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33

     

    “지금부터 월광궁과 목휘궁의 승부를 진행하겠어요. 입회는 저 라우가 폰 뷔르템펠트가 금서궁의 명예를 걸고 공정하게 볼 것을 맹세한답니다.”

     

    라스가 천룡의 치료를 시작했을 즈음.

     

    금서궁의 귀빈실 테이블 한 자리에 제국의 세 황녀가 앉았다.

     

    “패배하는 궁의 주인은 승계권을 잃는다. 양측 다 동의하시는 사항이시죠?”

     

    “물론이야.”

     

    “그렇다.”

     

    아셀라와 헤이케가 시원하게 인정했다.

    두 사람 다 승부를 볼 생각이 가득했다.

     

    “둘 다 너무 정색하네. 모처럼 여자들끼리 모였는데 남자 얘기부터 할까?”

     

    라우가가 분위기를 풀고자 했으나 아셀라와 헤이케는 팔짱을 낀 채 서로를 바라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빨리 입회나 진행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나 참, 누가 가시방석을 가져다 놨담. 승부 내용은 정해진 게 없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할래?”

     

    “아셀라는 게오르크나 권터와 승부할 때 주로 전투를 행했지. 자신 있는 분야인 것 같더군. 특별히 무력 승부로 해도 좋다.”

     

    현재 월광궁에 최대 전력인 타냐가 없는 것을 알고 건넨 말이었다. 그 의도가 뻔히 보이는 아셀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권터와 한 건 무력보다 전략에 치중된 승부였어.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전략엔 자신 없나 보구나, 헤이케.”

     

    “아, 전략 모의전. 그것을 원하는가?”

     

    전략 모의전은 군대를 한참 운용한 헤이케에게도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한 번 승리의 경험이 있는 아셀라니 제안해오면 반갑다.

     

    “똑같은 걸 또 하면 재미없잖아.”

     

    이미 자신의 패가 열린 종목으로 이기기는 힘들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그녀는 게오르크나 권터처럼 만만하지 않다. 빈틈없는 여자였다.

     

    “그럼 무엇으로 하겠나.”

     

    대놓고 이쪽이 유리한 내용으로 유도하면 거부하겠지.

     

    술수는 이미 써놨다.

     

    아셀라가 한 통의 문서를 꺼냈다.

     

    문서에 찍힌 인장을 보고 헤이케의 눈이 얇아졌다.

     

    천황궁, 황제의 인장이었다.

     

    “칙령이구나.”

     

    황제가 작성한 문서였다.

    그 필체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라우가가 받아 내용을 읽었다.

     

    “이번 승부에서 기사의 사용은 일체 금지할 것.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는 쪽의 패배로 정한다.”

     

    권터의 탈락에서 승계전에 대한 황제의 인식에 변화가 어느 정도 발생했다.

     

    형제끼리 목숨 거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걸 꺼려하게 됐다.

     

    그를 유추한 아셀라는 미리 황제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알렸고, 직접적인 요청 없이 원하는 칙령을 받아냈다.

     

    이로써 헤이케의 장점은 봉인했다. 그녀의 강력한 기사단과 특기인 실전 경험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셔. 군주에 어울리는 자질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니.”

     

    헤이케는 아셀라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직감했다.

     

    황제조차 승부에 이용하는 대담함. 몇 년 만에 그녀의 정치력은 부쩍 성장했다.

     

    벌써 월광궁을 지지하는 귀족도 많아졌다.

    슬쩍 아셀라의 미래가 두려워지는 헤이케였다.

     

    “무력을 배제한다면 이건 어떤가.”

     

    헤이케가 말했다.

     

    “경제력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군주에게 뛰어난 경제 감각은 필수적인 법이다.

     

    헤이케 역시 자신있는 분야이기도 했고 황제에게 어필할 기회라 생각해 꺼낸 키워드였다.

     

    ‘예상대로야.’

     

    정확하게 아셀라가 원한 단어가 나왔다.

     

    물론 헤이케는 목휘궁을 합리적으로 운용하고 있지만 게오르크만큼 천부적이진 않다.

     

    경제 싸움이라면 자신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라우가가 짝, 손뼉을 쳤다.

     

    “소재가 정해졌네. 내가 입회자로서 승부 내용을 제안해볼까?”

     

    그녀가 생글대며 손가락을 펼쳤다.

     

    “뛰어난 군주는 제국민의 가계를 굽어살필 줄 알아야 하는 법. 한 달의 기간동안 누가 더 민생 경제를 성장시켰나로 정하자.”

     

    “구체적으로는?”

     

    “각자 제도 중앙구의 행정구역을 반씩 담당해. 경제 성장률이 높은 쪽의 승리야.”

     

    라우가가 방안을 제시했다.

     

    “제국의 금화는 위조 방지 명목으로 특수한 마나 가공이 되어있지. 흐름을 모두 추적할 수 있어. 사실은 세금 징수를 위한 거지만.”

     

    그녀의 말대로 제국에서 어지간한 밀매나 암거래, 탈세는 대놓고 불가능했다.

     

    세무관을 굴리면 그들이 원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단, 황궁의 재원으로 금화나 물건을 푸는 건 금지야. 오직 현재 편성된 예산에서 추가 정책만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해. 행동권은 음… 일주일에 세 개씩.”

     

    “합리적인 내용 같군. 구체적으로 몇 가지 정할 사안은 많아 보인다만. 이를테면 승자를 정할 기준은 무엇인가.”

     

    “단순히 행정구역 전체가 부자가 된 걸로는 안 돼. 어디까지나 부흥해야 하는 건 서민 경제야. 빈부격차도만큼 감점할 거야. 가중치는 전문가의 소견을 받아 정리해줄게.”

     

    라우가가 덧붙였다.

     

    “5주차까지 정책을 실행하고 장부 총 계산을 실시, 서로 마지막 최종 대응을 한 번 하고 다음 날 자정에 승부를 끝내겠어. 장부 계산은 제국의 표준 기록법을 따르고. 어때?”

     

    “아셀라, 어떻게 생각하나.”

     

    라우가와 헤이케의 대화를 지긋이 지켜보던 아셀라가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라우가, 네 입에서 고급스러운 단어가 나오는 일은 처음 보네. 마음에 들었어.”

     

    “얘, 나도 나름 황녀거든?”

     

    헤이케가 인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정당한 승부를.”

     

    아셀라 역시 그에 응했다.

     

    “화려한 승부를.”

     

     

     

    ***

     

     

     

    월광궁으로 돌아온 아셀라는 안뜰로 나가 지팡이를 들었다.

     

    “황녀님, 선생님께서 마법 사용은 엄금하셨습니다.”

     

    “나도 알아. 잠깐만 사용할 거야.”

     

    이번 승부에 쓸 단서는 이미 어느 정도 모여있었다. 주제를 예측하고 제국의 경제 흐름은 파악해놨다.

     

    하지만 좀 더 핵심적인 키를 잡고 싶었다.

    혹 이 한 달 사이에 일어날 사건을 알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후우.”

     

    그간 마력회로는 홀로 정돈해 왔으나 천리안 같은 고위계는 오랜만이었다.

     

    진을 그리니 벌써 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셀라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시전을 끝마쳤다.

     

     

    몸이 둥실 떠오르며 시야가 전환된다.

     

     

    ‘시간대를 잡는 요령을 알겠어.’

     

    그녀 앞에 늘어진 나무 같은 모양의 빛줄기가 시간선임이 분명했다.

     

    무수한 밧줄이 엮여 뻗어가는 모습. 전과 같이 끝이 잘린 줄기가 약 백 개.

     

    앞으로 나아가는 줄기는… 크게는 셋.

     

    줄기 하나하나가 셀 수도 없는 다발의 집합이다.

     

    ‘지금 내 시간이 여기니까.’

     

    가장 가까운 곳을 살피면 대략 한 달 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 안에 라스는 돌아올까?’

     

    잡념이 들어갔다.

     

    자기도 모르게 라스를 생각한 순간 화악!

     

    빛줄기가 빠르게 움직이며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아냐, 잠깐만!’

     

    아셀라가 당황하며 손을 뻗었다. 마력회로가 쓸데없이 과부하하는 게 느껴진다.

     

    먼 미래를 볼수록 마나가 더 많이 필요해진다. 한 달이면 충분하건만, 어느새 그녀의 손은 제일 맨 끝의 세 줄기 중 하나를 건드리고 말았다.

     

     

     

    ―마족이 몰려온다!

    ―마지막 싸움이다!

    ―무기를 들어라!

     

    한기가 그녀를 덮쳤다.

    익숙한 장소였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이다.

     

    “네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라스!”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릴 때까지 버텨야 해!”

     

    라스, 눈앞의 모험가들이 자신을 라스라고 불렀다.

     

    아셀라는 또 라스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종종 이렇게 그의 시점에서 미래가 보일 때가 있었다.

     

    “예정대로 4공대가 성벽에서 언데드 군대를 맡아. 타냐, 하늘에서 날아오는 놈들을 주의하고.”

     

    라스가 능숙하게 모험가들을 지휘한다.

     

    아셀라는 금방 깨달았다.

     

    이 라스는 자신이 아는 라스가 아니었다.

     

    ‘의사가 아니구나.’

     

    의학을 펼치고는 있지만 그녀가 아는 내의원의 주치의가 아니다.

     

    몸에는 투박한 벨트와 장비들, 손에는 성유물로도 쓸 수 있는 검을 들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며 마물과 싸우는 모험가다.

     

    “온다!”

     

    마족과의 전투가 시작됐다.

    치열한 싸움 속에서 활약하는 라스. 그와 함께하는 한 명의 여전사가 눈에 띄었다.

     

    푸른 장발을 휘날리는 여인. 야만족으로도 보인다.

     

    라스와는 오래 합을 맞춰왔는지 서로 눈짓만으로 의도를 파악하고 적을 돌파한다.

     

    ‘…뭐야.’

     

    어쩐지 연인 같아 보이는 모습에 아셀라는 불쾌해졌다.

     

    “그걸 써야겠어.”

     

    불리한 전황을 뒤집기 위해 라스가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그가 뿔피리를 불자 구름을 뚫고 천룡이 나타나 높은 빙산을 무너트려 눈사태를 일으켰다.

     

    천룡의 따스한 마나가 눈을 녹이고 물보라를 일으켜 마족의 대군을 일순에 휩쓸었다.

     

     

    이어지는 전투 끝에 낭보가 들려왔다.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렸다는 소식이었다.

     

    마족이 후퇴한다.

     

    필사적으로 지켜낸 땅을 여전사와 함께 바라보는 라스.

     

    격렬한 전쟁의 증거가 되어, 북부의 지형이 한참이나 바뀌었다.

     

    천룡 덕에 녹아내린 빙산이 흘러내려 마물의 숲을 없애버렸다.

     

    대량의 물은 후작령의 장강으로 흘러들어 새 호수와 강을 이루었다.

     

    멀리 여태 꽁꽁 닫혀 가려져 있었던 북부 얼음 평원이 육안으로 보였다.

     

     

    녹아내려, 흐르고, 이어졌다.

     

    그 광경을 함께하며 라스와 여전사가 손을 잡았다.

     

     

    불쾌해져 더 참을 수 없었던 아셀라가 간신히 의식을 튕겨냈다.

     

    ‘왜 내가 아니라 쟤 손을 잡아?’

     

    아무리 자신이 아는 라스가 아니더라도 열 받는 건 받는 일이었다.

     

    저 라스는 태어나 내의원은커녕 황궁 안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런 덩치 큰 애랑도 있는데.’

     

    자신과 함께하는 미래도 있을 게 분명하다.

     

    아셀라는 당초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다른 시간선을 찾았다.

     

     

    시야가 전환됐다.

     

     

     

    ‘…또 여기.’

     

    언젠가 봤던 장면이다.

     

    고트베르크 후작령의 황금 장미밭.

     

    그곳에 한 여성이 긴 흰머리를 휘날리며 뒤돌아 서 있다.

     

    전에 봤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천천히 걸어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의식이 끊겼다.

     

     

     

    ‘후우.’

     

    아셀라의 마력회로가 따끔거렸다.

     

    쓸모없는 정보에 정신을 너무 허비했다.

     

    ‘라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설마 지금도 다른 여자에게 꼬리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진짜 그랬으면 네게 말도 못 할 벌을…

     

    ‘…아니야.’

     

    여태 그랬으니까 그가 편지 한 통 안 보내는 거잖아.

     

    참자, 이제는.

     

    벌은 잘해준 다음 내려도 늦지 않으니까.

     

    ‘그보다, 단서.’

     

    여태 라스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겨우 원래 목적을 떠올린 아셀라는 고개를 붕붕 젓고 승부에 쓸 재료를 찾기 위해 시간선을 뒤적였다.

     

     

     

    ***

     

     

     

    “1주차의 결과, 양측의 정책으로 헤이케의 행정구는 0.84퍼센트, 아셀라의 행정구는 0.72퍼센트 성장률을 보였어. 둘 다 대단하네.”

     

    승부가 시작하고 1주일, 라우가가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민생 경제를 잡기 위해 헤이케는 상인 길드를 중심으로 내수 시장 활성화를 노렸고, 아셀라는 타 구와의 거래량을 높이는 위험수를 사용했다.

     

    그 결과는 근소하게 헤이케가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럼 2주차에 추가할 정책을 제안해줘.”

     

    헤이케와 아셀라가 라우가에게 각자 문서를 전달했다.

     

    내용을 확인한 라우가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는 발언했다.

     

    “헤이케의 정책부터 발표할게. 첫째로…”

     

    두 사람의 정책은 즉시 지방 관청과 상인 길드로 내려가 실행된다.

     

    헤이케의 2주차 정책도 빈틈없이 꼼꼼했다.

     

    “다음으로 아셀라. 첫째, 각 구는 상인 길드를 통해 각 가정에 별도의 지정이 있을 때까지 오렌지를 배급하여 저장 및 섭취를 의무화한다.”

     

    그 말을 들은 헤이케도 의문이 들었다.

     

    오렌지는 제도에 수입하기 어려워 비싸다. 재정을 복지로 푸는 건 금지니 사실상 서민들에게 비싼 과일을 강매하는 형태가 된다.

     

    필요 없는 소비가 늘어나서 주급으로 생활하는 서민들은 오히려 삶이 힘들어진다.

     

    “이 정책이 틀림없지, 아셀라?”

     

    라우가의 확인에 아셀라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맞아, 계속 읽기나 해.”

     

    그렇게 2주차의 정책도 결정됐다.

     

     

    사흘 후, 제도 중앙구에 독감이 유행하며 생산력이 떨어지고 치유비 지출이 크게 올라갔다.

     

    다만 아셀라의 행정구역은 면역력이 높아진 덕에 환자가 적어 헤이케에 비해 지출이 확연히 적었다.

     

    보고된 숫자를 읽는 아셀라에게 시녀장이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아삭, 아셀라가 오렌지 조각을 앞니로 깨물며 대답했다.

     

    “전에 알려줬어. 주치의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후원 감사해요!
    Ayanami님 100코인 후원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감동이에요! 항상 읽어주셔서 기뻐요!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