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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노상에서 야영할 때의 방범 대책이라고 해봤자 솔직히 말해서 별거 없다.

         

        그냥 야영지 주위에 발목 정도까지만 오는 짧은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잘 보이지 않는 얇은 끈 같은 것을 매달고.

         

        끈 중간에는 중간중간 방범용 방울이나 소리가 잘 울리는 물건 따위를 매달아 놓으면 그걸로 끝.

         

        이 정도만 해 놔도 조심성 없는 도적 무리는 알아서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작정하고 우리 목숨을 노리러 오는 암살자 같은 게 상대라면 당연히 그 방범 대책도 별 의미는 없겠지만, 설마 에단을 상대로 암살자를 보낼 정도의 간 큰 인간은 없겠지.

         

         

        “이 근처는 숲이나 산 같은 것도 없고, 근처에는 딱히 마을이나 영지도 없으니까. 아마 도적 같은 건 안 나타날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방범 대책은 제대로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 당연히 해두긴 해야지.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에단의 말대로 도적 같은 건 없을 거고, 기껏해야 하급 몬스터 정도나 튀어나올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이런 건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누가 루아갤에 올려놓은 ‘방범 대책 통계 자료’를 보면, ‘방범 대책’을 해놓고 야영을 할 때와 안 하고 야영을 할 때 위험과 조우할 확률이 다르다는 유의미한 통계도 있었으니까. 대책을 해놓는 쪽이 통계적으로 더 안전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즉, 귀찮지만 이렇게 방범 대책을 해놓는 것만으로도 굳이 쓸데없는 위험을 겪을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뜻이었으니 해놓아서 나쁠 건 없었다.

         

         

        ‘게임 속에서는 그냥 귀찮아서 생략했던 때가 많았지만.’

         

         

        일단 일일이 말뚝을 박고 끈과 방울을 묶는 행위가 은근히 노가다에 가까운 느낌인 데다가, 중반 스토리에만 진입해도 방범 대책 자체가 별 의미 없을 만큼 강해져서 상관없었다.

         

        몬스터가 나오든 도적이 나오든 그냥 전투 한두 번 치르는 게 방범 대책용 말뚝을 박는 것보다 플레이 시간상으로는 훨씬 더 빨리 끝나기 마련이었기에.

         

        그리고 도적 소탕은 제법 괜찮은 파밍 이벤트라서 일부러 대책을 안 세우고 야영한 적도 자주 있었고. 특히 실레나랑 야영할 때마다 나타나는 네임드 도적, ‘엘프 사냥꾼’을 잡는 게 효율 좋은 파밍이었다.

         

         

        물론 그 세계가 현실이 된 지금에서까지 그런 목숨을 담보로 한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야영지에는 비전투 요원인 이사벨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방범 대책을 제대로 안 했다가 만약에라도 이사벨이 도적이나 몬스터 따위에게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나는 아마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지.

         

        물론 에단도 마찬가지고. …뭐, 얘는 워낙 강해서 습격당할 걱정 같은 건 별로 안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바닥에 하나둘 말뚝을 박으며 야영장 주위를 긴 원처럼 감싸고 난 후 방범 장치에 묶을 가는 새끼줄을 자르기 위해 품속에서 장도를 꺼내려는 순간.

         

        평소 손에 쥐던 은장도의 얇은 손잡이가 아닌 조금 두꺼운 느낌의 검이 내 손에 감겨왔다.

         

        잠깐, 이거 설마….

         

         

        “아.”

         

        “왜 그래, 릴리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릴리스 손에 들고 있는 거, 저번 대련에서 루크 상대할 때 주웠던 그 단검 아냐?”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평가전 대련에서 루크를 도발하기 위해 챙겨두었던 세라핀의 선물 단검.

         

        깜빡하고 그 단검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내 입에서 무심코 탄식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아니, 난 진짜 돌려주려고 했어. 심지어 아카데미 교회도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

         

        근데 응급 환자는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보호자를 제외하면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어떡하냐고.

         

        그렇다고 루크의 물건이자 세라핀의 선물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맡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에는 전해주지 못하고 갖고 있다가 이렇게 귀갓길까지 끌고 와버린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정말로 루크의 단검을 빼앗은 것처럼 되어버리잖아.’

         

         

        설마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마자 세라핀에게 도둑년 소리 같은 걸 듣는 건 아니겠지.

         

        아니, 세라핀 성격에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실망 정도는 할 가능성은 나름대로 충만했다.

         

        오해하지 않게 잘 갖고 있다가 개학하자마자 바로 돌려주는 수밖에.

         

         

        “돌려줄 거지, 릴리스?”

         

        “네, 당연한 말씀을 하시…”

         

        -스윽.

         

        “…는, 군요….”

         

         

        근데 잘 잘리긴 하네. 역시 황녀산 물건이라 그런가.

         

        변경백 영애에게 받은 거에 비하면 확실히 품질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돌려줄 거지, 릴리스?”

         

        “…물론입니다, 에단 도련님.”

         

        “새로운 단도가 필요하면 내가 사줄게. 블랙우드 영지에는 대장간이 없긴 한데, 근처 영지에는 실력 좋은 장인들이 많이 있으니까.”

         

        “…네, 에단 도련님.”

         

         

        과연 그 장인들이 세라핀이 직접 루크를 위해 수배해서 만든 이 단도를 만들 정도로 실력이 유능할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버렸다는 건, 에단에게 말하지 않았다.

         

         

         

       ⁎ ⁎ ⁎

         

         

         

        늦은 한밤중. 모두가 잠든 시각.

         

        시간석의 시간이 숫자 1을 넘어갈 때쯤이 되니, 어느덧 주변의 불빛은 야영장 중앙의 모닥불과 밤하늘의 달빛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아직 늦여름인데도 밤이 되니 조금 쌀쌀해지는 추위 속에서, 나는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심심하네.’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혼자서 불침번을 선다는 건 상당히 지루한 일이었다.

         

        모닥불 빛에 의지해서 지식의 섬에서 산 책을 읽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어둑어둑한 곳에서 불규칙한 불빛에 의존해서 읽는 책은 집중을 흐트러뜨리기 마련이었고.

         

        어떻게든 독서에 집중해보려고 했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손에 들린 책을 조용히 덮을 수밖에 없었다.

         

        마력 사슬을 배우고 보조 마법의 단계도 1차에서 2차로 넘어갔으니, 과감하게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마법을 하나 배워두는 것도 아마 나쁘지 않겠지만.

         

        아직도 10레벨을 벗어나지 못한 내가 겨우 독서 하나 하자고 기술 포인트를 낭비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평가전에서 루크를 잡고 얻은 경험치가 1천 정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11레벨까지는 약간의 경험치가 조금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괜히 아무렇게나 낭비했다가 정작 필요한 부분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부지깽이로 몇 번 들추고 있을 때.

         

         

         

         

        …문득, 등 뒤에서 예상하지 못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단 도련님?”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다기보다는, 그냥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도적이나 몬스터인 것보다는 에단 도련님인 편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요.”

         

        “…미안, 혹시 놀라게 했어?”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음에는 주의해주십시오. 제가 실수로 에단 도련님을 도적이라고 오해했으면 무심코 공격을 해버릴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앞으로는 주의할게.”

         

        “아니요. 저도 주의하지 못했으니 엄밀히 따지면 제 실수가 더 큽니다.”

         

         

        분명히 10분쯤 전에 천막에 있는 것을 잠깐 확인했었는데, 대체 언제 내 등 뒤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 건지.

         

        아무래도 어떻게든 독서를 해보고자 잠시 집중한 사이 천막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대놓고 앞에 있었던 천막이 열리는 것조차 확인하지 못한 걸 보니 확실히 근무 중 독서는 영 할만한 게 아니구만.

         

         

        “왜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께서 교대하실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냥, 별로 잠이 안 와서?”

         

        “생각해 보면 에단 도련님께서는 아카데미 기숙사에서도 처음 며칠은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셨죠.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를 버티지 못하시는 성격이라 그런 듯합니다.”

         

        “아니 그건 릴리스가…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나랑 본인 불면증이 무슨 관계인데.

         

        안 그래도 요즘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오해로 변해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굳이 에단에게까지 근거 없는 모함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에단을 위해 말 그대로 몸까지 내주면서 보조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억울하기도 했고.

         

         

        “제가 도련님의 들끓는 성욕을 거의 2주일에 한 번꼴로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저를 모함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그, 그건 정말로 기분 좋은, 아, 아니, 아무튼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심지어 바로 나흘 전에도 제가 별다른 조건 없이 만지게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평가전 대련에서 나탈리 양과의 대련이 걱정된다는 핑계에 어울려서 말입니다.”

         

        “그, 그건 사실 릴리스가 루크와의 대련 이후 조금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 만지게 해줬던 건 고마워, 릴리스….”

         

        “아시면 그걸로 됐습니다.”

         

         

        뭐, 나도 에단이 나탈리에게 지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해준 거였다.

         

        아무리 나탈리가 내 전생의 최애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그녀와 나는 딱히 연관 없는 아카데미 신입생 1과 2에 불과한 사이였고.

         

        반대로 에단은 이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이니만큼 나름대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사이였으니까.

         

        지금의 내가 나탈리가 아닌 에단을 응원하는 건 딱히 이상한 현상도 아니었다.

         

         

        “…저, 릴리스.”

         

        “네, 에단 도련님.”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네?”

         

        “지금의 릴리스가 바로 대답하기에는,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

         

         

        에단 얘는 갑자기 또 왜 이상한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는 거지.

         

        마치 게임 속이었으면 히로인의 고백 이벤트라도 되는 것 같은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에단은 나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왔고.

         

        이 녀석의 이런 반응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는 사이, 모닥불의 불티 소리만이 타닥거리며 귓가를 간질였다.

         

         

        “무슨 질문입니까, 에단 도련님?”

         

        “…릴리스는 혹시, 아직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거나 해?”

         

        “네?”

         

        “그, 어렸을 때의 나는 릴리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줬던 기억이 없어서. 한창 일하느라 바쁠 때 자꾸 불러서 이상한 장난이나 치고, 성추행 같은 릴리스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나 하고.”

         

        “…….”

         

        “혹시, 그때 내가 저질렀던 것 때문에, 아직도 나에게 화나 있는 게 남아있는가 해서.”

         

         

        …분위기 잡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했더니.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옛날 일로 아직 화나 있냐고 묻는 말일 줄이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미 그때 있었던 일들에 관해서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오히려 방금 에단이 언급하고 나서야 오랜만에 ‘그런 일도 있었다’라는 것이 상기되었을 뿐.

         

         

        사실, 그때 내가 빡쳤던 것도 딱히 성추행이라서 화난 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끼어들어서 귀찮게 하는 그 행동 자체가 싫었던 거지.

         

        안 그래도 열 받는 상황에서 똥침 같은 걸 하고, 고통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를 도발하고 있으니 참고 있었던 게 터졌던 거고.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일뿐더러 에단도 그때 이후 반성하고 성장하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 오히려 그때의 원한을 아직 갖고 있다면 정신병에 가까웠으니.

         

        몇 년 전의 일에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내용의 대답을 그에게 되돌려줄 뿐이었다.

         

         

        “아니요, 딱히 그때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그래?!”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 아닙니까. 그때 당시에는 확실히 에단 도련님에게 화난 적이 자주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애초에 본인이 내 주인이면서 전속 메이드인 내 눈치는 왜 이렇게 보는 건지.

         

        내가 그때 일을 신경 쓰고 있으면 뭐 어쩌겠어? 공작가 자제 앞에서 내 개인적인 원한을 쏟아내는 건 그때의 그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타오르는 모닥불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며 땔감용 나무를 하나 더 안쪽으로 던져넣고 있을 때.

         

        모닥불 옆에 앉은 에단이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저기, 릴리스. 할 말이 있어.”

         

        “할 말이 있으면 하시면 됩니다.”

         

        “그, 릴리스가 조금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해서.”

         

        “……네?”

         

         

        …뭐지? 정말로 고백 이벤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에단이 뜬금없이 나한테 고백을 왜 해?

         

        하지만 왜인지 분위기는 마치 그럴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니 내 마음속은 조금 당황스러운 감정으로 치솟기 시작했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단은 정말로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내 두 손을 잡고 진지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돌려서 말하는 별로 마음에 안 드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에단 도련님? 잠시 진정하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릴리스. 혹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그때는 내….”

         

        -짜르르릉, 짜르릉, 짜릉….

         

        “…….”

         

        “…….”

         

         

        무언가의 분기점이 될 것만 같은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려는 순간, 느닷없이 귓가를 울리며 들려오는 방울 소리.

         

        지금 시간대에 들려오는 방울 소리의 정체라고 하면 기껏해야 한두 가지 이유밖에 없을 터였으니.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침묵 속에서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한 가지 감정이 치솟았다.

         

         

        ‘시발, 오늘 잠 다 잤네.’

         

         

        어쩐지 플래그 세울 때부터 이상하더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쓰다보니 분량이 늘어나서 조금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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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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