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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좋은 아침이에요!”

       

       1층으로 내려와 기세 좋게 외쳤건만, 어째 엘리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우어….”

       

       카운터 위에 엎어져 반쯤 녹아내린 엘리.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힘든 건지, 쫑긋 서 있던 귀도, 느릿하게 흔들리던 꼬리도 지금은 추욱 늘어져 있었다.

       

       “엘리가 죽었어…?”

       

       “으게에엑.”

       

       어깨를 콕콕 찔러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엘리의 좀비 같은 목소리뿐.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으앗! 술 냄새…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 

       

       기겁하며 물러나는 나를 향해 손가락 2개를 펼치는 엘리.

       

       “네? 2병 마셨는데 그렇게 된 거라고요? 의외로 술에 약한가 보네요.”

       

       “아냐….”

       

       여전히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갈라진 목소리로 내 추측은 정정해 주었다.

       

       “아하? 그 이후로 2시간은 더 퍼마셨다는 거였군요! 뭐…2시간이라도 페이스 조절 없이 마시면 그렇게 되는 거죠. 생각해 보니 어제 담배도 많이 폈잖아요. 괜찮은 거 맞아요?”

       

       “그, 것도 아냐…그리고, 안 괜찮아….”

       

       엘리의 안색은 어느새 창백해져 있었다. 아니, 그럼 대체 저 손가락은 무슨 의미란 말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래라면 카운터 뒤쪽에 빼곡히 들어차 있을 술병이 텅텅 비었다. 남은 거라고는 비싸 보이는 술 2병뿐.

       

       설마 2병 빼고 다 마셨다는 소리인가? 그건 좀 무서운데.

       

       “엘리…술집 사장이 술을 다 마시면 어떻게 해요?”

       

       “요나 너도 어른이 되면 알 거야…취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지금은 이런 몸이지만 지구에서는 어엿한 성인이었는데.

       

       그래도 어깨를 으쓱이며 엘리의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에휴. 이러니까 어른이란! 대체 술은 왜 마시는 건가요?”

       

       “잊고 싶은 게 있으니까?”

       

       “뭘 잊고 싶은 건데요.”

       

       “그러게. 뭐였을까. 까먹어버렸네.”

       

       숙취로 죽어가면서도 실실대는 엘리.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 또한 픽 웃어버렸다.

       

       “바보네요 어른이란.”

       

       “바보란 말이지 어른이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엘리에겐 나름 중요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두운 표정은 처음 봤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나도 판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포기한 게 있다. 글 또한 그중 하나였고.

       

       전생에는 못 쓰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 한번 죽고 나니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등질 줄이야.

       

       뭐, 먹고살기 바쁜데 한가하게 글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판 대륙에서 내가 구상한 설정을 발견할 때마다 지구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장소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문득 생각하고 만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진탕 취하고 싶다고. 전생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린 채, 마음 편히 디비 자고 싶다고 말이다.

       

       딱히 멸망이 예정된 세상도 뭣도 아니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래저래 말이 길어졌지만, 요는 과한 감정은 인간을 펑크낸다는 소리다. 아마 엘리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게 아닐까?

       

       숙취 때문인지 일어나자마자 마력초 담배 하나를 꺼내 문 엘리. 그녀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지다 멈칫한다.

       

       “어라? 라이터가 어디갔지. 혹시 내 라이터 본 사람 있어?”

       

       “…라이터는 모르겠지만 엘리에겐 제가 있어요!”

       

       호다닥 달려가 미약한 불로 엘리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내가 이렇게 책임감 넘치는 돚거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무는 엘리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른하게 늘어진다. 마력초의 진통 효과가 듣기 시작한 거겠지.

       

       한결 편해진 엘리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잠깐 상업지구 쪽에 다녀올 생각이라 점심은 따로 먹을게요.”

       

       “…점심까지 챙겨준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그래도 제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면 만들어 주실 거잖아요?”

       

       “…….”

       

       아무 말 없이 연초만 피워대는 엘리. 그런 그녀의 모습에 히히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절반쯤 나갔을 무렵. 뒤에서 엘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요나를 믿어보기로 했어.”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설마 지금까지 못 믿고 있었다는….”

       

       “그냥 그렇다고. 갈 거면 빨리 가라. 머리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말고.”

       

       억지스러운 축객령. 이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오냐.”

       

       쥐뿔도 없이 홀로 떨어진 판 대륙. 하지만 이젠 돌아올 곳이 생긴 것 같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

       

       어제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닌데 하루 쉬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미궁에 다녀온 것 아닌가. 쉬면서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좋았는지 복기할 시간을 준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따로 준비하라고도 했고.

       

       즉, 재정비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 경우에는 이번에 왕창 뽑힌 마력초와 회복초를 적당한 연금술사에게 맡겨 영약으로 제련할 생각이었다.

       

       …그 돈은 죄다 가챠에 꼬라박았지만.

       

       하여 엘리 모르게 라이터 마도구를 빌린 것이다. 꽤 비싸 보였으니 팔아치우면 의뢰비를 지불하고도 꽤 남을 테니까.

       

       다만, 내게도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모르는 사이에 뭔가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 같은 엘리. 그런 그녀에게 믿는다는 소리를 들은 게 겨우 10분 전인데 어떻게 엘리의 라이터를 휙휙 팔아버리겠는가.

       

       “그러니까 전당포에 맡기자.”

       

       나중에 되찾으러 오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이렇게 사려 깊고 따뜻한 남자다.

       

       콧노래를 부르며 판그레이브 광장 구석의 작은 전당포에 들어갔다. 

       

       엘프가 운영하는 가게답게 내가 누구고, 어떤 물건을 가져왔는지는 상관없다는 듯 사무적으로 감정을 시작하는 것이 퍽 마음에 든다.

       

       “5실버. 단, 앞으로 다른 전당포 말고 이곳만 이용하겠다고 약속하면 50쿠퍼를 더 쳐주마.”

       

       “좋죠!”

       

       아무리 고급스런 마도구라지만, 기껏해야 불을 붙일 뿐인 최하급 마도구다. 그리고 여긴 마법사가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몰려드는 미궁도시고.

       

       파는 것도 아니고, 담보 삼아 돈을 빌리는 건데 5실버인 것도 많이 쳐준 거지. 근데 거기에 50쿠퍼를 더 얹어준다니?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라는 걸 알지만, 어쨌든 지금 들어오는 돈을 마다할 이유는 없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사실 이 엘프가 후한 조건을 내건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단순히 좀 더 많이 빌려주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그렇게 주변 전당포와의 경쟁에서 이기면 100년 뒤에는 자신이 독점할 게 뻔하니까 넉넉하게 빌려주는 거지.

       

       거기에 많이 빌려준다고는 하지만, 여차할 때 저 라이터 마도구를 5실버 50쿠퍼 이상의 가격으로 팔 자신이 있으니까 제시한 금액일 거다.

       

       모험가가 픽픽 죽어 나가는 미궁도시에서 전당포는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직업으로 유명하니까.

       

       “이래서 비즈니스 상대로 엘프가 좋단 말이지.”

       

       나름의 꿍꿍이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느긋한 이야기라 나한테는 이득밖에 없잖은가. 엘프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든든해진 지갑의 무게에 절로 흘러나오는 싱글벙글한 미소. 미리 봐둔 연금술 상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걸 넘어 흥겹게 느껴진다.

       

       멸신전쟁 때 세계수를 잃은 후. 한동안 엘프는 극도의 정신적 공허함에 시달렸다.

       

       세계수는 부정할 수 없는 신적 존재였지만, 다른 신들과는 그 영역이 조금 달랐거든.

       

       가장 처음 이 땅에 뿌리 내린 나무이자, 가장 오래된 생명으로서 그저 존재할 뿐인 경이.

       

       대단하긴 하지만 별다른 역할이 없던 그냥 큰 나무. 그런 세계수에게 색을 부여한 건 세계수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엘프들이었다.

       

       왜. 흔히 있잖은가. 경이로운 자연물을 신처럼 떠받드는 원시적인 애니미즘 사상.

       

       엘프들은 세계수를 신처럼 여기며 극진히 떠받들었고, 덕분에 아무리 대단한 생명력을 지녔다지만 평범한 나무에 불과했던 세계수에 자아와 신성이 깃든 것이다.

       

       그러한 태생 덕에 세계수와 엘프 사이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단한 정신적 연결이 형성되었고, 이 유대를 바탕으로 느리지만 착실히 발전해 나갔으나….

       

       멸신전쟁 막바지. 세계수는 엘프와 그들이 살아가는 이 땅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그렇게 둘의 연결은 끊어졌고, 정신적 지주를 잃은 엘프는 오랜 시간 방황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방황이란 언젠가 끝나기 마련. 미궁의 힘으로 빠르게 재건되는 판 대륙의 모습에 주저앉아 있던 엘프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계수가 없는 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엘프들은 깨달았다.

       

       이미 그들에겐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있다는걸.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신의 이름은….

       

       ‘자본주의’였다.

       

       한번 박 터지게 싸우다 멸망할 뻔한 인류는 전쟁의 참혹함을 학습했다. 덕분에 대규모 분쟁이나, 종족 단위의 차별 같은 것은 대부분 사라진 상황.

       

       미궁이 존재하는 만큼 무력은 여전히 가치 있는 힘이지만, 재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리라.

       

       돈! 오직 돈만이 엘프를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

       

       그 사실을 알아챈 엘프는 법이 허락하는 선에서 온갖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오랜 수명을 이용해 정략혼과 사별을 반복하여 가진 땅과 재산을 늘린다거나.

       

       시간이 지나 물가가 오르면 무조건 이득을 본다는 점을 노려, 300년 장기 투자 같은 짓을 벌인다거나.

       

       그렇게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당장은 좀 손해 보더라도, 가격 경쟁에서 승리해 주변 상권을 독점하는 등.

       

       야금야금 판 대륙의 금권을 움켜쥐기 시작했고,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대륙 최고의 적폐 종족이 될 것이다.

       

       “으음….”

       

       조금 생각이 길어지긴 했지만, 겨우 전당포에서 돈 좀 빌렸다고 갑자기 머릿속을 뒤져 엘프의 설정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다.

       

       요는 엘프는 돈에 진심이지만, 어차피 시간 지나면 이득 볼 걸 알기에 엔간하면 합법적인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엘프 범죄자는 지극히 드물다. 만약 있더라도 그건 암흑계를 주름잡는 거물급 정도?

       

       이만한 메리트가 없다면 굳이 범죄에 손을 댈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종족이니 당연한 일.

       

       덕분에 인파 속에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엘프 특유의 미모를 타고났음에도 껄렁함이 묻어나오는 저 뒤통수를.

       

       “그때 그년들인가.”

       

       내가 아직 가챠 시스템을 깨닫기도 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걸하다가 엘프 양아치를 만난 적이 있다.

       

       예쁜 얼굴에 혹해서 쫄래쫄래 따라갔더니, 힘들게 구걸한 돈을 전부 삥뜯더라고.

       

       그날 다짐했다. 이 수모는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겠노라고.

       

       “드디어 기회가 왔군.”

       

       정신을 집중하며 발뒤꿈치를 살짝 띄웠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티 나지 않게, 하지만 발소리는 확실히 줄어들도록.

       

       그리고는 작은 체구를 이용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얼핏 보면 그저 어린아이가 필사적으로 인파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모습이겠지.

       

       그렇게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접근한 끝에 목표의 바로 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네. 저 둘, 내가 하루 종일 구걸해서 번 8쿠퍼를 뜯어간 극악무도한 강도 년들이다.

       

       그 정도면 곰팡이 피기 직전의 싸구려 빵 하나 살 수 있는 돈인데!

       

       은혜는 2배로 원한은 10배로. 남의 집 가훈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당요나라고 불러다오.

       

       자연스레 다가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에서 호흡을 멈추고, 주변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극도로 옅어지는 기척.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배경의 일부가 되어 모든 것을 공중에서 부감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연스레 손이 움직였다.

       

       스윽.

       

       눈으로 쫓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뻗어나간 손이 두 엘프 년의 주머니 속을 왕복한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내 주머니.

       

       …쉽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완벽한 위치이동. 속으로 마구 자화자찬하며, 몸을 옆으로 빼냈다. 결국 인파에 밀려 가장자리 길로 튕겨 나가는 것처럼.

       

       지갑만 남겨두고 멀어지는 엘프 강도 년들의 뒤통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게 참교육이고, 이게 계도지….

       

       한껏 업된 기분으로 가던 길을 가려던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턱.

       

       “요나. 주머니에서 손 빼.”

       

       “아이에에에에에!!!”

       

       리디아?! 리디아 어째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재에 성공한 저를 칭찬해주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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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Score 8.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Gacha – Civilization’s Ultimate Game. Spin now for a shot at fortune. Spending that doesn’t disrupt your lifestyle? That’s virtually free-to-play. Keep spinning until you strike gold – success is guaranteed. … … Today, yet again, I’m at the gacha wheel. “Did I get a 5-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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