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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 * *

       

       

       

       차리친의 방어를 맡은 스탈린은 죽을 맛이었다.

       

       그야 군사적 열세가 분명하니까.

       

       그 잘난 참호가 순식간에 밀리고 있다.

       

       더군다나 이쪽은 징집한 농민이 주 병력이었다.

       

       제정 시절 장교나 장군들은 황녀가 이끄는 백군 때문인지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각종 군수물자를 황녀에게 던져 주고 있고. 미국은 극동을 통해 백군에 식량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

       

       제아무리 잘난 스탈린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방어하는 것도 힘이 들다 못해 밀리게 생겼다.

       

       벌써 볼가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동지. 보로실로프 동지께서 반동들의 맹공이 매우 거세다고 합니다. 이미 참호선이 뚫렸습니다!”

       

       

       올라오는 보고는 하나 같이 절망적이었다.

       

       어느 한쪽은 겨우 막았다. 뚫렸다. 그런 내용뿐.

       

       애초에 도시 하나라 지금, 이것도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다음은 시가전이라 할 수도 있겠지.

       

       

       “빌어먹을 영프놈들. 반동들을 돕다니. 역시 같은 제국주의자란 거겠지.”

       

       

       스탈린은 주먹으로 벽을 치며 이를 갈았다.

       

       실제 역사에서도 영국의 전차 사단이 백군을 지원하여 적군은 상대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곳을 지켜냄으로써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의 백군이 연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뒤바뀐 역사에서는 아나스타샤가 구심점이 되어 버리면서 많이 바뀌었다.

       

       남러시아의 안톤 데니킨은 지금은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흑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

       

       극동의 먼 거리를 통해 전차의 지원을 받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아나스타샤가 열강의 지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받으려면. 남러시아와 연계를 할 수 있는 차리친을 탈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려고 했다.

       

       스탈린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사정이 너무 안 좋다.

       

       빌어먹을 트로츠키. 차르 일가를 차라리 인질로 삼아버리든가. 왜 그놈이 저지른 일로 자신까지 피해를 봐야 하는가.

       

       

       “스탈린 동지.”

       “방어선이 뚫린 거 말고 할 말이 더 있나?”

       “아나스타샤 여대공 황녀가 직접 반동 진영에 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스탈린의 두 눈에 힘이 확 돌았다.

       

       황녀가 반동 놈들 진영에?

       

       그러면 역시 황녀가 진짜 수괴였던가.

       

       역시 뭔가 수상쩍다 했다.

       

       

       “백군 놈들이 왜 저리 날뛰는지 알만하군. 황녀의 존재만으로 사기가 진작한다는 건가.”

       “예.”

       

       

       이쪽은 그럼 레닌 동지라도 와야 할 터인데.

       

       지금 소련은 바람 앞의 촛불같은 신세다.

       

       겨우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으나, 세계에서 고립된 처지다. 하다못해 내전이라도 빨리 끝내고 내치라도 다스려야 하는데.

       

       당장 방어전을 해야 하는 처지라니.

       

       

       “우리도 반동들의 수괴가 나타났으니, 오를 만한데.”

       “그것과 별개로 군사적 열세는 분명합니다.”

       “빌어먹을.”

       

       

       트로츠키 놈에게 차르일가 처형한 책임을 다 뒤집어씌우고, 예카테린부르크의 공격도 실패해서 이번 방어전만 해내면 승리할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사정이 영 좋지 못했다.

       

       제국주의자 놈들이 뭘 잘못 처먹었는지, 전쟁을 멈추고 볼셰비키를 때려잡겠다고 황녀를 지원하고 있다.

       

       차라리 외국군이라도 지원을 왔으면 황녀를 매국노로 몰아 어떻게 선동이라도 해볼 터인데. 무기밖에 지원받지 않고 있으니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황녀의 개혁으로 여러 의미로 지금 볼셰비키의 사정은 좋지 못하다.

       

       

       “어.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지.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하네.”

       

       

       제 부모와 형제가 눈앞에서 처참하게 도륙당해서 눈이 돌아간 황녀가 복수심에 미쳐 맹렬히 볼셰비키를 공격해 오고 있다.

       

       그래. 그 정도라면 악에 받쳐 모스크바로 진격이라도 할 기세겠지.

       

       스탈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쯧. 차르 일가를 처형한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볼셰비키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앞에서 죽이고, 황후와 황녀들은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능욕해 죽였다는 소문. 그것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지.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더 다채롭게 변했지만, 스탈린은 현지 체카요원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도 생각은 들었다.

       

       워낙 차르일가에 화가 난 민중이 많았어야 말이지.

       

       하지만 그 바람에 혼자 살아남은 황녀가 각성해 버렸다.

       

       죽일 거면 한 번에 다 잡아 죽이든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서 이 모양이 되겠나.

       

       차라리 정말 차르일가 전체를 전향시키는 게 나았지.

       

       지원군이라도 와서 황녀의 뒤를 공격해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다못해 트로츠키 꼴을 면하려면 이쪽은 공이라도 세워야 하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오늘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쓸모없기는.

       

       그래. 꼬락서니를 보니 무너지는 것이 너무 빨라 모를 만하다.

       

       이래서야 참. 트로츠키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장대한 계획이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뒷날을 봐야 하는데, 친해진 보로실로프를 버려야 하나.

       

       지금 당장은 사는 게 우선이다.

       

       저 포위는 어떻게 뚫는다는 말인가. 당장 방어선도 형편없이 밀리는데, 독기를 품은 황녀의 군대를 대체 뭐로.

       

       

       “그 스탈린 동지!”

       

       

       이제는 한술 더 떠 보로실로프가 직접 왔다.

       

       스탈린은 이쯤에서 목을 매 죽어야 하나 아주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쯤 되니 그저 넉살 좋은 웃음만 흘렀다.

       

       

       “보로실로프 동지. 이제는 뭐 황녀가 우리를 때려잡기 위해 반동들을 끌고 도시로 밀려오고 있다고 하나?”

       “탈출함이 어떻겠나?”

       

       

       탈출이라 탈출 말이 좋지.

       

       그게 가능하겠나. 지금 사방이 포위되어 있다.

       

       말이 남러시아와 시베리아 백군의 연계를 막는다는 거지. 이미 저들은 포위하면서 서로 연계하고 있다.

       

       볼가강 유역까지 밀리고 도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치면 이건.

       

       대체 어디로 탈출한다는 말인가.

       

       물론 적군들을 앞세워 탈출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하면 예카테린부르크에 처박고 말아먹은 트로츠키 꼴이나 다름이 없다.

       

       여기서 죽기는 싫지만, 최대한 체면치레라도 해야 할 생각이었다.

       

       

       “동지는 지금 저 반동들에게 도시를 넘겨 주자 뭐 그런 일인가? 여기서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는 없네.”

       

       

       애초에 포위된 상황에서 도망은 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북쪽에 퇴로가 있네!”

       

       

       북쪽에 퇴로가 있다고?

       

       압도적, 질적으로 좋지 못한 적군을 데리고 지금까지 방어하는 것도 기적인데 북쪽에 퇴로가?

       

       애초에 북쪽이라면 예카테린부르크 백군놈들이 있을 텐데?

       

       대체 저 반동들이 무슨 생각인가.

       

       머리를 굴려보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면 아직 포위가 완전하지 않은 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 살 수 있다면 살아야지. 살아야 혁명을 완수하든 레닌의 뒤를 잇든 한다.

       

       그럼 도망칠 명분이 있어야 한다.

       

       

       “애초에 트로츠키가 예카테린부르크를 제압하지 못한 시점에서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네!”

       

       

       과연. 보로실로프가 바라던 말을 해주었다.

       

       그래. 이건 다 트로츠키 탓이다.

       

       트로츠키 때문에 지금 자신은 이런 굴욕을 맛보는 것이다.

       

       누가 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만들어 버린 건, 붉은 군대의 군권을 가진 트로츠키 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장악한 예카테린부르크도 밀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트로츠키도 변명할 거리가 있다면 온갖 전투로 잔뼈가 굵어진 체코군단이 버티고 있던 탓이지만.

       

       지금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로실로프 동지는 내게 지금 수모를 강요하는 것인가?”

       “훗날을 도모해야 하네. 여기서 우리 붉은 군대를 개죽음으로 만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적어도 저 전차인지 뭔지를 무찌를 대응책을 마련할 때까지는 붉은 군대를 저 전차의 양탄자로 처박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이 모든 건 결국 트로츠키 탓이란 말이지.”

       

       

       스탈린은 다시금 트로츠키란 이름을 되뇌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은 트로츠키 탓이다.

       

       

       “얼른. 빠져나가야 하네.”

       “하지만 갈 때는 가더라도 그냥 갈 수는 없네.”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 황녀에게 굴려진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로마노프에 이를 가는 적위대를 뽑아주게.”

       “설마.”

       “우리가 퇴각하기 전에 무언가는 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다고? 웃기지도 않지.

       

       사람은 총에 살살 맞아도 죽게 되어 있다.

       

       어디 운 좋게 살아남아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아 봐라.

       

       

       * * *

       

       

       

       차리친 전투는 승리했다.

       

       스탈린은 결사적인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었으면 이쪽도 꽤 귀찮았을 텐데. 퇴로를 열어 준 데다가 트로츠키 때문에 죽기는 싫었을 거다.

       

       변명거리도 있을 테니. 이제 모스크바로 돌아간 스탈린은 패전의 책임을 두고 트로츠키와 두고두고 경쟁할 거다.

       

       차리친의 탈환으로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남러시아 백군이 이쪽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남러시아와 시베리아. 극동을 기반으로 내치를 다스려야 한다.

       

       

       “적들을 다 잡을 기회를 놓친 게 아쉽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콜차크와 크라스노프는 아쉬워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게 맞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는 누구입니까.”

       “미하일 드로즈돕스키입니다. 황녀님이 지시하신 전차를 앞세우고 보병이 뒤를 따르도록 지휘하였습니다.”

       “원래 직책이 어찌 됩니까?”

       “참모장입니다만. 전차 한번 끌어보고 싶다고 해서. 말을 안 들어 먹더군요.”

       

       

       그 사람 백군에 얼마 없던 명장 아닌가.

       

       분명 내전에서 백군에 지원했지만, 입헌군주제 지지에 니콜라이 2세가 아니라 미하일 대공을 지지했다고 들었다.

       

       그 사람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분명 패혈증으로 18년에 죽는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일이 잘못 돌아가서 살아났다는 건가.

       

       그 망할 노인이 나를 아나스타샤로 만든 게 내가 그나마 러시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서인가.

       

       아니, 그럴 거면 러시아 좋아하는 놈에게 했겠지. 나는 어쩌다 걸린 운 안 좋은 케이스고.

       

       아무튼 죽어야 할 인간이 살아 있다.

       

       나와 같은 빙의자는 아니고 내가 빙의하고 내전이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스노우볼로 상황이 바뀌어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는 듯하다.

       

       그래. 일단 차리친에 입성하자.

       

       

       “일단 차리친에 입성합시다.”

       “예.”

       

       

       차리친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하긴 적군 아래에 있던 도시가 차리친이었다.

       

       볼셰비키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하겠지.

       

       이러다 또 암살을-

       

       

       “아나스타샤 황녀! 당신을 인민의 이름으로 죽일 것이오!”

       

       

       시발, 연례행사인가.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죽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상당히 부러워할지도.

       

       

       “황녀님!”

       

       

       타앙!

       

       총이 아직도 통하지 않나.

       

       그래도 식겁했다. 이번엔 정말 이마가 따가웠거든.

       

       

       “어.어째서 죽지 않는. 총알이 왜 안 박혀!”

       

       

       역시 같은 전개다.

       

       총을 맞춰도 죽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암살범이 뒷걸음질을 치다 쓰러졌다.

       

       이런 개연성 무너진 전개. 역시 재미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오스트리아 황태자 같은 운명은 맛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주께 빌었지. 부디 총에 죽지만 않게 해 달라고 말이야. 근본이 너와는 다르단다.”

       

       

       탕탕탕탕!

       

       방금 전 나한테 총을 쏜 놈은 백군의 사격에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리고.

       

       차리친의 시민들이 이 광경을 목도했다.

       

       죽지 않는 황녀. 아나스타샤 여대공. 그 소문의 진위를 적군의 아래에 있는 시민들도 보았다.

       

       

       “진정 성녀란 말인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정말로?”

       

       

       이거 또 소문이 나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백군 장군진은 내 뒤를 따르는 처지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훗날 아나스타샤 신격화를 위해 퍼트린 소문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이거 나중에 일단 볼셰비키부터 때려잡자고 해서 겨우 힘을 모은 멘셰비키를 비롯해 각종 세력이 항의할 거 같은 걸.

       

       뭐 일단 그건 뒤로 미루고.

       

       지금은 남러시아와 통합할 생각해야 한다.

       

       차리친에 먼저 입성해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하는 자들이 있으니.

       

       검은 남작과 미하일 드로즈돕스키.

       

       둘이 포격으로 박살이 난 차리친 볼셰비키 지휘부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대가 표트르 브란겔이고 그쪽이 미하일 드로즈돕스키군요.”

       

       

       표트르 브란겔은 사진으로 한두 번 봤다.

       

       내가 살던 세상이 그 모양 그 꼬라지가 되기 전에는 역사 지식을 둘러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황녀님께서 이리 생존하시어 다행입니다.”

       “전 러시아의 성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관인 안톤 데니킨 중장은 어디 있습니까?”

       “중장께서는 크림반도에서 열강들의 지원보급을 맡으셨습니다.”

       “흠. 그렇군.”

       

       

       그 양반, 모스크바 진공 실패만이 아니라 폭정했다던데.

       

       뭐 그 문제는 당장 뒤로 미뤄두는 게 좋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검은 남작 표트르 브란겔을 만났다는 거지.

       

       남러시아국을 이끌며 볼셰비키를 마지막까지 괴롭힌 백군 최고의 명장.

       

       지금 그가 내 앞에 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크리스마스 기념 연참입니다!

    표트르 브란겔은 승기가 기울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남러시아를 이끌며 싸우다가 패배하면서 망명생활을 하다 1928년 4월 25일에 결핵으로 급사합니다.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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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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