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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혹시 직업이 있으신가요?”

       

       “⋯⋯⋯⋯.”

       

       센트라의 폐부를 찌르는 일격에 2황자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아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제국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특히나 머리카락이 금발인 분은요.”

       

       제국민, 그중에서도 황실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 가해지는 박해. 

       

       고작 3일간이었지만 이리드는 질리도록 겪었다. 신분이 날아갔더라도 이리드는 고급 인력이다. 황자라는 신분은 권위만큼이나 많은 배움이 요구되는 자리이니까.

       

       문무서예, 승마와 사냥, 상당한 전투력과 제국 법령에 대한 빠삭함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박해는, 발버둥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도 앗아갔던 것이다.

       

       이리드는 본래의 세상에 대해서 떠올렸다.

       

       제국은 제국에 필요한 막대한 노동력을 노예에게서 충당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신분을 노예로 바꾸기도 하지만, 노예와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역시 노예로 삼았다. 

       

       지금까지는 노예 법령에 대한 잔혹함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제국의 노예제도는, 그리고 다른 종족에 대한 차별은 생각보다 많은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여관에서는, 음⋯⋯ 일자리 알선? 을 해 드리고 있거든요.”

       

       “⋯⋯일자리를?”

       

       “네! 이리드처럼, 노예가 아니지만 자유민으로 대우받지 못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이 모인 자그마한 단체가 있어요. 부끄럽지만, 제가 그 단체를 이끌고 있고⋯⋯. 혹시 이리드가 괜찮다면?”

       

       

       “나는 반대야.”

       

       “로냐!”

       

       여자 용병 로냐가 끼어들어서 어깃장을 놓았다. 그녀는 삐딱한 시선으로 이리드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얼간이들은, 적어도 신원증명이 됐어. 하지만 저 녀석은 아니지. 네가 밥 먹이는 사이에 뒷조사를 해 봤다.”

       

       “⋯⋯⋯⋯.”

       

       “없어. 과거의 흔적이 전혀. 다른 도시까지 발을 뻗고 있는 녀석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샛노란 금발에 이리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영락제(零落帝)밖에 모른다더군. 저 녀석,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아.”

       

       실제로 그랬다. 그는 마법사의 차원 이동 마법을 통해 100년 뒤의 미래에 떨어졌다. 

       시간을 넘어 나타났으므로 말 그대로 연고 없는 몸, 신원을 증명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리드는 손목의 문신을 확인했다. 스튜를 먹고, 간만에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내는 등의 사치를 누리며 반나절이나 지난 참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5일 하고도 반.

       

       여관의 온기,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이 올려다보는 센트라의 눈망울. 시선에서 전해져오는 온기. 다시 한 번 손을 잡아주려는 듯 꼼지락거리는 센트라의 손.

       

       이리드는 여관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온통 쌀쌀함 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리드는 팔짱을 끼고 로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충격의 연속에 마음은 꺾였지만, 그렇더라도 수십 년간 몸에 밴 동작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오만한 황족의 흉내를 냈다.

       

       “서류를 하나 가져와 봐라.”

       

       “⋯⋯뭐?”

       

       “여관 장부, 계약서, 정책 입론, 뭐든 좋으니까 서류를 한 장 가져와 봐라. 내 필요성은 그걸로 증명해주지.”

       

       “야, 너는 지금 의심 받고 있는 거야. 수상한 놈한테 서류를 맡길 놈이⋯⋯.”

       

       “3일간 두드려 맞으면서 일자리 하나도 구하지 못한 수상한 놈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신원의 불확실함과, 개인의 능력과 품성은 별개다. 맹세하지, 센트라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네 말을 믿을 이유가⋯⋯!”

       

       이리드는 몸을 돌려 빠르게 로냐를 손절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을 하는 사람에게는 설득이 먹히지 않는 법이다. 타겟을 바꿨다. 대신 센트라를 마주보고⋯⋯ 

       

       살짝 빗겨서 보고 말했다.

       

       “어떤가?”

       

       “좋아요! 마침 검토해야 하는 계약서가 하나 있었거든요. 하수도 청소 용역인데, 혹시 문제가 있는지 봐 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

       

       “야! 무시하지 마!”

       

       

       이리드는 센트라에게서 계약서를 받아든 후, 5분만에 세 개의 독소조항과 여섯 개의 오탈자, 한 개의 표준 고용 양식 위배를 찾아냈다. 

       

       다시 5분이 지난 후에는, 계약서 수정안이 세 개나 나왔다.

       

       제국의 황제란 드넓은 제국의 온갖 대소사를 해결해야 하는 자리. 당연히 황자에게는 괴물같은 서류 검토 능력이 요구된다. 혹은, 서류 검토 능력이 뛰어난 충신이 있거나. 

       

       세력이 약세하여 인재가 부족했던 2황자는 스스로 서류 검토 능력을 높일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100년 후의 미래에서 마침내 빛을 발했다.

       

       “⋯⋯이건.”

       

       “우, 우와아⋯⋯.”

       

       깐깐하고 퉁명스러운 로냐가 트집 잡을 거리를 만들기 위해 뚫어져라 서류를 바라보았지만, 용병과 황자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지적 격차가 있었다. 

       

       두 사람의 놀란 반응에 이리드는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제국 운영하라고 배운 기술로 하수도 청소 용역 계약서를 만지는 게, 그리고 그걸로 뿌듯함을 느끼는 게 맞는 일인지 혼란스러워졌다.

       

       20년간 키워 온 황자의 자존심과 3일 만에 태어난 소시민의 인정욕구가 충돌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혼란도, 센트라가 손을 잡아오면 말끔히 잊혔다.

       

       “흠흠, 고용할게요!”

       

       “잘 부탁하지.”

       

       두 사람의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

       

       이리드가 서류 처리 업무를 맡게 되고 3일이 지났다. 

       

       아침에는 침대에서 ─이리드는 평민들이 침대 매트리스 대신에 지푸라기를 쓴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일어나, 센트라가 차려 주는 스튜를 먹고.

       

       틱틱대는 로냐의 옆에서 각종 서류 처리를 하고.

       

       센트라가 이따금 사람을 주워 오면 노려보기도 했다. 로냐도 옆에서 그러고 있었다.

       

       서류 업무는 많았지만, 황자 레벨에서는 적은 양이었다. 쌓여 있던 서류의 산은 이리드의 작업속도에 모조리 갈려나가 몇 장 남지 않게 되었다.

       

       한가해졌고, 남는 시간에는 간단하게 산책을 하거나.

       (밖으로 나가기에는 무서워서 여관 안을 걸었다.)

       

       거의 자주 센트라, 때때로 로냐와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요즘에는 손목의 시계 문신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센트라는 그 모습을 보고 ‘벌레라도 물렸나요? 약 발라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 문신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시계 문신의 눈금은 1에서 0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2일 하고도 절반 남짓이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뭔데 죽상이야?”

       

       “⋯⋯아니, 아무것도.”

       

       “그 표정을 하고서 아무것도? 거짓말은 배운 적 없나보지, 이리드?”

       

       “네 알 바가 아니다.”

       

       “이 새끼가.”

       

       

       센트라에게는 알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틀 후에 자신이 먼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하지만 만약⋯⋯ 자색 마탑주의 제자가 차원이동 마법이 경지에 올랐다면. 

       

       같은 세상 속에 자신을 돌려놓을 수 있는 거라면. 작별 인사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허름한 여관방에서 온기를 나누고 싶을 때, 그에게 차원이동을 부탁하면 될 테니까.

       

       차원마법에 대해서 조금 더 들어뒀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남았다.

       

       센트라는 여관에 손님이 없을 때면 빈번히 자리를 비웠다. 가끔 여관을 찾는 금발 섞인 노동자들이 ‘센트라 님은 오늘도 나가셨습니까?’ 하고 찾는 걸 보면 원래 자주 나갔던 모양이다.

       

       “야, 영락제.”

       

       “뭐냐, 용병.”

       

       이제는 로냐가 내뱉는 상시 모욕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영락제 세 글자만 들으면 머리가 시큰거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만, 배우지 못한 천것이 떠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나았다. 

       

       “심부름 하나 시킬 테니까 다녀와.”

       

       “내가 계약한 건 센트라지 네가 아니다.”

       

       “센트라 마중 나가라고.”

       

       “어디로 가면 되나?”

       

       “⋯⋯⋯⋯.”

       

       

       자신도 모르게 너무 칼같이 대답해서 이리드는 스스로에게 머쓱했다. 

       

       “⋯⋯이래서 불알 달린 새끼들은. 야, 동부 모험가 길드 옆에 사거리 쪽으로 나가 봐. 식재료 사 온다고 했으니까 가서 거들어.”

       

       “그러지.”

       

       이리드는 거적때기를 꼼꼼하게 뒤집어 써서 금발을 가렸다. 센트라가 깔끔하게 세탁해 줘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찬장에 놓인 대형 바구니를 집어들고 나갈 준비를 마치자, 로냐가 나지막히 운을 뗐다.

       

       “야, 근데 말이야.”

       

       “시킬 일 있으면 나가기 전에 말해라.”

       

       “아니, 뭐⋯⋯. 마음의 준비나 해 두라고. 곧 있으면 건국제잖아?”

       

       “건국제?”

       

       “그래, 왕국 연맹이 제국으로부터 승전한 날을 기념해서 축제가 열려. 이틀 뒤에 말이야.”

       

       “⋯⋯⋯⋯.”

       

       공교롭게도, 이리드가 귀환하는 시간과 같았다.

       

       “건국제가 지나간 뒤에는 센트라 보기 힘들 거야.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거거든.”

       

       “무슨 시대지?”

       

       “당연히, 맥주와 고함의 시대지. 다녀 와.”

       

       

       로냐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리드는 그동안 처리한 서류들을 떠올렸다.

       몇몇 서류에는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 물류가 빼돌려지고, 병장기로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모이는 느낌.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굳이 수고를 들이지는 않았다.

       

       이리드는 이방인이었고, 곧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이 아늑한 여관이 레지스탕스 활동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묻어두기로 했던 것이다.

       

       ===============================================================

       

       이리드는 제국의 수도였던 크라운홀을 걸었다.

       

       자주 시찰을 다녔던 만큼 지리에는 빠삭하다. 뒷골목의 온갖 지름길을 머릿속에 꿰고 있었으므로, 덕분에 수많은 위협에서 몸을 지킬 수 있었다.

       

       퇴역 군인이라던가, 수상할 정도로 포위망을 좁혀 오는 귀부인 같은 것 말이다.

       

       금발을 숨기고 당당하게 걸으니, 그 누구도 이리드를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로냐가 말했던 모험가 길드 옆으로 가서 센트라를 기다렸다.

       

       “⋯⋯?”

       

       타닷. 탁.

       

       바쁜 뜀박질 소리. 누군가가 도망치고 있는 걸까. 이리드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방향과 주변의 지리를 계산한 뒤, 누군가의 도주 루트를 머릿속에서 그려냈다.

       

       소동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저 도주자가 살인범이라면. 그리고 센트라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신경이 쓰여, 이리드는 벽을 넘어갔다.

       

       도주 루트의 끝자락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곧 나타날 것이다. 3, 2, 1⋯⋯.

       

       “으왓!”

       

       도주자는 길목을 가로막고 선 이리드를 보고 깜짝 놀라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복장. 검고 윤기가 도는 재질로 전신을 타이트하게 감싸,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이었다. 

       

       전신 타이즈였다.

       

       기능성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몸매를 완연히 드러내다니 수치심이 없는 걸까. 이리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괴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센트라였다.

       

       “⋯⋯센트라?”

       

       “그, 이건, 이건요. 일단 도망치고 생각해요!”

       

       “그 쪽은 동선이 좋지 않다. 나를 따라와라. 경비병을 따돌리려면 이 방향이 나아.”

       

       “⋯⋯알겠어요!”

       

       이리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벼락을 넘어갔다. 몸매의 주인이 센트라라는 것을 인지한 이상, 차마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눈을 감았다가 뜨니까 조회수가 복사가 되고, 후원이 쏟아지고⋯⋯.

    아마 제가 환상 마법에 당한 것 같습니다. 마이 프렌즈.

    많은 관심에 점핑 큰절 한 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폼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충분한 재미로 보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정성을 다해서 쓰겠습니다. 100%를 다하겠으니, 부디 지켜봐 주십시오.

    제 글이 여러분에게 기쁘게 다가갈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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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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