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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3

        

         “으그읏…!”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면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는 건 왜일까? 아프기는커녕 시원하기만 한데.

         

         누운 몸이 그대로 잠겨 들어가는, 자력으로 일어날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반투명한 물침대에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안 하는 채로 빈둥거리며 천장 타일 개수나 세고 있어도 업무 시간에 포함된다는 건 굉장히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모르나… 또 익숙해지면 이만큼 즐거운 것도 없었으니.

         

         같이 일하는 팀원들이 아니었다면 진짜 하루 이틀 정도는 방밖으로 나가지 않았을지도…?

         

         – 바라건대,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자꾸 심화시키는 건 자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켜보는 제가 다 걱정됩니다. –

         

         “……난 지금보다 더 건강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멈춘 채, 잔소리를 흘러 넘기며 방에 딸린 개인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창고에 웬 고급 물침대에 욕실까지 있냐고? 이것들… 여기 명칭만 물류 창고로 잡아 놨지, 실제로는 연구원들이 몇 달씩 틀어박혀서 일하는 통제 구역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끼익…!

         쏴아아….

         

         “……흐흥♬♩”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돌린다는 행위 자체에서도 사람이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 옛날의 나는 믿지 않았을 테지만.

         

         하지만 단순히 터치 패널을 두들겨서 정량 급수되는 물을 쓰는 것과, 시원하게 수압을 높여 놓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즐기는 것.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파라다이스의 상징색이 황금색이었다면 에나마는 순백純白.

         자칫 스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실 이것들이 벌이는 비밀 연구들을 생각하면 스산한 게 맞는 색깔이나, 욕실에 적용할 경우 이만한 청량감을 선사하는 색채도 없었다.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비치된 수건을 꺼내 얼굴을 한 번 파묻었다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확인했다.

         

         눈동자에도 생기가 넘치고 혈색도 더할 나위없이 좋다.

         

         이게 도대체 어디를 봐서 잘못된 생활 패턴의 결과물이라는 걸까? 누가 봐도 이상적인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어. 음.

         

         ‘…이 방면으로 생각하는 건 그만할까.’

         

         뭐,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돌아간다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받는 대접은 나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수칙만 준수하면 따로 간섭이 없는 것도 적진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주는 스트레스를 대부분 경감해주었고.

         

         우선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침대로 돌아온 나는.

         느긋하게 씻는 동안, 제로가 멋대로 손질해준 슈트의 착! 하고 휘감겨오는 착용감을 만끽하며 방문을 나섰다.

         

         좋아. 슬슬 일할… 일하는 척하러 갈 시간이다.

         

         

         

         

         삑—. 삑—. 삐익…!

         

         무슨 병실 모니터링 장비도 아니면서 연결된 상태를 알린답시고 규칙적인 비프음을 끊임없이 내는 서버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혼자서 빠르게 정리해야 할 숙제였다면 직접 손을 처박고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는 걸로 장땡이겠으나. 이건 개인기를 자랑할 일도 아닐뿐더러, 검수가 끝난 자료는 곧장 메인 프레임에 공유되도록 첫날에 세팅해 놨기에.

         

         행여라도 진짜 치명적이고 중요한 데이터가 저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매번 복원한 물건을 꼼꼼히 살피고 넘겨야 한다.

         

         “음….”

         

         실제로 작업 수행에 필요한 코드를 입력해야 할 때는 자판을 두들기는 흉내만 내면서, 머리속으로 완성한 신호를 내보낸다.

         

         지나치게 고성능인 제로를 희한하게 쳐다보던 추적자도 내가 애 등판을 열어서 컴퓨터를 꺼내는 걸 보더니 알아서 납득하길래 여기서는 이런 방식만 쓸 예정이었다.

         

         일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황량한 들판…이라기보다는, 키우던 작물을 수확하지도 않고 갈아엎어진 밭을 상상하면 편하다.

         

         우리의 일은 거기를 다시 조심스럽게 파헤친 후, 가급적 멀쩡한 물건을 골라내서 주인에게 돌려주고. 박살 난 파편이 있다면 하나하나 붙여서 원래 형태를 되찾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 내 이름이 박혔거나, 지문이 남은 게 튀어나오면 몰래 태워버리는 거고.

         

         ……어째 풀어 쓰고 나니 일머리가 있는 게 아니라 협잡질과 잔재주만 늘어가는 기분인데, 내가 뭐 천년만년 회사원으로 살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없겠지?? …제발.

         

         

         [ 파라다이스 & 에나마 합작 프로젝트, 대규모 수직 농업 플랜트에 납품되는 더 효과적인 유전자 변형 농산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개발을 위한 협업 초안서. ]

         

         [ …시설 방공망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포대와 기계화 병력이 엑사테크 제품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잠재적 위협이 표면화될 때 만일 그 상대가 엑사테크라면 연구소를 방어하는데 큰 애로사항이…. ]

         

         [ 일시적으로 남성기 크기를 확대해주거나, 여성기의 감도를 증진시키는 약물의 경우. 현재 기술력으로 구현화 한다면, 인체 열량을 소모해 즉각적으로 세포를 복제했다가 괴사 시켜야 하므로 오히려 영구적인 시술보다 훨씬 비싼 생산단가가 소모됨. ]

         [ 따라서 델타 섹터 연구진 일동은 시제품 BAGR-67을 마지막으로 이 안건에 대해 더 이상 인적 자원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입안자를 색출해 처벌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 ]

         

         

         “허…. 이게 다 뭐람.”

         

         군데군데 이가 빠진 채로 건져진 자료들을 쓱 확인하고 올려 보냈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에 대규모 연구 시설이라고, 아직까지는 눈 치켜 뜰 만한 위법 행각이나 내가 관련되었던 인체실험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이게 전부 죽은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게 떠오르자 새삼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 죄가 있다면 있을지도 모르고, 유일한 생존자의 가책이라 하면 또 그렇게도 느껴진다.

         

         다짜고짜 기동타격대부터 보내서 입막음하던 녀석들이 정작 날아간 자료는 아까워서 용병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되살리려 한다니… 아이러니 하다 해야 할지. 비웃어야 할지.

         

         “…A2(A열 2행) 서버랙 작업 끝났어. 나중에 다시 볼 거면 보고, 아니면 말고.”

         

         “고… 고마워요 누나.”

         

         꾸벅 고개를 숙이는 꼬맹이한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을 담아서 손을 휘저어주었다.

         

         지금 우리는 약간의 업무분담을 실천하고 있었다.

         내가 따로 깨작대면서 적당히 제출할 수 있는 성과를 내고, 그동안 나머지 둘은 대대적인 복구 공작을 준비하는 걸로.

         

         요 며칠간, 켄은 자신의 컴퓨터와 마리나의 머리(…)에 입력할 자료 복구용 알고리즘(Algorism; 공식, 혹은 입력되는 데이터에서 원하는 출력 값을 뽑아내기 위한 연산 규칙의 집합)을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확실히… 내가 일일이 모든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하거나 분류하면서 삭제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시설의 관리자 권한과 어비스 다이브를 활용해서 모든 서버 데이터를 일괄적으로 날려버리고 재빨리 도망갔으니.

         

         전체적인 복원 과정을 관통하는 큰 연산 규율을 확립할 수 있다면 작업 효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건 분명했다.

         

         …덧붙여서 그래야 우리의 애물단지께서도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으하아아…! 세상에 급수 제한도 없이 자유 이용이 가능하다니! 이래서 대기업 대기업 하는구나…. 나도 취직시켜주지 않으려나!”

         “…모르죠. 배후 색출에 성공했을 때 보수가 단순한 크레딧이 아니라면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 수도오오오—…?!!?”

         

         양반은 못되는지 당사자가 바로 나타났다.

         아무래도 나와 마찬가지로 물을 펑펑 써제꼈는지, 수분기 가득한 속옷 차림새로 나타난 마리나가 손을 흔들었다. 켄이야 그 꼬라지를 보고는 냅다 쾅! 하고 키보드에 얼굴을 처박았고.

         

         건강미 넘치는 피부와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흉부는 분명 어마어마한 눈요깃거리긴 했는데…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일까요?

         

         “거 옷 좀 차려 입지…?!”

         

         “아이~ 우리끼린데 뭐 어때! 그보다 밥부터 시키고 하지? 나는 요즘 배달시키면 저기 추적자 형씨가 먼저 딱 받아서 검사하고 건네 주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 꼭 권력자가 된 기분이야.”

         

         이마빡이 새빨개진 불쌍한 애를 대신해서 핀잔을 줬으나, 싱글벙글이라는 단어가 아예 표정에 달라붙은 그녀는 이젠 내가 쏘아붙이는 것마저 친근함의 표현으로 알아듣는지 웃어넘겼다.

         

         그래, 뭐. 최상급 숙소에 식사도 원하는 대로 제공. 이 넓은 곳에서 해방감을 충족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따져보면 24시간 감시당하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다.

         

         사람 성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역시 외향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 마리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런 식으로나마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멘탈 관리에 긍정적일 테니, 조금은 이해해주도록 하자.

         

         ……그런데 너는 아직 포렌식 관련 작업은 할 줄 몰라서 일 안 하잖아 인마?! 왜 혼자 즐기기만 하는데!

         

         “아! 오늘은 어디 에나마의 맛을 한 번 느껴볼까? 동양계 식당으로 검색하면 되려나?”

         

         “…동양계가 아니라 일식이라고 검색해. 내 건 돈까스에 우동…. 아니 잠깐만, 메뉴부터 봐 바.”

         

       

       

         여기까지가 자료 복구 의뢰 2일차 점심 무렵, 팀은 지극히 순항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0.5화의 비애.

    최근 입을 벌리는 데도 한 쪽 턱이 뻐근하고, 자는 데도 많이 불편해서 충치인가? 했는데.

    이거… 사랑니가 남아있는 쪽이 아프네요…? 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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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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