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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1

     

    “철수한다!”

    “부상자부터 마을로 옮겨라!”

     

    우리는 천룡의 침소를 뒤로 하고 일단 고기 마을로 복귀했다.

     

    천룡에게 신성력을 있는 대로 쓴 데다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 지쳤음에도 의사들은 의무를 다해 부상자를 돌봤다.

     

    기사단이 여기서 야영할 순 없으니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한다.

     

    나도 볼 일은 다 끝났다. 여유는 없었다.

     

    “너, 어깨가 튼실하다! 이리 와 봐라!”

    “거, 거절한다. 내게는 처자식이 있다!”

     

    마을에서는 천둥족 부족민들이 기사들을 말 그대로 헌팅하고 있었다. 브루노를 제외한 기사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다.

     

    “선생님, 기사단은 얼추 준비됐습니다. 의사진의 일이 끝나면 이동할 수 있습니다.”

     

    타냐가 보고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잠시 마을 철책 밖으로 나왔다.

     

    “후우.”

     

    한숨 돌리며 뇌에 차가운 산소를 보급했다.

     

    그만한 전투가 있었음에도 얼음 평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다.

    인간사가 끝나도 언제까지고 같은 경치이겠지. 대자연은 위대하다.

     

    이 경치도 마지막이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아뮬렛과 주머니에서 폭풍석을 꺼냈다.

     

    파인 홈에 가져가 살짝 힘을 주니 달각, 저항 없이 맞아 들어간다.

     

    아뮬렛의 외곽부가 찰칵대며 변형한다. 보다 기하학적인 형태가 됐다.

     

    파앙, 미세하게 파동이 일었다. 안에서 힘이 분출된 느낌이다.

     

     

    ―――――――――――

    · 폭풍이 치는 어둠 화신의 아뮬렛

    – 신화급 아티팩트

    – 사용 효과 : 최상급 이하의 저주를 생성하거나 조종합니다.

    ―――――――――――

     

     

    “완성됐어.”

     

    아뮬렛에 봉인되어 있던 능력을 모두 끌어냈다.

     

    이게 있으면 아셀라가 가진 저주도 조종하여 해주할 수 있다.

     

    드디어 아셀라를 수술할 수 있다.

     

    아뮬렛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목에 걸고 마을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보러 온 사람이 있었다.

     

    “표정을 보니 좋은 일이 있나 본데!”

     

    기슈타였다. 그녀는 듬직하게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서 있었다.

     

    “폭풍석 덕분에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 잘 쓸게.”

     

    “그래. 이제 내겐 필요도 없으니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기슈타가 호쾌하게 말했다.

     

    “몸은 좀 어때.”

     

    “네가 봐준 덕에 금방 멀쩡해졌어.”

     

    그녀가 내게 자랑하며 붕대 감은 어깨를 힘차게 빙빙 돌렸다.

     

    하지만 약간 머뭇거리는 태도가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왜?”

     

    “조금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

     

    “저녁 메뉴보다는 중요한 안건이지? 어디 말해봐.”

     

    우리는 근처의 돌무더기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부족 말이다만, 라스.”

     

    기슈타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들도 이 땅에서 살던 이유는 바위족이나 빙하족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머니의 마나에 끌리고 있었지.”

     

    “용의 피가 흐르니까 그렇기야 하겠네.”

     

    야만족은 인간이긴 해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딘가에 마물이 있다.

     

    그게 우리와 약간 차이가 나는 이유다.

     

    설인들은 비교적 마물에 가깝지만.

     

    천둥족은 기슈타가 통제하기도 하고, 지능도 높아 사실상 구분은 안 된다.

     

    “어머니가 떠나셨으니 부족민들은 얼마 안 가 의문을 품게 될 테지. 이 땅에서 떠나려 할 테야.”

     

    “과연.”

     

    미래에서도 대악마가 천룡을 소재로 현계하니 바로 후작령으로 내려왔었다. 대악마의 명령도 있었겠지만.

     

    “사실 좋은 땅은 아니다. 어딜 가도 얼음뿐이야. 먹이를 구하려면 종일 달려 짐승이나 마물을 찾아야 하고, 차가운 얼음물로 뛰어들어야 한다.”

     

    우울한 내용과 다르게 기슈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도 즐겁다! 부족민들과 언제까지고 달려도 한 번도 질린 적이 없다.”

     

    “곰 타고 드라이브하면 상쾌하지. 나도 재밌었어.”

     

    “그렇지?”

     

    기슈타가 껄껄댔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굳이 이 어려운 땅에서 살 이유가 없어.”

     

    기슈타가 떠안은 문제는 충분히 이해됐다.

     

    그리고 좋은 해결책도 바로 생각났다.

     

    “기슈타, 네 부족민 오백 명 말인데.”

     

    “음.”

     

    “고트베르크 후작령에서 정규군으로 고용하면 어떻겠어.”

     

    “군대. 네가 데려온 기사단처럼 제국을 위해 일한단 말이냐.”

     

    “아니, 나라가 아니라 내 사병이야. 제국과는 상관없이 나와 내 가문만을 위해 일해야 해. 오히려 나를 공격해오면 상대가 제국이든 마족이든 목숨 걸고 싸워야 하고.”

    내 제안에 기슈타가 흥미를 보였다.

     

    “마족과 싸울 수도 있는가!”

     

    “그 대가로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 뛰놀 땅은 제공할게. 어때.”

     

    천둥족 정도 수준이니 마물 숲을 놀이터로 주면 즐겁게 지내지 싶다.

     

    “정말인가! 그런 좋은 제안을 해주다니, 넌 최고의 친구다 라스!”

     

    “하하,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내게야 말로 좋은 이야기다.

     

    마침 황제에게서 독립군사권을 받은 좋은 기회다.

     

    운용할 병력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기사단을 어디서 구해오자니 질도 질이고 비용도 많이 든다.

     

    새로 육성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내게는 전투의 프로인 바바리안 군대가 뿅 생기는 격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심지어 보수도 최저시급이다. 오히려 이쪽이 절을 하며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잘 됐군, 잘 됐어.”

     

    땅바닥을 보며 중얼거리는 기슈타.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 라스.”

     

    “어.”

     

    “부족민들은 그렇고, 내 이야기다.”

     

    “네가 왜?”

     

    “음.”

     

    기슈타는 한참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발을 쿵 구르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원한다.”

     

    “부족장이니까. 당연히 우대 조건으로 계약해줄게. 뭘 원해?”

     

    기슈타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너를 원한다, 라스.”

     

     

     

    ***

     

     

     

    바닥을 뚫고 나온 천룡이 설인의 군대를 증발시키고 날아갔을 때.

     

    기슈타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오랜 시간 그녀를 옭아매던 사슬이 풀렸다.

     

    마나 회오리가 사라지며, 동시에 그녀의 책임감도 희미하게 옅어졌다.

     

    이제 부족민들도 이 땅을 떠날 것이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얼음의 땅만이 남는다.

     

    이 땅에서 홀로 살아갈까.

    나가본 적 없는 세상을 둘러보러 갈까.

     

    아니, 뭘 해도 혼자서는 이 공허함이 메워질 리 없다고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필요하다, 라스가.

     

    그 순간, 기슈타는 더욱 강력하게 그를 갈망하게 됐다.

     

    자신은 여자고 그는 남자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동맹에서 시작해 동료로, 의리를 나누는 친구로.

     

    그런 관계로 정의할지언정 처음부터 욕심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지금은 균열이 점점 커져 목까지 차올랐다.

     

    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즉시 구멍으로 뛰어내려 그를 만나러 갔다.

     

    이제 라스는 이곳을 떠나겠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팔을 잡고 허리를 끌어안는다.

     

    도중 기슈타는 깨달았다.

     

    이미 그에게 정해진 연인이 있다는 걸 알아도, 그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하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부족민들의 처우도 결정됐다.

     

    족장으로서의 의무도 끝내고, 온전한 한 명의 여자로서의 자신만을 남긴 후.

     

    기슈타는 라스와 마주해 전했다.

     

    처음부터 다른 부족민들처럼, 가볍게 말해보고 싶었던 말을.

     

    “너를 원한다.”

     

    기슈타가 라스에게 상체를 들이밀었다.

     

    “라스, 너는 이 땅을 지루한 얼음뿐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아. 동쪽에도, 서쪽에도 넓게 넓게 펼쳐졌어! 달리면 새로운 경치가 기다린다!”

     

    기슈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나는 너에게 내 세상을 보여준다. 너는 내게 네 세상을 보여준다. 부족민이든 기사든 잠깐 기다리라고 하자. 땅은 움직이지 않아. 땅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고향으로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어.”

     

    기슈타가 라스의 손을 덥썩 잡았다.

     

    “둘이서만 함께 세상을 둘러보자. 나는 너와 함께라면 갈 수 있어.”

     

    그렇게 기슈타는 마음을 전했다.

     

    심장 안쪽이 밖으로 드러난 듯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후련했다.

     

    후련하고, 시원하고, 후회 없었다.

     

    “기슈타.”

     

    라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기슈타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사귄 기간은 짧아도, 뭐. 미래에서도 오래 본 사이니까.

     

    그때도 늘 듬직했고.

     

    그녀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도.

     

     

    ―――――――――――

    ※주의

    · 당신은 기로에 섰습니다.

    ·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 굿엔딩 리스트

     

    · ■■■ ■, 다시 ■■에서 21%

    · 녹아내려, ■■고, 이어지다 85% → 92%

    · ■■■ ■■ 0%

     

    · 엔딩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

     

     

    상태창이 떠 있다.

     

    ‘두 번째 굿엔딩, 이 발생확률은.’

     

    업적도 업적이지만, 기슈타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면.

     

    이 굿엔딩은 기슈타가 발생시키는 엔딩이라는 소리겠지.

     

    그만큼 그녀는 내 삶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죽도 잘 맞으니까.

     

     

    지금은 알겠다.

     

    두 번째 굿엔딩의 발생확률은, 나에 대한 기슈타의 마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내게 호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확률도 늘어나는 거겠지.

     

    그리고 92%라는 숫자로 보건대, 그녀는 나를 상당히 신뢰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할까.’

     

    기슈타는 내게 모험을 하자고 했다.

     

    지금 와서 내가 내의원이나 가문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모험가로서 업적을 쌓아 두 번째 굿엔딩을 맞이하는 일이.

     

    무엇보다 그렇게 루트를 변경해도 마지막에 두 번째 굿엔딩이 확정될 뿐이다.

     

    먼저 모든 배드엔딩을 회피하지 않는 한 굿엔딩은 찾아오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죽어버리면 끝이니까.

     

     

    ‘내가 여기서 그러자고 대답하면.’

     

    숫자가 변동한다.

     

    ―――――――――――

     

    · ■■■ ■, 다시 ■■에서

    21% → 0% [삭제됩니다]

     

    · 녹아내려, ■■고, 이어지다 92%

     

    · ■■■ ■■

    0% [삭제됩니다]

     

    ―――――――――――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맞이할 수 있는 엔딩은 한 개뿐.

     

    굿엔딩뿐만이 아니다. 루트변경에 의해 배드엔딩의 확률도 정신없이 널뛰기한다.

     

    당장 [마력폭주]는 97%까지 올라간다.

     

     

     

    아니, 숫자는 신경 쓰지 말자.

     

    핵심은 그게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기슈타와 함께하고 싶은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거겠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기슈타.

     

    차가운 공기에 살짝 상기된 볼. 커다랗게 뜬 눈이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때였다.

     

     

    ―――――――――――

     

    · 확률이 변동했습니다.

     

    · ■■■ ■, 다시 ■■에서 21% → 23%

     

    ―――――――――――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무것도 한 행동이 없는데도.

     

    뜬금없이 나를 생각하고 있을 황녀님의 얼굴을 떠올리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떤 흉흉한 마음을 품고 계신지.

     

    궁금해서 참기가 힘들어졌다.

     

    “기슈타.”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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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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