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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2

       못된 귀족파의 은신처는 제국 수도의 깊은 어둠과 뒤섞여 딱 보기에도 사악하고 음울한 여관의 지하실에 존재, 하진 않았다.

         

       중앙정계의 귀족들이 모여 사는 대저택 단지를 쪼끔 벗어나면 수도에서 떨어진 영지를 가진 귀족을 위한 별장 단지가 존재했다.

         

       귀족파의 자칭 은신처는 그 넓은 별장 중 하나였다.

         

       뭐임.

         

       파스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쪽지 주소를 살펴봤다.

         

       세 번째로 큰 저택의 오른편에 위치한, 그림 공방이 마련된 별장.

         

       전혀 친숙하지 않은 주소 체계.

         

       “나, 잘못 왔나?”

         

       설마 길치였던 것?

         

       아니 그보다 주소지가 너무 주관적인 거 같아. 똑똑이 파스텔에겐 너무 버겁다고 할까.

         

       그래도 수도 거주자들에겐 직관적인지 행인에게 물어물어 찾아올 순 있었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된다.

         

       어째서 세 번째로 큰 저택이 어디예요? 라고 물으니 아, 거기? 라는 답변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걸까. 세 번째로 큰 저택이 어떻게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거야.

         

       하늘섬은 이 낙후된 수도와 다르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주소 체계를 사용하던데. 그래도 나름 계획도시라 그런가? 하늘섬은 도시라 부르기엔 대빵 크지만.

         

       파스텔은 별장 대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못된 귀족파와는 안 어울리게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길바닥을 둘러보다가 팔짱을 끼고 끙끙댔다.

         

       그러고 보면 약속 없이 막 들어가도 되나? 은신처 주소를 초대장처럼 받았으니 찾아온 거지만 이렇게 예의 차린 멀쩡한 곳일 줄은 몰랐어.

         

       막막, 어둑한 분위기의 바에 찾아가 수상쩍은 복장을 갖춘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텐더 앞자리에 앉고는.

         

       ―마타도르, 데킬라 없이.

         

       이런 있어 보이는 주문을 하면 잔을 닦던 바텐더의 눈빛이 변하더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뒤따라가면 숨겨진 비밀 공간이 드러나며 음울한 인상의 귀족이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러면 유능한 파스텔 총독 각하는 여유롭게 픽 웃으며 귀족을 말만으로 몰아붙이고, 귀족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밀리다가.

         

       ―오해였군요! 우리 귀족파는 위대한 파스텔 총독 각하를 왕당파의 수장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이러면 이러면.

         

       ―이제야 알다니. 이곳 공기의 수준 낮음은 이 모략가 파스텔에겐 맞지 않아.

         

       분홍 옆머리를 찰랑이며 내려보곤 잘못 온 쪽지를 툭 던져준 뒤 음울한 바를 그대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현실성 있던 미래!

         

       “그런데 이럴 수가!”

         

       파스텔은 비틀거리며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울은 무슨 깨끗한 길바닥은 주저앉아도 흙먼지만 묻었다.

         

       “햇님 짱짱한 미래가 있었는데 겪지 못하다니!”

         

       내 유능한 미래!

         

       손해 본 건 없지만 벌써부터 손해본 기분!

         

       “으아아!”

         

       그냥 오늘은 마시멜로나 먹을걸!

         

       유감스럽게도 파스텔은 너무나 유능했다. 돌아가면 혼날 준비하라 말했던 악마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 그대로 혼날 걸 알고 쫄래쫄래 딴짓하러 온 것이다.

         

       귀족파 은신처 얘기를 하며 마시멜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안 혼나고 쫀득쫀득 마시멜로만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인데!

         

       근데 이런 은신처도 아닌 은신처면 예의 차리고 방문 날짜 전달한 다음 와야 하는 게 정석.

         

       계획과 다르게 은신처 출입은 곤란해지고 마시멜로는 더 곤란해졌다.

         

       “내 마시멜로!”

         

       오늘 당장 먹고 싶었는데!

         

       문득 옆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잃었어?”

         

       돌아보자 연상인 갈색 머리 소녀가 있었다.

         

       미술용품이 가득 든 바퀴 상자가 눈에 띄었다. 편한 작업 복장엔 다양한 색감의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갈색 머릿결에 붙은 나뭇잎이 흔들렸다. 어디 산속에서 그림이라도 그리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위로해 줄 상대가 등장하자 파스텔은 바로 절망한 표정으로 변했다.

         

       “인생의 길을 잃었어요.”

         

       진지.

         

       “더 심각한 이유잖아?!”

         

       소녀가 입을 가리며 놀랐다. 갈색 눈동자로 파스텔을 살피더니 흙먼지 묻은 옷자락을 보곤 단호해졌다.

         

       “어른으로서 이대로 두면 안 되겠네!”

         

       소녀가 잽싸게 파스텔을 부축했다.

         

       으엣.

         

       그러더니 별장 대문을 벌컥 열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들어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고품격 그림들을 감상하면 마음이 풀릴 거야.”

         

       파스텔은 얼결에 따라 걸었다. 정제된 정원 옆으로 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그림 그려진 캔버스가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어라라.

         

       여태 조용 잠잠 고요한 인간관계만 겪다가 이런 사람을 만나니 다소 당혹스러움.

         

       “여기 돌부리 있으니 조심하고. 정원사에게 말해야 하는데 내가 자꾸 깜빡한다니까.”

         

       소녀가 옆에 마련된 대리석 길 대신 잔디밭으로 직진하며 투덜댔다. 파스텔은 돌부리란 이름의 잔디밭 장식 돌을 폴짝 뛰어 회피했다.

         

       근데 이게 정상 아닐까?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건 좋지 못하지만 친구들이 너무 차분한 건 사실이야!

         

       너무너무 차분한 나머지 파스텔은 의무감 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마음 편해지는 게.

         

       “저 갑자기 고향에 온 기분이에요!”

         

       파스텔파스텔 동산이라고 할까!

         

       “저거?”

         

       소녀가 근처의 캔버스를 가리켰다. 바닷속 산호초 무리가 그려진 그림엔 고향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었다.

         

       허억, 뜬금없이 뭔 소리인지 모르겠음.

         

       그런데 사실 대화에 논리는 안 중요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리고 호수가 완전 예뻐요!”

         

       찰랑이는 호수는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부자만 할 수 있는 특권!

         

       집마당에 호수 만들기!

         

       “나도 이 호수가 좋아!”

         

       소녀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미술용품 상자가 끌리며 달그락댔다. 긴 붓이 꺼내지더니 호수 끝에서 끝까지를 가리켰다.

         

       “원래는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쪽으로 전부 매입해서 작은 바다를 만들어 보려 했는데 그러다 파산한다고 다들 말려서 못 했어. 내 원대한 꿈을 몰라주다니. 오른 땅값을 생각하면 그때 해야 했는데! 참 다들 안목이 없지!”

         

       붓이 그대로 움직이더니 수직으로 파스텔을 가렸다. 소녀가 인체 비례를 재듯 살펴보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초상화 그려줄까?”

       “와아! 정말요?! 좋아요!”

         

       파스텔은 쫄래쫄래 따라가 별장의 부속 건물에 들어섰다. 그림 공방 같이 난잡하고 하얀 공간이었다. 미술용품 상자가 구석에 대충 놓였다.

         

       “집사! 술 한 잔! 이 아니고, 홍차 한 잔!”

         

       외친 소녀가 머리 끈을 입에 물고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다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발견하고 툭툭 떼어냈다.

         

       “내 이름값은 알지? 초상화는 선물이니까 그냥 받아 가도 돼.”

         

       으엣.

         

       갑자기 들어오는 나 알지?

         

       악마님도 성공하지 못한 나 알지?를 예술가 소녀는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파스텔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몰라요! 누구세요?”

         

       소녀가 웃긴 농담을 들었다는 양 픽 웃더니 한쪽 의자를 가리켰다.

         

       “저기 앉아. 인물화는 간만이긴 하지만 금세 그릴 순 있을 거야.”

         

       근데 착한 사람이니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어서 파스텔은 군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흥얼거리며 다리를 흔들었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앗, 맞아!

         

       “선물이면 제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도 되는 거예요?”

         

       소녀가 다양한 물감을 나눠 담았다.

         

       “현금화가 아니라? 선물해 줄 사람 있어?”

         

       물감이 다른 소재와 조금씩 섞이며 파스텔톤으로 하나씩 변했다.

         

       “완전 신세 지는 악마님이 있어요! 제 초상화 하나쯤은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그 오빠? 초상화 선물은 살짝 이르지 않아? 내가 너무 구식 마인드인가?”

         

       분홍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선물하면 안 돼요?”

         

       소녀가 싱긋 웃었다.

         

       “선물해도 되지! 선물이니까. 현금화할 거 같았는데 아니길래 그냥 해본 소리야. 생각보다 낭만적이네?”

         

       선물 현금화라니.

         

       그거 완전 나쁜 짓.

         

       “전 그런 생각 한치도 가지지 않았어요! 선물을 돈으로 바꾸는 건 정말정말 나쁜 짓이라구요! 선물해 준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한 탐욕 어린 행동이에요!”

         

       멜리사에게 매번 귀족답지 않은 탐욕적인 행동 좀 버리라고 눈치를 받고 있지만 파스텔은 충분히 양심적이었다.

         

       멜리사가 기준이 깐깐하다고 생각해.

         

       “그래?”

         

       소녀가 난감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붓질을 시작했다. 파스텔의 말에 담긴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어 곤란해진 듯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그림 선물한 사람이 현금화를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제국은 세금 제도가 너무 탄압적이니까 자산을 그림으로 변환해 두는 건 탄압에 맞서는 자유적 저항인 거지.”

         

       오잉.

         

       나쁜 탈세자나 할 법한 발언.

         

       성실 납부자인 파스텔은 전혀 모르는 맥락.

         

       파스텔톤 붓질이 캔버스를 채워갔다. 대화가 멈추고 시간이 흐르자 파스텔톤 초상화가 완성됐다.

         

       붓이 놓였다. 만년필이 초상화 아래에 제목을 적었다.

         

       파스텔 러브 크래프트 후작.

         

       어라라.

         

       어떻게 나를……?

         

       “완성! 오래 걸리지 않았지?”

         

       소녀가 만년필을 놓고 돌아봤다. 갈색 눈동자가 싱긋 웃었다. 그 속에 중앙정계의 이면이 담겼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레드그레이브 공작가를 이끌고 있는 나스타샤야.”

         

       정략가의 눈빛이 날카롭게 직시했다.

         

       “공화파 수장으로서 네가 정말 귀족공화정의 정신에 공감했는지 확인하겠어.”

         

       으에에?!

         

       위험한 곳에 온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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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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