 윤기가 감돌았으며, 피부 또한 70대 나이란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탄력이 넘친다.

       몸도 왜소하고 한편으로 별 볼일 없게 보일 수 있으나, 깊은 눈과 몸 주변을 떠다니는 오묘한 기세가 그를 심상치 않게 만들어준다.

         

       만약 이 세상이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 무협지였다면 딱 어울리는 별명은 ‘검선’ 정도가 아닐까 싶다.

       

       발타르 그레이스.

         

       검투사로 시작하여, 당시 왕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되고.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오러 유저가 된 입지적인 기사.

         

       ‘전장에서 발타르를 만나면 도망가라’ -여러 무용담이 어찌나 많은지, 무훈시(武勳詩)마저 있는 전설급 레어 인간이 아닐 수 없으리라.

         

       왕족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 기사가 다름 아닌 그였고, 군부 총사령관 지위를 거부하고 3기사단의 수장을 맡은 괴짜이기도 했다.

         

       …이한의 입장에선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기도 했고.

         

       “진짜 왜 왔어? 평소 기사단에는 방문도 않던 양반이.”

       “흘흘, 네놈이 여자를 데려왔다기에 궁금해서 왔지.”

       “…더럽게 한가한 가 봐.”

       “내가 그럼 이 나이에 일하러 다니랴.”

       “……할 말이 없긴 하네.”

         

       아무리 오러 유저라고 하나, 이미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임은 맞다.

       단지 오러로 육체의 전성기를 오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젊어 보일 뿐이지.

       저게 참.

         

       “새삼 부럽네, 진짜. 부인 또 들였다면서?”

       “부인이 아니라 애인이다. 어디서 유부남 만들려고.”

       “애도 열이나 낳았으면 적당히 인정하지? 그거 주책이야.”

       “몸도 젊으면 마음도 젊은 법. 난 아직 청춘이다, 허허.”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우습게도 생긴 것만 보면 선풍도골이 절로 떠오르는 이 노인네는 생긴 거랑 달리 아주 정력적인 양반이었다.

       부인임이 분명한데 자칭 애인들이 열은 넘고, 애도 열이나 봤다.

       최근엔 증손자가 태어났다지?

         

       한데도 자기가 유부남인 걸 인정 안 한다.

       혼례를 안 올렸으면 무효라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의리도 있고, 아이를 낳아준 여인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한 아버지의 역할도 했기에 충분히 불화가 생길 가정환경임에도 이상하게 화기애애하다고 하니.

         

       …제가 봤을 때 로판 여주니, 회귀물 남주니 하는 녀석들보다 이 양반이야말로 찐 주인공이 아닐까 싶다.

         

       ‘부럽다.’

         

       누군 30년 인생 평생 여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데?

       응? 전생까지 합치면 도합 몇 년이냐고?

         

       …조용히 해라.

         

       “오늘따라 속이 복잡해 보이는구나.”

       “…그럴 일이 좀 있어. 포기하고 있던 무언가를 찾을 기회가 왔는데, 그 과정이 좀 지저분할 것 같아서.”

       “허허, 답지 않게 굴긴. 평소처럼 우직하게 가거라, 그게 너다운 게지.”

       “말은.”

       “흘흘.”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그제야 그의 존재감을 느낀 단원들이 몸이 굳었다.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 이상 그를 눈치채기 힘든 것이다.

         

       “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차례대로 이어지는 진심 어린 경례.

       아마 여기선 발타르를 처음 보는 이들도 있을 터이고,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 한 가득일 것이다.

         

       영물 같은 양반이니, 보는 것 자체가 귀한 셈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는 이들은 모두 공통적인 감정을 드러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동경심’이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설이었던 양반을 본 것이니 자연스레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일동이었고, 특히 이한과 싸웠던 신입 기사 요르드 데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타오르는 듯했다.

         

       실질적으로 왕국 기사의 정점이니, 정통 기사들에겐 당연한 반응일 테지만.

         

       “모두 할 일 하게. 나도 볼일만 보고 갈 터이니.”

         

       하지만 뜨거운 시선이 쏟아진다 하여 그가 관심을 주진 않았다.

       웃는 표정임에도 왠지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

         

       사뭇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는 자는 많지만, 그에게 쉽게 다가가는 자는 없게 하는 원흉이었고, 이한은.

         

       “기술 아껴서 거름 되는 수가 있어. 뭐 그리 대단한 거 가르쳐준다고.”

       “아서라, 나 또한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니.”

         

       발타르, 그는 특이하게도 오러 유저인 양반이 제자 하나 들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심지어 자식들 중 기사가 된 이들이 있는데도, 가르침 한 번 못 받았다고 하니, 그의 괴짜같은 면목을 알 수 있을 대목이리라.

         

       그때.

         

       -나중에 뒤뜰로 오거라, 임명서 하나 줄 터이니.

         

       이한의 귓가를 간질거리는 음성.

       오로지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오러를 이용한 게 아닌, 투기법을 응용한 방식일 터.

         

       다만 투기법을 익혔다고 해도 쉽게 따라하진 못하리라.

       그 정도로 고난도의 기술이니.

         

       그리고 그 정도의 고난도 기술을 겪은 당사자는 감탄과 함께.

         

       “진기명기 구경한 건 좋은데, 그냥 입으로 말합시다, 우리. 남정네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게 썩 안 좋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눈치껏 맞춰줘야지.”

       “소름 돋잖아.”

       “…대화 전에 일단 검으로 대화나 나누지 않겠느냐?”

       “허허, 그건 좋네. 옥상으로 따라 올라와, 영감!”

       “여기 옥상이 어디 있다고.”

         

       스릉.

         

       그의 건방진 도발을 받아들이는 발타르였고, 이한은 기껍기 마지않았다.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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