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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그나마 남아있던 별빛조차 어둠으로 물드는 새벽.

       

       지난 시간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하늘에는 칠흑 같은 어스름만이 가득했다.

       

       서늘한 공기는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서 부서진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밤이었다.

       

       모두가 지친 하루를 지나고, 각자의 꿈나라에서 다음날을 살아갈 힘을 얻는 시각.

       

       하지만 그런 때에도 아직 잠들지 못하며 뒤척이는 소녀가 있었다.

       

       

       “……”

       

       

       부드러운 갈색을 담고 있는 머리칼.

       

       레이첼은 가만히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존재 때문이었다.

       

       

       새근새근…

       

       소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곳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도련님이 존재했다.

       

       그는 넓게 뻗은 팔로 레이첼의 몸을 부드럽게 품고 있었다.

       

       

       가까이 밀착한 상태의 두 사람.

       

       체온은 맞닿으며 부드럽게 뒤섞인다. 서로를 스치는 살결은 묘한 감상이 들도록 만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꽉 쥐었다.

       

       얇은 잠옷으로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소녀의 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이러다가 도련님께서 심장소리를 듣고 깨어나시는 건 아닐까.

       

       나름 진지하게 걱정하는 레이첼.

       

       그녀는 조금이라도 안정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러나…

       

       

       ‘어떡하지… 너무 좋아서, 떨림이 멈추지를 않는데…’

       

       

       범람하는 감정을 막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있는 기분은, 전부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환희를 주었으니까.

       

       

       레이첼은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도 도련님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는 때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함께 침대에 눕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게 모르게 가슴을 짓누르는 충족감. 소녀는 그것을 곱씹으며 어깨를 떨었다.

       

       

       ‘……따뜻해.’

       

       

       소녀는 넓직한 품으로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달콤한 온기가 전해진다.

       

       코끝으로는 특유의 시원한 겨울냄새가 일렁인다.

       

       레이첼은 잠시 도련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중독적인 내음을 맡았다.

       

       

       자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음습한 면이 있었다니.

       

       소녀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소년의 체향을 놓지 못했다.

       

       

       ‘분명 아무런 욕심도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는데……’

       

       

       레이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도련님의 곁에 서기에,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감히 넘보아서는 안되는 자리였다.

       

       소년으로부터 삶을 구원받고, 행복이라는 것을 배우고,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주제넘게 그 이상을 바라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도련님의 안온함을 소망하려고 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기를 기도하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복잡하게 이어지는 상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손끝을 찌른다.

       

       자꾸만 마음이 아려왔다.

       

       이렇게 소년으로부터 온기를 받을 때마다.

       

       행복하면서도, 목을 조여오는 슬픔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스스로가 나약해지는 순간이면.

       

       레이첼은 몽롱한 꿈결에 취한 채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미래를 그려보고는 했다.

       

       

       ‘어땠을까.’

       

       

       만약 자신이 평민이 아니었더라면.

       

       부모도 없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어가던 거지가 아니라, 한 귀족 가문의 영애로 태어났다면.

       

       그래서 당신과 동일한 자리에서 눈을 맞출 수 있었다면.

       

       당신의 괴로움을 조금 더 이해하고, 당신의 존재를 품어줄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더라면.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삶이란 이미 시간으로 꽉 채워진 종이와 같아서, ‘만약’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을 여백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이 짧은 극에서 소녀가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락받은 역할이 단역이었기에.

       

       소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떠나는 순간이 오면.

       

       잠깐이라도 그의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웃음 지으며, 비루한 춤으로 사라지는 것이 소녀의 역할이었다.

       

       

       ‘……저는 그저 도련님께서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그거면 괜찮을 것 같아요.

       

       붉은 입술 사이로는 작게 독백이 흘러내린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이었지만, 단역으로서 유일하게 바라는 소망이기도 했다.

       

       

       -부스럭…

       

       레이첼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지는 생각을 애써 정리했다.

       

       그리고는 꿈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도련님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깊게.

       

       더 깊게.

       

       소년의 체온이 자신을 온전히 물들이도록.

       

       

       ‘도련님…’

       

       

       레이첼은 가만히 눈꺼풀을 덮었다.

       

       부드러운 갈망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로, 더 없이 아늑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새벽을 살았다.

       

       

       

       ***

       

       

       칠흑으로 가득했던 밤을 지나고, 세상도 아침을 찾는 시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살이 눈가를 간지럽힌다.

       

       나는 반짝이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결국 부스스한 눈을 뜨며 하루를 맞이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잠결 때문인지.

       

       의식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게 번져있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통에 미간을 짚고 있으면, 가슴팍으로 따스한 숨소리가 닿는 것이 느껴진다.

       

       

       “……아.”

       

       

       깜빡이는 시야 속으로 비치는 것은 갈색의 머리칼.

       

       나는 뒤늦게 흐트러진 정신줄을 잡았다.

       

       깨어나자마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소녀. 잔잔한 숨결을 내쉬고 있는 레이첼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내 품에 안긴 채로 잠들어 있었다.

       

       투명한 빛의 눈동자는 눈꺼풀 너머로 가려지고, 선홍빛 입술은 새침하게 다문 모습.

       

       가느다란 호흡은 잠잠한 미동으로 맺어진다.

       

       소녀는 마치 새벽녘에 살랑이는 수풀을 닮아있었다.

       

       

       “……”

       

       

       나는 그런 레이첼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기에.

       

       

       마치 잔잔한 풍경화를 보는 듯한 감상이 들었다.

       

       평화롭고, 선선하고, 조용해서.

       

       이 시간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허나, 한동안 그대로 이어질 것만 같았던 순간도 그닥 오래 가지는 못했다.

       

       

       ‘아니, 잠깐만…’

       

       

       다름이 아니라 다소 문제 있는 자세 때문이었다. 

       

       간밤에 뒤척이기라도 한 것인지, 우리의 몸은 서로에게 바짝 달라 붙어있는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면적이 넓을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다소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굴곡진 부위들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약간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이런 꼴로 누워있는 거야…?’

       

       

       내가 레이첼을 침대로 끌어들인 부분까지는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 레이첼은 내가 잠들고 나면 돌아가겠다고 했었는데, 어째서 함께 잠들어 있는 것일까.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나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얼핏 내린 시선에서, 소녀를 가두고 있는 팔이 보였으니까.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었으니,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가 없었겠지. 결국에는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이겠고.

       

       

       ‘……미치겠네.’

       

       

       어제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뒤늦게 몰려오는 수치심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무리 피곤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브레이크라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괜히 레이첼을 깨우기만 할 것 같았기에 꾹 참았다.

       

       

       “하아…”

       

       

       잠깐을 빗겨나가는 한숨을 뒤로.

       

       나는 천천히 팔을 빼내며 이불에 묻혀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다행히도 레이첼은 깨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다리는 침대를 벗어나, 지면을 디딘다.

       

       

       침대에는 흐트러진 모습의 레이첼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를 제대로 눕혀주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다시 한 번 눈길을 빼앗길 뻔 했지만,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등을 돌렸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었기 때문이지,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비울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연무장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

       

       

       “이야~ 망나니!”

       

       

       귓가에 울리는 경박한 목소리.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연무장 바닥에 누워있던 나는, 문득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날아간 방향에는 금태양이 서있었다.

       

       껄렁이는 자세로 어깨를 털고 있던 녀석은, 눈이 마주치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금태양.”

       

       “오늘도 역시 나와있었구나?”

       

       

       녀석은 주변을 기웃거리는 듯 싶더니, 이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친한 척에 미간을 굽혔지만.

       

       금태양은 방긋거리며 웃어 넘길 뿐이었다. 

       

       

       “어제 연설 멋있었다. 감명 받아서 눈물까지 흘릴 뻔 했잖아.”

       

       “그놈의 호들갑은…”

       

       “진짜라니까? 다른 학생들도 다들 움찔했을 거라고. 거기다가 센티널이라니. 멋진 이름이잖아.”

       

       “흠.”

       

       

       센티널(Sentinel).

       

       다소 유치한 감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원래 이런 감성이 조금 들어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나는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뭐, 괜찮았다니 다행이군.”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모임을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응원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 녀석도 들어오는 건데.”

       

       “엥?”

       

       

       마치 처음 듣는 얘기라는 것 마냥 물음표를 띄우는 금태양.

       

       얘는 참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걸까.

       

       당황이 서린 표정을 향해서,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도로 일러주었다.

       

       

       “네 녀석도 들어오는 거다.”

       

       “나는 그런 얘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말한 적이 없으니까.”

       

       “……?”

       

       “불만 있나?”

       

       

       나는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덧붙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 녀석은 나름 쓸만한 전력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랑 열 번을 붙어서 한 두 번 정도 승기를 잡을 정도는 되었으니까.

       

       

       앞으로는 무력이 필요한 사건이 자주 닥쳐올 테니.

       

       적어도 그런 시기에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녀석도 이런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면, 홀로 다니는 것보다 울타리 안에 속해있는 쪽이 나을 것이고.

       

       ……딱히 걱정이 되어서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정말. 맹세코.

       

       

       “아니 선생님. 상의도 없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꼬우면 귀족해라.”

       

       “아카데미의 학칙상 학생들의 신분은 모두 동등하잖아!”

       

       “세상에. 그걸 진짜로 믿는 머저리가 있었군.”

       

       “시발…”

       

       

       금태양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모습을 보니 불쌍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나는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센티널에 들어오는 게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다소 귀찮기야 하겠지만, 그런 만큼 혜택이 존재할 예정이니까.”

       

       “……혜택?”

       

       “그래, 혜택.”

       

       “한 번 말이나 해봐.”

       

       

       혜택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금태양.

       

       나는 녀석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지. 앞으로 매일 대련 상대가 되어주겠다. 너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남들이 넘보지 못할 정도의 병기로 개조……”

       

       “하겠냐!!!!!!”

       

       

       이걸 안 넘어오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항상 느끼는 부분이지만,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지칠 때면 나약하고 나태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 오지만.
    언제나 간신히 그런 유혹들을 뿌리쳐내고는 합니다.

    제가 언제까지 강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떼었던 첫발이 당신들을 울릴 만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읽으러 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펜을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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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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