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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0

        

         까드. 득…!!

         

         깨진 바닥 파편이 채 내려오기도 전에, 지하도 출구에서 골목 초입 부근까지.

         누군가에겐 멀지만… 상식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한달음에 좁힐 수 있는 간극을, 제로가 공간에 녹아내리듯 늘어진 잔상을 남기며 주파한다.

         

         뒤로 당겨진 팔등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솟구친다.

         

         이대로 일격에 상황이 종료된다면 그걸로 좋다. 그대로 도망쳐서 몸을 낮추고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거나, 에나마의 영향력이 비교적 약한 다른 도시로 피난 갔다가 원작이 돌아갈 때쯤 다시 입국하면 된다.

         

         비록 조금 치사할 수 있지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허나 완전히 선공을 빼앗았다고 해도, 제로에 대한 신뢰가 확고하다고 해도 미약한 의구심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

         

         그에게 정확한 당시 기억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더 고밀도 개조가 베풀어지고 고성능이던 원래 의체로도 근접전에서는 승산이 적었다. 심지어 그때는 추가 무장인 골리앗 위에 탑승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저 빈틈을 파고든 기습이 그 아득한 격차를 메꿀 수 있냐가 주된 쟁점이지만…!

         

         챙!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갈라진 천을 뚫고 헬멧 근처에 도달한 히든블레이드의 궤도가 어긋났다.

         젖혀진 상반신이 입사각을 뒤틀었는지, 피스메이커의 탄환은 놈의 컴뱃 아머 겉면을 긁어내는 수준에 그쳤고.

         

         “……!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거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

         

         – 대상의 즉응 능력 수준을 상향 조정. 오퍼레이션 캐슬링(Castling)을 시행합니다. –

         

         이런 상황에서도 잡담을 나눌 여유가 있는지, 뭐라 나불거리려는 추적자의 말을 제로가 끊어버렸다. 방심해준다면 고맙다. 약자 입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어느새 전술 하네스(Harness; 몸 여기저기에 감을 수 있는 수납용 벨트)로부터 뽑아진 탄토(短刀; 일본식 단검) 형태의 컴뱃 나이프가 역수로 쥐어진 채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보아하니 발도와 동시에 블레이드를 쳐낸 모양인데… 진짜 여전한 괴력이다. 저 작은 단검만으로 힘을 담기 어려운 자연체에서, 전력으로 내질러진 드로이드의 공격을 빗겨 내다니.

         

         덕분에 총구가 겨눠진 것도 아니고, 아직은 그저 군복을 덕지덕지 껴입은 칼잡이와 마주한 상태임에도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다리는 물론 전신의 근육이 경직될 정도로.

         

         “…캐슬링이라 이거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기에, 묵직한 어감과는 달리 씁쓸한 의미를 단어를 중얼거려봤다.

         

         제로가 깨어난 직후. 그러니까… 하베스트 플래닛을 떠나기 전, 만약을 대비해 이런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한 적이 있다.

         

         듬직한 케어봇이 여유롭게 홀로 격퇴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라면 애당초 시작할 고민거리 따위도 없고, 정보전을 걸어오거나 해킹을 시도하는 족속들이면 내가 가세해서 못해도 반반싸움으로 끌고 갈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가진 전력을 모조리 끌어다 쓸지라도 백중세조차 유지하기 힘든 강적을 만날 경우엔 어찌해야 할까?

         

         쾅—!!

         

         숫제 폭탄 터지는 굉음에 가까운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앞쪽으로 내디딘 발구름을 중심삼아 제로의 몸이 맹렬하게 회전한다. 칼 자체가 팔에 부착되었다는 장점을 아낌없이 활용하는 그 형상은 흡사 칼날의 폭풍우(Blade Storm).

         

         팔을 당기고 뻗는 수준의 물리력으로 추적자의 가드를 뚫기 힘들다는 걸 깨닫자마자,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전부 긁어서라도 유효타를. 가능하다면 틈을 만들려는 자세는 가히 보디가드의 귀감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결과도 노력에 정비례했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아쉽다.

         

         “…어쩐지. 평범한 가정용 로봇치고는 과도가 좀 날카롭더라니, 부착된 소프트웨어가 제법…!”

         

         – 위험도… 상향 조정…! –

         

         끼긱… 끼기긱…!!

         

         이번엔 휘둘러서 튕겨내지도 않았다. 놈은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궤적을 읽어서 힘 대 힘으로 받아내는 길을 골랐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것처럼 한 손만 써서.

         

         게다가 눈앞까지 들이닥친 위협에 정신머리가 팔릴 법도 했거늘, 여전히 목표로 삼은 내 쪽에 시선을 할애할 여유가 있는지 헬멧의 각도가 비스듬하게 돌아가 있었다.

         

         “꺼져…!”

         “이런.”

         

         타당!!

         

         우선 추적자의 빈손에 제로가 작살나지 않도록, 위협사격을 가해 강제로 대치를 풀게 만들었다.

         

         제대로 인식하기도 힘들던 고속 전투의 도중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만일 그랬으면 나로서는 정조준도 못 했을 테니까. 포신조차 순수한 완력으로 비틀어버리는 괴물에게 무기가 아닌 신체 일부분이 닿기엔 우리 애가 너무 여리여리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강도나 강함이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지표니까.

         

         쩌엉! 제품 품질 허용치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힘대결에 기어이 이가 나가버린 두 칼날이 허공에서 찌르르 울린다.

         

         투쾅! 안에서 바깥으로, 납도 된 자세에서 개시되는 거합居合 마냥 팔이 사출된다. 날부분은 목을, 후려치듯 휘둘러진 철권은 어깨를 노렸으나 마찬가지로 의도를 읽고 마중 나온 상대방에게 막혔다.

         

         우둑! 물러서거나 전진하려는 움직임을 막고자 철근과도 비교될 강철 다리가 군화를 짓밟았으나, 오히려 내질러진 발차기에 제로의 무릎이 꺾였다. 구조적으로 역방향에서 나올 수 없는 공격이었기에 망정이지, 무릎 관절이 쪼개질 뻔했다.

         

         “아… 진짜!!”

         

         메마른 입술을 깨문다.

         적당한 군사 훈련을 받은 기업 소속 아무개가 가세하거나, 저쪽이 총을 꺼낼 여유를 얻는 것만으로도 이 대치가 무너지겠다는 확신이 섰다.

         

         사실 지금도 조금씩 밀리는 게 눈에 보여서 초조한 감정이 올라왔다.

         장점인 기동력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정면전에 묶여 소모를 강요당하는 모습에 내가 다 화가 났다.

         

         멍청하게 누울 자리 못 보고 무작정 제자리에서 깎여 나가는 걸 작전이랍시고 거창하게 이름까지 붙여서 부른 게 아니다.

         결국 오퍼레이션 캐슬링은 실제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게 아닌, 나에게 보내는 신호다. 부디 망설이지 말고 우리가 협의했던 대로 움직여 달라는.

         

         “?! 잠깐, 거기. 멈추시오…!”

         

         “싫은데!? 꼬우면 막아보던가!”

         

         후열은 지키던 내가 돌연 등을 돌리고는 골목 반대편으로 달려나가자 당황한 추적자로부터 제지가 들어왔다.

         하지만 말뿐인 협박에 따라줄 이유 따위는 없었으니, 아예 에베벱 하고 혀를 내밀어서 골려 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간다. 매정하게 제로는 내버려둔 채로.

         정돈되지 않은 숨이 차오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탁탁… 타닥…!

         

         캐슬링은 체스에서 킹과 룩(Rook)이 자리를 뒤바꾸는 특수 규칙이다.

         구석에 갇힌 룩을 공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혹은 잡히면 그대로 게임 오버가 되는 킹을 보호하기 위해.

         

         적들의 목표가 단순 강도라면 남은 로봇을 포획하려고 전력이 집중될 테니 나라도 고양이 손을 보태서 죽어라 방아쇠를 당기는 게 단연코 효율적이지만.

         에나마의 추적자처럼 나를 생포하는 게 목적인, 구체적인 승리 조건을 가진 녀석들이 이 꼴을 맞닥트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버림 패로 쓰여진 것처럼 비춰지는 일개 드로이드에게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당연히 번거로운 장애물은 건너뛰고 무력하게 도망치는 계집을 노리려 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착안한 전술.

         

         ‘5… 4……!’

         

         격하게 움직이면서 한 눈 파는 건 그다지 안전한 행동이 아니었으나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공유 받은 제로의 시각 정보가 말 그대로 미친듯이 요동친다.

         휘둘러진 나이프가 장갑과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고, 들이밀어진 컴뱃 아머는 안에 들은 게 살덩어리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거침없이 육탄전을 걸어왔다.

         

         막상 원하던 대로 단기결전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쪽이 품었던 조급함이 전염된 듯, 완전한 승리나 격파보다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서 나에게 접근하겠다는 의지가 명료해 보였고.

         

         ‘3… 2….’

         

         이윽고 기세에 밀려 균형이 무너진 케어봇이 쓰러지니 열린 길을 따라 순식간에 검은 군인이 들이닥친다. 뻗어진 장갑이 내 어깨를 움켜쥐려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자신이 움직이는 걸 삼인칭으로 본다는 건 꽤 어색한 일이었네 이거.

         

         전에도 실험해봤지만 내 전기 방출은 직접적인 공격 수단으로 쓰기에 출력이 모자라다. 아무리 창작물에서 흔히 나오는 전격 능력자를 따라해보고 싶어도 감전사가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다.

         

         근데,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나 사람의 뇌, 심장을 망쳐 놓는데만 집중한다면 그렇게까지 높은 전류가 필요할까?

         

         ‘1…… 지금!’

         

         몸이 멈춰지는 타이밍에 맞춰. 붙들린 어깨를 지렛대삼아 상반신을 반 바퀴 돌린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놈을 마주할 수 있도록.

         

         잡히기는커녕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만 되어도 쓰러지는 게 킹이라는 기물이지만, 한 칸 옆은 공격할 수 있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나 또한 이렇게 맞붙은 상태에서는 나름대로 세울 가시가 있는 년이 되시겠다.

         

         그리고 넘어지는 척하면서 적의 행동을 유도한 나의 전차(Rukh) 또한 거의 다 따라붙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상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배후의 칼날이 된 제로에게 그대로 찔릴 것이냐. 아니면 그걸 막아내느라 별볼일 없어 보이는 여자애를 무시하다가 내 손에 둘러진 투명한 죽음에 최후를 맞이할 것이냐…!

         

         사지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걸 환영한다 이 시발 추적자 새….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의뢰를 받기 싫다면 분명하게 거절해주었으면 좋겠소이다! 마감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엥?”

         

         …끼야? …예?? 네? 뭐?

         

         다급하게 손을 끊었다.

         단순히 떠든 내용이나 목소리에 적의가 없어 보이고, 다리가 꼬여서 넘어지려던 몸을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힘 조절로 녀석이 붙잡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뒤편, 그러니까 빌린 제로의 시야에 비친. 길가에 주차된 에나마 로고가 박힌 흰색 밴(승합차)에서 얼굴을 쓱 내민 게 해맑은 마리나나 꼬마 켄인 것도 한몫 했지만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어느 틈엔가 턱 바로 아래에서 멈춘 번들거리는 컴뱃 나이프가 나나 제로의 추가적인 움직임을 봉해버린 거니까.

         

         …딱히 전력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뒤지게 빠르고, 말투는 얼빠진 것처럼 느껴졌으나 더럽게 냉정하다.

         저쪽이 딱히 나를 생포하는데 관심이 없었던 만큼 죽이는 데도 큰 인과를 느끼지 못했기에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은 거지 자칫했으면….

         

         “…쓰읍.”

         

         조용히 양손을 들어 전투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어쩌다 의뢰주와 용병의 관계로 얽히게 됐는지는 몰라도, 잠깐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제 갈 길을 갈 수 있다면 현재로서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기에.

         

         “하아…… 거 마켓 일 때문에 오신 거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대 족속들이 손님을 얼마나 푸대접하는지 잠시 잊었소이다. …이 이상 지체해서 윗분들을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그만 동행해 주시겠소이까?”

         

         저들은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내 과한 대응으로 인해 뭔가를 눈치챌 수도 있었던 만큼, 이 아슬아슬한 정보의 부재가 의심으로 번지지 않도록 협조하는데 우리는 동의했다.

         

         추적자 형씨의 경추에 겨눠졌던 제로의 블레이드가 납도 되고, 마찬가지로 내 목젖을 간질이던 단검이 거두어졌으니.

         

         결국 나는 어색한 변명과 핑계로 세간의 해커 혐오를 한층 더 키워 놓고. 끌려가는 송아지 마냥 승합차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끄응. 이건 애매하군.”

         

         검은 소녀와 집사 기계의 전투, 그리고 마지막 대치와 극적 타결 이후에 차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까지 지켜본 은퇴 용병은 한숨과 함께 광학 조준기(Scope)로부터 눈을 떼고 대물 저격총의 거치대를 깔끔하게 접었다.

         

         방아쇠를 당길 기회는 많았다.

         문제는 그 기회만큼 주변에 보는 눈도 많았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으로 젊은이의 앞길을 망치게 되느니 차라리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건데….

         

         정중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동행하는 모습을 보면 잘 해결된 것 같기도 했고.

         세상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움직이는 태도는 뭔가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경험상, 메가코프와 본격적으로 척을 지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이용하는 관계를 맺는 게 피차 이로웠으니. 큰일이 아니기를, 혹은 눈 먼 총알 한 두발로 해결되는 일이기를 바라며 그는 발길을 돌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뒷부분 묘사를 천자 내외는 더 적을 계획이었는데 00시가 지나버려서 일단 올립니다….
    아으 왜 이렇게 일정이 꼬이는지.

    햐얌 님의 50코인 꿀밤 정말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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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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