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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0

       *

         

         

         “수업을 맡아달라고? 음, 뭐…! 우리 제자 부탁인데 특강 정도야 해줄 수 있지. 몇 주나?”

         “남은 학기.”

         “이거 순 미친 새끼 아니야.”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쌍욕을 뱉은 뒤에, 엔리케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녀석이 갑자기 가르치기 싫다고 수업 전체를 드랍할 정도로 책임감 없는 녀석은 아닌데…?

         

         아니, 오히려 책임감의 화신이라고 불러야 할 녀석이긴 한데….

         

         무슨 일 있나?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체로 공무였다는 걸.

         

         

         “사령부에서 뭐 또 공작 하나 걸었니? 네가 이제 현장에서 뛸 짬밥은 아닌데. 드워프에 내전이라도 터진 게 아닌 이상에야.”

         “아직 확실하진 않다.”

         “확실하지 않은데 왜 사령관이 현장으로 나가.”

         “확실하지 않으니까.”

         

         

         작전의 개요가 명확하고 지휘 방향이 확실하다면 굳이 그가 직접 투입될 필요가 없다. 적절한 수준의 병력을 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언젠가 회고했듯이 이 세상 모든 사건에 그가 개입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 ‘메인 스토리’와 얽힌 것이 명백하고 피아 구분이 아직 명징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현장 요원들에게 일임할 수는 없다.

         

         지휘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전술 목표를 위해 요원을 소모하는 것은 절멸부대의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더군다나 사령관이 직접 현장에 나서는 것엔 장점이 하나 더 있는 법이다.

         

         

         “크라실로프는 대외첩보에 약하기도 하니까.”

         “와, 이 잔인한 놈….”

         

         

         그의 말뜻을 파악한 엔리케는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첩보부대 사령관이 일선 현장에 직접 나서서 ‘대외첩보가 약해서 내가 직접 뛰러 왔다.’라고 말한다면 대체 그쪽 지부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엔리케는 어딘지 모를 현장 지휘본부에 애도를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런 일이라면야. 애들 가르치는 것 정도는 내가 대신 해줄 수 있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맙군.”

         “무슨 요일이지?”

         “수목금.”

         

         

         이반의 말에 엔리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삼일…?

         

         

         “각각 5학점. 잘 부탁하마. 수업 자료는 오늘 오후 내에 보내주지.”

         “자, 잠깐. 세 개? 수업 셋? 각각 5학점?”

         “음. 그리고 이자벨, 오스칼, 엘피헤라, 에시디스, 예브게니. 이 다섯은 이번 학기에 외부 학습으로 학기 대체 신청을 넣을 예정이다. 그 과정도 부탁하지.”

         “야, 잠깐! 뭐? 뭐?!”

         “고맙군. 사례하마.”

         

         

         한 주에 15시간. 그녀가 맡은 기사학부 수업까지 포함한다면 18시간. 무려 학기별 최소 학점을 거의 다 충족시켜버리는 시간이다.

         

         엔리케는 문을 열고 나서는 이반에게 빽 소리질렀다.

         

         

         “이거 진짜 순 미친 새끼 아니야!!”

         

         

         교수 연구실 문이 차갑게 닫혔다.

         

         

       

       

       

       

       

       

       

       

        20.  틸레스의 가을

       

       

       

       

       

       

       

        

        

       -덜컹, 덜컹.

        

        

        국경의 긴 터널을 통과하니 설국이었던 일본의 니가타와는 달리, 크라실로프의 국경을 통과하니 여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차창 너머로 맑은 정오의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게 가을이지. 이게 날씨지. 어휴 정말.”

        

        

        맞은편에 앉은 이자벨은 크라실로프 외곽을 벗어날 때부터 저런 식으로 투덜거렸다. 크라실로프의 겨울을 처음 겪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으레 하는 말이다.

       

        이반은 별 생각 없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이 맑으니 시인성이 좋군. 하면서.

        

        주인공 파티가 다음 시나리오를 위해 장소를 이동할 때는 산적이나 마적이 나타나는 것이 상식이었으니까.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창가에 슬쩍 얹은 팔이 언제든 도끼자루를 쥘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창 밖으론 끝없이 같은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틸레스는 드넓은 평야와 얕은 구릉을 보유한 나라였다. 도심지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앞으로도 이런 풍광이 계속될 것이다.

        

        처음의 감흥을 잃었는지, 다소 지루해진 얼굴로 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자벨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저씨, 우리 아빠랑 친했죠?”

        “어느 정도는.”

        

        

        막시밀리앙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이반 또한 누구를 상대하든 비슷하게 대했으므로, 그 사이가 정말 친했는지는 확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만 막시밀리앙과 함께 보낸 기간이 짧지 않았으므로, 이반은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면 친한거지 어느 정도가 뭐야.”

        

        

        이자벨은 한 차례 투덜거리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과거 어느 시점을 헤아리는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니까 아빠가 생각나요. 처음엔 원망 진짜 많이 했던 거 아세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데 산 속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나쁜 생각도, 나쁜 말도 참 많이 했었는데….”

        

        

        이자벨은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에이나르가 찾아왔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칠용장을 죽인 자에게 씌워지는 저주, 영혼의 오염에 관한.

        

        막시밀리앙은 칠용장 둘과 마왕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참살했다. 그러고도 종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광증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건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 이자벨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신을 죽인 자에게 쏟아지는 악신의 단말마가 얼마나 지독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다만 생각했다. 철없는 원망이었다고. 용사의 딸로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고, 그녀의 능력이 아닌 그 이상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으니.

        

        세상을 구한 아버지를 그 딸이 원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구하고자 했던 것엔 그녀의 세상도 있었을 테니까.

        

        그건 오롯한 희생이다. 자기자신을 온전히 내어 바치는.

        

        언젠가 그녀가 따라 잡아야 할 길이다. 용사의 딸이 아닌, 새로운 용사로서.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이자벨은 고개를 들었다.

        

        

        “이젠 아빠가 해줬던 옛날 얘기들이 떠올라요. 또 언제 볼지 모르니까, 억지로라도 떠올리려 해보거든요. 딸이 되어가지고, 아빠 얼굴을 동상에서나 기억하면 부끄러우니까.”

        

        

        이자벨은 굳건한 얼굴로 밝게 웃었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하면 좀 곤란하니까요. 어쩐지 꼭 다시 볼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아저씨랑 같이 다니다보면 그럴 것 같아.”

        “…음.”

        

        

        이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막시밀리앙과의 재회라.

        

        그리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 어떤 상태일지 모르니까. 만일 그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하다면, 반드시 저지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유진이 확인 부가 퀘스트에서 질 베르는 ‘생존’, 막시밀리앙은 ‘조우’였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질 베르에겐 목숨의 위협이 있고 막시밀리앙에겐 그런 것이 없다는 식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

        

        대체 누가 그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막시밀리앙 자체가 이미 타도해야 할 적이라면.

        

        

        ‘아니, 그랬다면 퀘스트가 막시밀리앙의 제거를 요구했겠지.’

        

        

        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진의 퀘스트는 과거에 이반을 제거하란 임무를 내렸었다. 난이도 차이로 보자면 유진에겐 이반이나 막시밀리앙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적대하는 순간 죽을 테니까.

        

        그러니, 퀘스트는 난이도를 고려하지 않고 필요할 경우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파악한다면, 막시밀리앙이 반드시 적이 되었으리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반은, 그 사내의 미소 잃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희망의 상징이 절망에 굴복하는 것은, 인간은 결코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만 같을 테니까.

        

        이 세상엔 아직 네 개체의 칠용장이 더 남아있고, 평화라는 껍질 뒤에서 군왕과 야심가들이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마족만을 적대했던 지난 전쟁과는 다른, 연합 왕국이 겪을 최후의 전쟁을.

        

        그러나 그 끝에도, 인간은 여전히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용사라는 이름에 걸린 상징이다. 막시밀리앙이 가졌던, 그리고 이자벨에게 이어진.

        

        이반은 조잘거리는 이자벨을 우묵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왕께선 용사가 도래하기 전에 붕어하셨다.

        

        의로운 이들이 먼저 스러지던 전장이었다. 약자들을 등에 지고, 죽음의 공세 앞에서 방파제를 자청하던 이들이 언제나 먼저 스러졌으므로.

        

        더 이상은 안 된다.

        

        의인들의 시체 위에 쌓아 올린 평화는 한 번이면 족하므로.

        

        당대의 용사는 절망보다 더 빠르게 도래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이반은 ‘상식’에 정통하다. 그의 인도와 함께라면 이자벨은 더욱 빠르게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본디 한국인은 효율적인 레벨링 최적화의 전문가니까.

        

        이반은 조잘거리는 이자벨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흘 후, 이반은 틸레스의 수도, 상 마틸렌느에 도착했다.

        

       

        

       *

        

        

        이반이 탑승한 열차는 상 마틸렌느의 가장 큰 기차역, 마틸-에투알 역에 정차했다.

        

        마틸 에투알 역은 틸레스 동남부 항구도시에서부터 상 마틸렌느를 관통해 그대로 크라실로프까지 이어지는 주요 무역로 중 하나였다.

        

        평일 낮의 기차역은 어마어마하게 붐비고 있었다. 거대한 역사 전체가 가득 찰 정도로 빼곡하게.

        

        이자벨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에시디스에게 킥킥거리며 뻐기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칼리온의 공중항구를 봐왔던 엘피헤라나, 지구 출신인 유진은 별 감흥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때요? 아저씨는 완전 촌사람이잖아. 대단하죠? 그쵸? 프리첸카야 역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음.”

        

        

        대충 서울역쯤 되는군.

        

        미묘한 비교지만 이 시대를 고려하자면 대단한 규모다. 이반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을 기준으로 군수 열차를 수도 없이 마주했던 그였으나, 이렇게 번성한 기차역을 볼때면 다소 감흥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이 일상으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라며 싸우던 사내들을 무수히 많이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저 멀리에, 그랬던 사내 중 하나가 삐딱하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잠시.”

        

        

        이반은 활달하게 쫑알거리는 이자벨에게 손짓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기차역 한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한숨을 푹푹 내쉬던 사내가 힘 없이 손을 들었다.

        

        

        “왔나.”

        “파벨.”

        

        

        파벨은 피곤한 눈으로 이반을 바라보더니, 담배를 바닥에 비벼끄고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대체 왜 내가 이런 고생을….”

        “왜 여기 있지?”

        “전하의 명이었다. 외교 사절로 가보라더군.”

        

        

        그는 코트 안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건넸다. 간단한 신상명세와 왕실인장이 찍힌 공문이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3급 정무 외교관보.

        

        

        파벨은 손을 탁탁 털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자네 감시역이야. 외교 사절 인가까지 내주면 자네가 대체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며 손톱을 깨무시더군.”

        “하.”

        

        

        이반은 잠시 그 광경을 떠올리고는 문득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파벨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뭐, 공무니까 영전이라고 치려면 칠 수 있겠지. 잘 부탁하네, 이반 보좌.”

        “그래, 잘 부탁한다.”

        

        

        예로부터 외교 사절이란 가장 대표적인 우방국 스파이인 법이며.

        

        방첩사령부의 대외첩보부는 거의 전원 외교 사절의 일부에 섞여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왕실 공인, 합법적 우방국 스파이로 활동할 수 있으리란 의미였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각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정을 넘기지 않았으니 휴재는 아니에요!
    아싸!

    모두들 행복한 월요일!! 행복한 한 주 되세요!!
    사랑해요! (아카데미에서, 작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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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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