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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

         

         

         디안 오거스트 경은 강철과 같은 의지로 혐오스러운 자백제의 고통을 이겨냈다.

         

         이자벨은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오거스트 경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녀에게 쌍욕을 퍼부었던 일이나, 이반이라는 사내의 팔뚝을 붙잡고 기사단 회계 장부 기록을 누설하려 들었던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꼴을 보기 힘들었던 이자벨은 곧장 오거스트 경의 얼굴을 후려쳤었다.

         

         이반에게서 핏물을 토해내던 사람의 머리를 가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한바탕 설교를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오거스트 경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음.”

         

         

         이반은 잘 접합된 상처부위를 살핀 뒤에 명료한 진단을 내렸다.

         

         

         “충격으로 퇴행이 왔군. 이자벨. 네가 때린 탓이다. 반성하도록.”

         “오거스트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저거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순 있어요?”

         “걱정 마라. 흔한 증상이니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차릴 거다.”

         

         

         이반은 잠시 바깥을 살피다가 말했다.

         

         

         “하지만 비명을 너무 많이 질러서 이목을 끌었겠군. 슬슬 산 위에 매복하던 자들이 내려올 때가 되었으니 대비를 해야 한다.”

         “오거스트 경은요?”

         “업어야지.”

         

         

         이반은 물끄러미 이자벨을 바라봤다. 이자벨 또한 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제야 이반의 눈짓을 이해한 이자벨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요?”

         “그래.”

         “당신은요?”

         “싸워야지.”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이반은 이자벨을 내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질은 확실히 또래 중에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고작 이런 사건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칼을 쥔 손에선 잔떨림이 그치지 않는다.

         

         

         “그렇겠지.”

         “말이랑 행동이 반대야 이 사람…?”

         “정확히 짚었군.”

         

         

         이반은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객실에 덩그러니 남아버린 이자벨은 곧 한숨을 폭 내쉬며 디안을 등에 업었다.

         

         무겁다.

         

         성인 남성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훈련할 때 사용하던 무게추들이 디안보다 무거웠다.

         

         그러나 이 다치고 약해진 남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공연히 디안을 고쳐 업고 걸어 나오니, 달을 등진 채로 서 있던 이반이 문득 그녀를 돌아봤다.

         

         

         “자질은 나쁘지 않군.”

         “그거 되게 모욕적인데. 아저씨 혹시 저 알아요? 언제 봤다고 우리 말을 놨지?”

         “성격은 모친을 닮은 건가.”

         “와 진짜 칼 뽑게 만드네. 그럼 그쪽 싸가지는 모계유전이에요 부계유전이에요?!”

         “글쎄, 둘 다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서.”

         “그…! 렇…! 구나아…? 그으….”

         

         

         이상하게 젊어 보이는 눈매와 피부였지만, 그녀는 이반의 하악 전체를 덮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을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전쟁이 끝난지 겨우 4년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다.

         

         당연히 저 나이대 사람이라면 전쟁 중에 부모를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부모가 없으면 다야? 부모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되게 실례인 거잖아! 크라실로프에선 아닌가? 저게 그냥 인사말인가? (이런 종류의 부모 안부는 드로안에선 정겨운 인사말에 포함되지만 크라실로프에선 그렇지 않다.)

         

         한참 투덜거리다가, 그제야 그녀는 이반의 말 뜻을 알아채고 화들짝 놀랐다.

         

         

         “저희 아버질 아세요?”

         “글쎄.”

         

         

         이반은 감정이 확확 바뀌는 이 꼬마의 표정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글쎄, 막시밀리앙을 진정으로 ‘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생존자들을 모아라. 불을 피우고, 열차 좌석을 뜯어서 담요로 덮어. 이 땅의 겨울밤은 네 생각보다 혹독할 테니.”

         “불을 피우면 습격은요?”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당신 혼자 나가겠다고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것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막시밀리앙의 딸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반은 다소 의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외모와 재능은 제 아비를 빼닮았는데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군.

         

         분명 막시밀리앙이 밤만 되면 자랑하던 ‘고향의 연인’은 다정다감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사랑이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사람의 결점과 약점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니까. 이반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

        

        

        이반이 학습한 전술 교리에는 이런 말이 있다.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행동하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그 시절 이반은 코웃음을 쳤었다.

        

        실전을 통해 그 문장을 다시 되새기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저 문장의 진의는 이랬다.

        

        최악을 가정하라. 즉, 적은 언제나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공격을 시도해온다.

        

        최선을 행동하라. 이건 즉.

        

        네 적이 너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대라면, 너는 마땅히 그 적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전술을 모방하라.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공격은, 상대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공세가 될 테니.

        

        그렇다면 이반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명확했다.

        

        먼저 가장 끔찍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생존 후 도주 중에 기습당하는 것이 가장 최악이 되겠지. 지연전으로 들어가면 보다 더 심해질 테고.’

        

        

        어두운 밤 속에서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급습은 피로를 가중시킨다. 이반이라면 몰라도 부상자와 어린 꼬마에겐 치명적인 공격이다.

        

        그러니까 최악을 가정한다면. 상대는 반드시 이반과 그 일행이 도주를 감행할 것이라 예상하고 행동하리란 점이다.

        

        상식적으로 누군가의 습격에 의해 열차가 전복되면 그 현장을 벗어나서 지원을 요청해야 마땅하니까.

        

        이제 그 대응법을 고려한다.

        

        

        ‘여유롭다는 듯 시간을 끌고, 상대의 목표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버려둔다. 무력해 보이도록.’

        

        

        이로 인해 미지의 적은 추적을 위해 뿌려두었던 인원을 다시 회수해 와야 한다. 이제 추적에서 포위로 전술을 바꿔야 할 테니까.

        

        이 세계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아카데미물이다.

        

        명령을 ‘입력’한다고 병졸들이 곧장 행동을 ‘출력’하지 않는다.

        

        즉, 추적조를 회수하는 시점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딜레이. 그 순간부터 전술적 층위의 이점을 얻고 시작한다는 의미.

        

        그리고 공세의 입장에서 벌이는 포위란 대개 심리적 여유를 동반한다.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독 안의 쥐라고 여기겠지. 그러니까, 상대는 보다 더 신중하게 공격 타이밍을 잡을 것이다.

        

        추적조를 회수한 시점에서, 혹여라도 목표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최적의 타이밍에 피할 수 없는 일격을 꽂아 넣을 생각으로.

        

        이것이 차선. 상대가 생각할 만한 ‘최악의 공격’이다.

        

        그러니까 모방한다. 적의 최선이 그 자신들에게 있어서 최악이 될 수 있도록. 기습을 준비하고, 신중하게 공세를 가다듬고, 포위를 펼쳐서.

        

        

        “후….”

        

        

        밤그늘 짙게 내려 앉은 깊은 숲 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총을 움켜쥐며.

        

        이반은 고요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짧게 반절 내쉬었다.

        

        나무 아래에서 몸을 도사리고, 호흡을 멈춘 채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서.

        

        어깨와 손 끝이 곧은 직선을 그리도록 조심스럽게. 생체 리듬에 의한 손떨림을 최대한 억누르며.

        

        철컥.

        

        방아쇠울 안에 걸린 검지에서 조준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세 호흡의 모멘텀을 주며 당겨내어.

        

        곧.

        

       -타앙—!

        

        

        권총저격술. 적의 도심지에서 병장기를 은닉해야 하는 절멸부대 요원들이 권총으로도 원거리 공세를 취할 수 있도록 고안한 사격 기법이다.

        

        달빛 아래에 손톱 반 만한 실루엣이 풀썩 쓰러졌다.

        

        재장전을 서두를 필요도 없다. 초탄에 명중했다. 곧 숲 속에 불온한 기색이 감돌았다. 적 또한 이 총성으로 깨달은 것이다.

        

        기습이 시작되었다고.

        

        또한, 그들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절멸부대의 기습이 시작된 거라고.

        

        어두운 밤과 깊은 숲, 익숙한 지형과 손에 익은 알맞은 무기가 있다면.

        

       

        절멸부대의 기습은, 개인이 집단을 포위할 수 있다.

       

       

       

       *

        

        

       -타앙—!!

        

        숲 속 저 멀리에서 격발음이 들렸을 때, 이자벨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명백히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잠결에 놀란 새들이 푸드드, 도망칠 정도로.

        

        그녀의 주위에 모여든 이들은 모닥불 앞에서 덜덜 떨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 이제 다 죽는 거겠죠…?”

        “무서워… 무서워요… 엄마… 엄마아….”

        

        

        제각기 최소한 골절 이상의 부상을 입고 있는 생존자들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그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당혹감과 부담감, 죄책감 속에서 이자벨은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그녀 때문에 휘말린 피해자들이니까. 저 큰 열차에서 생존자가 고작 열댓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용사를 용사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가장 강한 자가 아닌. 가장 용맹한 자이기 때문이다.”

        “오거스트 경? 정신이 드세요?”

        

        

        그녀의 등에 업혀 있던 오거스트는 어딘지 멍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사가 되어선 안 된다. 되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거스트 경…?”

        “우리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약자의 눈으로, 우리와 같은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검을 드는 이유는 우리가 용맹해서도, 우리가 강인해서도,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거스트의 목소리엔 여전히 이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명료하고 정확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그녀의 마음 속에 새겨 넣으려는 듯이.

        

        

        “우리가 검을 드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르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할 대의를 위하여. 따라서, 우리가 검을 드는 것은, 여느날 빈자에게 기부하고, 때때로 다친 자를 부축해 일으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르기 때문이다.”

        “오거스트 경….”

        “그러니, 검을 들라. 그대, 용사가 되려 하지 마라. 탈레스의 기사여. 그대는 용맹이 아닌 겸허함으로 이 자리에 서 있으니.”

        

        

        이제 그녀는 디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그리고 굉장히 전통적인 방식의 기사 서훈 과정이다.

        

        군주가 그 가신에게 내리는 ‘작위’로서의 기사가 아니라.

        순례자 집단으로서의 기사단이, 그들의 종자에게 내리는 마지막 교훈이다.

        

        디안 오거스트는 전통적인 기사단 출신 인물이었고, 이지를 잃어버린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 가장 인상깊게 남겨져 있는 말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대는 대의를 위해 검을 들라. 선을 행함이란 언제나 사소하고 마땅한 일이니. 그대는 그대의 힘이 아닌, 그대의 선의를 위해 검을 들라. 이제, 그대의 이름은 기사다.”

        

        

        디안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약해진 호흡만 내뱉을 뿐.

        

        이자벨은 디안의 경력을 알고 있다. 이 사내는 마왕군과의 전쟁 시절부터 복무해왔던 관록 있는 중견 기사다.

        

        그런 기사가, 아마도 십수년 전에 단 한 번 들었을 문장이 어떤 왜곡이나 곡해 없이 이토록 명료하게 남아있는 이유를, 이제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으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침내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위와 공포, 고통과 허기에 시달리는.

        

        그녀로 인해 내몰린 이들이.

        

        죄책감은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이제는.

        

        

        “그리 하겠습니다.”

        

        

        천천히 디안을 내려놓고서, 이자벨은 이들 앞에 올곧게 섰다.

        

        그녀의 손에 쥐인 검은 그 전보다 무겁게 느껴졌지만, 방금까지 떨리고 있었던 손은 지금 이 순간 침착하게 잦아들어 검의 그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선 샛별이 타오르고 있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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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설) 이반은 패드립에 면역이다.

    아 이거 한 번에 이어써야 되는데 하필이면 2화 제한이 딱 걸려있네요! (변명임)

    그 김에 그럼 쓴 분량 좀 가다듬어서 저녁에 돌아올게요!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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