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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2

     

    내가 대답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기슈타.”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함께 갈 수 없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

     

    기슈타는 좋은 친구다.

    솔직하고 듬직하며, 나를 신뢰한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더없이 신선한 경험이었다.

     

    쨍하고 햇빛이 내리쬐는 평원을 달리며 같이 자유를 느꼈다.

     

    항상 예도를 지키며 말의 뒷면을 신경 써야 하는 황실과는 천지차이였다.

     

    함께 모험을 떠나면 분명 즐겁겠지.

     

     

    조금 더 빨리 그녀를 만났다면 내 선택도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주치의가 아니었다면.

     

    ‘지금은.’

     

    기슈타와 새로운 세상을 탐사하러 가기보다, 황궁에 두고 온 아셀라가 신경 쓰인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생각이 듣고 싶다.

     

    왜 나를 떠올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월광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슈타는 내가 할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무리한 부탁을 했지, 라스.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해줘서.”

     

    기슈타는 남은 미련은 훌훌 털어버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떠나려고?”

     

    그녀가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혼자 떠날 생각은 없었다만… 네가 괜찮다면 부족민들과 함께하겠어.”

     

    “바라는 바야. 그들에게도 족장은 계속 필요하지 않겠어.”

     

    내 대답에 기슈타가 안도했다.

     

    “고맙다. 앞으로는 네 땅에게 신세 지게 되겠군.”

     

    기슈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요청이었다.

     

    “제국민은 이렇게 인사했었지.”

     

    “편한 대로 해.”

     

    기슈타가 씨익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부딪쳤다.

     

     

     

    우리는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

    · 노멀엔딩

    · ■■의 얼음은 녹지 않는다 94% → 0%

    · 삭제되었습니다.

     

    · 굿엔딩

    · 녹아내려, ■■고, 이어지다 92% → 0%

    · 삭제되었습니다.

    ―――――――――――

     

     

    두 개의 엔딩이 사라졌다.

    기슈타와 함께하는 모험가 루트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노멀엔딩은 해당 루트에서 굿엔딩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대안이라고 추측됐다.

     

    ‘남은 루트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인가.’

     

    세 번째는 아직 노멀도 굿도 0%, 하나도 진행되지 않았다.

     

    어떤 방향일지 아직은 감도 안 잡힌다.

     

    ‘전부터 있던 마지막 문장은 뭐지?’

     

     

    ―――――――――――

    · 히■■■

    · ■■■■ ■■■ ■■■ ■■■■

    1% → 7%

    ―――――――――――

     

     

    이쪽은 오히려 확률이 늘어났다.

    조금 전에 어느 쪽을 선택해도 똑같이 진행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루트를 선택해도 빠질 수 있는 4의 선택지란 뜻일까.

     

    ‘단서가 더 필요하겠어.’

     

     

     

    마을로 돌아온 기슈타는 부족민을 소집했다. 위엄 넘치는 족장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들을 통솔한다.

     

    “너희들 전부 들어라! 이제 어머니는 여기 안 계신다. 우리는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

     

    기슈타의 선언에 부족민들이 포효했다.

     

    간혹 정찰병이 후작령 마물의 숲까지 내려오기도 했었으니 어떤 곳인지는 알겠지.

     

    다들 마음에 든 모양이다. 거부하는 부족민은 없었다.

     

    “족장님, 거기에도 고기 있나!”

     

    “많이 있다! 이 남자가 그 땅의 주인이다! 우리에게 고기와 집을 준다고 했다!”

     

    기슈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부족민들이 환호했다.

     

    “땅 주인!”

    “부자였다!”

    “남자도 있나?!”

     

    “물론 남자도 있다! 있지?”

     

    나는 기슈타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너희가 아까워.”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용히 있던 브루노가 끼어들었다.

     

    “아래 땅, 고트베르크 후작령은 제 고향입니다. 괜찮은 기사도 있습니다. 무쟈크, 린칼, 제 친구들을 소개해 드리죠.”

     

    “소개!”

    “브루노 친구 만난다!”

     

    부족민들의 포효가 한층 높아졌다. 기슈타가 쾅쾅 도끼를 부딪쳐 이목을 집중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는다! 너, 너, 너! 다른 마을로 가서 짐 챙기고 입구 마을로 집결해라. 바로 출발해!”

     

    “족장님! 족장님도 우리와 함께 아래 땅에서 사나?”

     

    한 부족민이 질문했다.

     

    잠깐 머뭇거린 기슈타는 금방 이빨을 내비치며 씨익 웃었다.

     

    “물론이다! 나는 영원히 너희의 족장이다!”

     

    그녀가 호기롭게 도끼를 치켜들었다.

    부족민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천둥족을 정리한 후 우리 의사진을 확인하러 갔다. 휴고가 내게 보고했다.

     

    “치료 끝났습니다. 부상자들도 전원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감염자는?”

     

    “없습니다. 악마의 피는 소멸을 확인했습니다.”

     

    “수고했어. 아쉽지만 쉴 틈이 없겠어. 바로 황실로 귀환해야 해.”

     

    “이해합니다. 가시죠.”

     

    우리는 각자 탈것에 올라탔다.

     

    기사단이 타고 온 말은 다치거나 죽기도 했기에 부족한 대로 곰과 매머드에 꽉꽉 눌러 탔다.

     

    “중대장, 출발하자.”

     

    “복귀한다! 전군 이동 개시!”

     

    “새 땅으로 가자!”

     

    중대장과 기슈타의 외침을 신호로 진격이 시작했다.

     

    대인원이 저녁놀로 붉게 물든 얼음 평야를 내지르며 달려간다.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하하하하!”

    “작별이다!”

     

    천둥족이 신이 나서 소란스럽게 웃으며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어댔다.

     

    영 정신없는 승전보였다.

     

     

     

    그러기를 한참, 지치지도 않는 그들의 체력에 감탄하고 있으니 타냐가 내게 신호했다.

     

    “선생님, 하늘을 보시죠.”

     

    높은 빙산의 저편, 동쪽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허, 눈구름인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신년까지는 여유가 있곤 합니다만 올해는 빠르군요.”

     

    “한 번 치기 시작하면 1년 내내 몰아쳐서 여기와 후작령을 분단하는 눈보라 말이지.”

     

    여기 올 때도 이틀 발이 묶였었다. 이건 계산에 없었는데.

     

    “예. 잘못하면 못 돌아가게 됩니다.”

     

    “속도를 올려야겠어. 기슈타!”

     

    “알았다! 조련사들!!”

     

    부족민들이 늑대와 곰을 채찍질하며 페이스를 올린다.

     

    산등성이를 올라간다. 벌써 두 달 전에 지나온 길이다.

     

    역주행해서 돌아간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다.

     

    ―쿠르릉!

     

    하늘이 울린다. 어느새 눈보라가 우리를 잡아먹으려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경계를 넘는다. 변곡점을 지나니 내리막이 시작된다. 기사단이 대기하던 캠프와 멀리 마물의 숲이 보였다.

     

    “달려, 달려! 내려가라! 멈추지 마라!”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브레이크도 없이 최고속도를 낸다.

     

    돌풍이 휘몰아친다. 진동이 머리를 때려대서 놓을 뻔한 정신을 간신히 잡는다.

     

    “아― 라라라라라!!”

     

    기슈타의 호쾌한 외침이 산등성이에 널리 울려 퍼진다.

     

    부족민들이 그녀를 따라 외친다.

     

    돌풍이 강해짐과 동시에 점점 숲에 가까워진다.

     

     

    정신없이 달리던 와중.

     

    “윽!”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전열에서 곰 한 마리가 넘어지며 전복했다. 다리를 접질렸다.

     

    기수 부족민과 뒤에 타고 있던 우리 의사 한 명이 떨어지며 눈밭을 굴렀다. 순식간에 부대에서 떨어져 등 뒤로 멀어진다.

     

    “휴고!”

     

    다름 아닌 휴고였다. 나는 즉시 타냐의 어깨를 쳤다. 그녀가 바로 알아듣고 감속하며 크게 회전해 휴고를 향했다.

     

    “라스!”

     

    어느새 기슈타가 늑대로 갈아타 지원을 왔다. 본대는 이미 달려가는 중이다.

     

    우리를 잡아먹을 듯 거대한 마물처럼 입을 벌린 눈보라를 향해 돌진한다.

     

    “더 빨리!”

     

    산등성이를 역주행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신을 차리는 휴고. 눈밭에 떨어져서 다행히 부상은 크지 않다.

     

    “휴고, 잡아!”

    “선생님!”

     

    그를 잡아 태운다. 부족민은 기슈타가 잡아 태웠다.

     

    다시 방향을 틀지만 어느새 눈보라의 영역에 거의 접근했다.

     

    잡아먹히면 순식간에 파묻혀서 오도가도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린다.

     

    “제길.”

     

    곰을 닦달하지만 반대로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눈길이 거세진다.

     

    그때 챙, 타냐가 검을 꺼내들었다.

     

    “단장?”

     

    “아직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쓰겠지요.”

     

    타냐가 검에 정신을 집중한다.

     

    검날에 그녀의 마나가 스며들고 날카로운 검기로 제련된다.

     

    “후우.”

     

    침착한 호흡과 함께 단전에서 다시 한 번 마나를 순환하는 타냐.

     

    번뜩, 극점에서 눈을 뜬다.

     

    “하앗!”

     

    그녀가 이렇게 큰 목소리로 기합 넣는 건 처음 봤다.

     

    그리고 검에서 그런 청명한 빛이 나는 장면도.

     

    ―파아앙!!

     

    타냐의 검에서 폭발하듯 쏘아진 태풍이 우리의 앞에 지면을 부채꼴로 일순에 날려버렸다.

     

    하늘 구름에도 구멍이 뚫려 우리의 자리에 눈보라도 잠시 멈추었다.

     

    “길이 생겼군요, 다시 속도를 내겠습니다.”

     

    타냐가 착검하고는 다시 고삐를 쥐었다.

     

    나와 휴고가 입을 슬쩍 벌렸다.

     

    “방금 소드 오러였습니까?”

     

    내가 타냐의 어깨를 두드렸다.

     

    “소드마스터 축하해.”

     

    타냐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

     

     

     

    “오라버니, 돌아오셨어요!”

     

    후작령 북부 성벽에서 기다리던 네리아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눈보라가 갑자기 치기 시작해서 걱정했어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세상에, 머리 긴 것 좀 보세요.”

     

    네리아가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주니 긴장이 확 풀렸다.

     

    “나 힘들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얼마나 고생하셨으면 살이 쪽 빠지셨… 아니, 몸은 더 좋아지셨네요.”

     

    “사실 단백질 위주로 잘 먹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거든.”

     

     

    ―――――――――――

    근력 : 23

    체력 : 27

    마력 : 1

    마나 : 37

    신성력 : 42

    신앙심 : 100

    ―――――――――――

     

     

    근력과 체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군대 가면 건강해진다고들 말은 하지.

     

    “헉, 근데 저분들은 야만인… 인가요?”

     

    “우리 사병으로 쓰려고. 계약서 작성해줘. 자세한 설명은 브루노에게 듣고.”

     

    “사, 사병이요….”

     

    네리아가 성문 근처에 바글거리는 부족민과 곰을 보더니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라스! 내 매머드가 들어올 수가 없다. 저 큰 문을 열어줄 수 있어?”

     

    기슈타가 내게 뛰어와 급히 요청했다.

     

    “바로 열어줄게. 남은 건 여기 네리아랑 얘기해줘. 바빠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렇군. 황금의 소녀가 기다리고 있나!”

     

    “맞아.”

     

    기슈타가 내 어깨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땅은 내가 지키고 있으마. 안심하고 다녀와라.”

     

    “든든한데. 대신 너무 고기만 먹지 말고 야채도 먹으면서 지내고 있어.”

     

    “알았다!”

     

    나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몸을 틀었다.

     

    “오라버니, 바로 황실로 향하시게요?”

     

    “그래. 텔레포트 게이트를 준비해줘. 기사단은 천천히 복귀시키고. 이것저것 뒤처리할 일이 많은데, 좀 부탁할게.”

     

    “맡겨두세요. 저도 고트베르크의 일원이니까요!”

     

    듬직한 여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 길로 마차에 올라탔다. 타냐와 휴고가 함께했다.

     

    “돌아가자, 황궁으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칠성추님 300코인 후원 감사해요! 계속 재밌게 봐주셔서 기쁩니드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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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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