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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1

       여관의 마룻바닥을 나뒹구는 열 개의 빈 술병. 전부 70도를 가뿐히 넘는 위스키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술 중에서 가장 높은 도수를 자랑하지만…….

         

       “하…….”

         

       취하고 싶어도 쉽게 취할 수 없다. 이 미친 초월자의 몸뚱이는 웬만한 술로는 미동도 없으니.

         

       심지어 넘치는 소멸의 오러가 독을 중화하는 것인지, 알코올이 들어가면 바로 정신이 번쩍 든다.

         

       “미치겠네.”

         

       피폐해진 정신. 술에 의존해서 어떻게든 아픔을 견디려고 했는데 이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딱딱한 침대에 누워 반쯤 풀린 눈으로 생각을 멈췄다.

         

       “프란체 보고 싶다…….”

         

       떠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프란체를 잊은 적이 없다.

         

       붉은색을 보면 장미 수만 개를 뿌린 듯한 꽃향기가 머릿속에 자욱했고, 녹색을 보면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프란체와 입술을 맞췄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황홀한 첫 키스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프란체…….”

         

       내 가슴팍에 안겨 얼굴을 비비며 좋아한다를 연속적으로 외치는 그녀가 떠올랐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울컥해졌다.

         

       ‘아니야,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로 정했잖아.’

         

       고개를 연신 휘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이대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것도 뭐해서 허리를 일으켰다. 싸구려 침대인지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무한다.

         

       “밖에나 돌아다닐까.”

         

       페델리안 제국을 나오고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 모르겠다. 정신이 나간 폐인처럼 살아왔으니까.

         

       원래는 우울한 마음은 떨쳐내고 여행이나 돌아다니면서 그리운 고향의 음식을 맛보고, 이 세상의 관광 명소와 산해진미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내가 살기 위해서, 프란체에게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도망친 것이라 해도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거나 마찬가지다.

         

       잊어달라곤 했지만, 목걸이와 수확제의 추억 때문에 평생 나를 잊지 못하겠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완고하게 거절하고, 목걸이도 주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나.’

         

       좋아하는 마음이란 본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프란체가 나를 잊지 말아줬으면 해서 목걸이를 줬다. 나 또한,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서 완고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이기적이면서 추악한 욕심.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숨이 나왔다. 그만큼 나 자신이 추했고 구질구질했으며 미련했다. 분명 프란체는 지금도 가슴이 찢어질 거 같은 고통을 받고 있을 거다.

         

       상사란 원래 그런 병이니까.

         

       미안함 마음이 가득하다.

         

       ‘돌아가고 싶다.’

         

       프란체를 보고 싶다. 모두와 만나고 싶다. 즐거웠던 그때를 다시 만끽하고 싶다.

         

       볼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다시 그렇게 즐거운 시간은 보낼 수 없을 거다.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죽음을 보여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내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녀의 곁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동기화로 죽어간다면 언젠가는 눈치채게 되어있다.

         

       ‘보다 못한 카자르가 내 동기화의 조건을 알려주겠지.’

         

       프란체 때문에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다. 아마 죄책감으로 인해 정신이 무너지겠지.

         

       차라리 내가 도망쳤다는 거로 원망의 시선을 받는 게 낫다.

         

       “…나가자.”

         

       본디 우울한 감정은 가벼운 산책부터 시작해 없애는 법. 여기는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곳이니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여관 욕실에서 가볍게 몸을 씻은 뒤 옷을 챙겨입고 메인 홀로 나왔다.

         

       “아, 나오셨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주는 여종업원. 나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방에만 계셔서 쓰러지신 줄 알았어요.”

       “딱히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그런가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종업원.

         

       “여기는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곳인데, 특이한 분이시네요. 아, 오지랖이었다면 죄송해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상한 게 맞죠.”

         

       저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나는 괴짜가 맞다. 관광 명소로 유명해 구경할 것도, 즐길 것도 많은데 이곳에 온 이후로 온종일 여관에만 처박혀서 술만 퍼마시지 않았나.

         

       “방은 어떻게 할까요? 청소해 둘까요?”

         

       음, 할 거라곤 술병 치우고 침구 정리밖에 없긴 한데. 원래 받는 서비스니 받아둘까.

         

       “부탁합니다.”

         

         

       * * *

         

         

       대륙 남부 끝자락에 있는 자유의 도시 판테온.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범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유를 존중해주는 도시 국가.

         

       이곳에서는 출신, 핏줄, 위치 그 무엇 하나 따지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평등하며 자유를 만끽할 자격이 있고, 세상을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이 도시 국가의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사회다.

         

       ‘그래서 여기로 왔지만.’

         

       나는 돈만 많을 뿐,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 멸망한 왕국의 왕자이자, 당장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노예였으니.

         

       물론, 판테온이 자유를 중요시한다고 해서 입국을 막 시켜주는 건 아니다. 도시 국가인 만큼 검문을 철저히 하고 범죄자를 들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니까.

         

       이런 내가 어떻게 들어왔냐면…….

         

       ‘여기가 유난히 성벽이 낮아.’

         

       가볍게 벽타고 들어왔다. 불법 체류자와 같지만, 돈이 많아서 상관없었다.

         

       “어디부터 가볼까.”

         

       일단, 이 우울하고 축 늘어지는 무력감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기껏 마음 단단히 먹자며 결심하고 나온 건데 이러고 있으면 뭐가 되겠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카지노였다. 하지만 나는 포커나 겜블 같은 건 할 줄 모르니 패스.

         

       “흠…….”

         

       무난하게 식도락을 즐기는 게 가장 좋아 보인다. 나는 적당히 바로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특이한 복장으로 반겨주는 여종업원. 메이드 복이다.

         

       검은색과 흰색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짧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가터벨트.

         

       “…….”

         

       잘 골라들어왔군.

         

       “몇 분이세요?”

       “혼자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자리에 앉아주세요~”

         

       둘러보니 2인 테이블과 4인 테이블이 전부. 구석진 곳에 있는 2인 테이블에 앉았다.

         

       “결정하시면 불러주세요~”

         

       메뉴판을 건네받았다. 제국에서 볼 수 없는 음식들. 바다가 가까운 만큼 해산물이 많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이 음식.

         

       <새우튀김>

         

       “…….”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어떻게 이 음식이 존재하지? 고민은 필요없다. 바로 시킨다.

         

       “저기요.”

         

       손을 들며 부르니 아까 종업원이 도도도 달려왔다.

         

       “결정하셨나요?”

       “새우튀김이랑, 푸른등 생선조림이요.”

       “마실 건 어떤 거로 하시겠어요?”

         

       나는 메뉴판을 넘겼다. 음료는 과일 소다, 과일 맥주가 전부.

         

       ‘낮술은 좀 그런데.’

         

       그렇다고 저 음식에 맥주를 빼먹을 수가 없다.

         

       “크렌베리 맥주로 주세요.”

       “네~”

         

       주문을 마치고 턱을 괸 채 식당 내부를 구경했다. 여름에서 만끽하는 시원함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 나름 괜찮다.

         

       그리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혼자 있는 건 나뿐.

         

       “쯥.”

         

       데카르트 공작가에 있을 때 모두와 식사하고, 파티를 즐겼던 게 생각나 괜히 씁쓸해졌다. 그때는 외로움이란 감정이랑 거리가 있었는데.

         

       ‘됐어.’

         

       고개를 휘젓곤 정신 차렸다. 기분 풀려고 온 건데 여기서 우울해지면 어쩌나.

         

       무념무상으로 잠시 기다리니 종업원이 음식을 서빙했다.

         

       “푸른등 생선조림이랑 새우튀김이에요. 맥주는 이 막대로 저어서 드시면 돼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곤 돌아가는 종업원. 나는 음식을 바라봤다.

         

       “…….”

         

       노란색 튀김옷을 입은 새우와 타르타르 소스. 아무리 봐도 현대의 음식이다.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다음은 푸른등 생선조림이다.

         

       “흠.”

         

       생각보다 평범하다. 손질한 생선을 통째로 소스를 버무려서 약 불로 졸인 전형적인 요리.

         

       ‘먹어볼까.’

         

       우선 새우튀김이다. 타르타르 소스에 찍어서 한입 베어무니 바삭한 튀김옷과 촉촉하면서도 푹신한 새우의 맛이 입안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아…….”

         

       잊고 있던 현대의 맛이다. 대부분 기억나지 않았는데, 막상 먹어보니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한다. 최종 진 엔딩을 유일하게 클리어했다고 해서 이곳에 끌려오고, 노예가 되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그래도 프란체를 만났으니 됐어.’

         

       인제 와서 이 세계에 들어온 것에 불만이 생기진 않는다. 나도 불행한 악역의 삶을 살고 있던 프란체의 운명을 바꾸고, 키워내면서 즐거웠으니까.

         

       ‘다음은 생선조림.’

         

       가볍게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살점을 뜯어냈다. 맛을 봤더니…….

         

       “아.”

         

       이 맛은 그거다.

         

       한국의 고등어.

         

       ‘이게 왜…?’

         

       볼수록 수상하다. 어째서 익숙한 음식들이 이 자유의 도시 판테온에 있는 것인가? 심지어 사회 자체도 현대와 비슷하다.

         

       ‘뭔가 이상해.’

         

       설마 나 말고도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 걸까?

         

       “…아니겠지.”

         

       제작사에서 넣어둔 이스터 에그 같은 걸 수도 있다. 그 외, 아르몸 도게자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이름들도 잔뜩 있지 않았나.

         

       ‘이러면 나중에 동양도 기대되는데?’

         

       이 정도면 국밥이나 삼겹살도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모자라 일본, 중국 음식도 있을 수도 있지.

         

       갑자기 의욕이 솟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야 기운을 차릴 수 있다.

         

       “……,”

         

       그러나 문득 드는 생각.

         

       ‘프란체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제국에서 맛볼 수 없는 현대의 음식을 먹었을 때, 그녀의 반응이 궁금하다. 갑자기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

         

       이래서 상사가 아픈 거다. 뭘 해도 프란체가 떠오르고 어딜 가도 그녀가 생각난다.

         

       ‘상사병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감정이 과잉되어 눈시울이 맺힌다. 가슴이 시리고, 심장이 옥죄어온다. 나는 과일 맥주를 들이켰다.

         

       “후우.”

         

       시원하면서도 산뜻한 맥주가 들어가자 속이 풀리는 것 같다.

         

       ‘빨리 먹고 다음 곳도 가보자.’

         

       허겁지겁 음식을 해치운 뒤, 팁까지 얹어서 계산하곤 판테온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딜 봐도 다채로운 예쁜 건물. 하늘은 맑고 푹신해 보이는 새하얀 구름이 떠올라있다. 바다의 향기가 나서 비린내가 좀 섞여있지만, 폐가 정화되는 듯한 산소.

         

       “좋아.”

         

       잡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빨리 음식점을 고르자.

         

       나는 적당히 거리를 거닐며 상점가를 살폈다.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잡화점도 있고, 모험가 길드도 있다.

         

       ‘자유의 도시라고 해도 있을 건 다 있네.’

         

       하긴, 마수에게서 안전한 곳은 없으니.

         

       그러던 그때 근처에서 귓가로 들려온 말.

         

       “야, 그 요리사가 이번에 만든 새로운 거 먹어봤냐?”

       “아, 그거? 매장 열자마자 줄서서 먹어봤지.”

       “어땠는데? 진짜 극상의 맛이라고 마약을 넣은 게 아니냐는 의심도 받던데.”

         

       솔깃. 극상의 맛이라, 이거 고독한 미식가로서 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저기요.”

         

       나는 떠들던 사내 둘에게 물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자유의 도시에서 사는 시민인지라 경계가 없다. 오랜만에 이런 편안한 기분을 느껴보네.

         

       “아까 말했던 음식, 이름이 뭡니까?”

       “아, 그거요?”

       “네.”

       “치킨이라고 하던데요?”

         

       응?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치킨이요? 혹시 바삭한 겉 부분에 안쪽은 촉촉한 고기 요리입니까?”

       “네. 이번에 장종원이란 사람이 만들었어요. 맛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런, 설마 했는데 정말 있었다.

         

       나 말고도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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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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