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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파스텔은 메소드 연기에 최선을 다했다.

         

       가장 강한 친구를 내 몸에 소환!

         

       금발 마법사 소녀가 바로 연상됐다.

         

       이야아압!

         

       나는 멜리사다! 멜리사다!

         

       그것도 멜리사 캐머롯이 아니라.

         

       무려 멜리사 크래프트!

         

       동화책 좋아하고 항상 어머니를 입에 달고 다니는 온실 속 화초(군벌 후계자)가 아니라 후계 경쟁 원칙에 따라 형제자매를 몰살시키고 후작 자리를 거머쥔 모략가!

         

       그런 후덜덜한 모략가는 황제를 찌르고 공화파에 가담하려 했는데 공화파가 헛짓하며 크래프트의 목줄부터 쥐려 하자 어떤 마음이 됐을까?

         

       “실망이에요.”

         

       파스텔은 일단 한숨부터 폭 쉬었다.

         

       상상 속 멜리사 크래프트가 적극 공감할 실망감.

         

       좋았어.

         

       이 감정선이 맞는 거 같아!

         

       근데근데.

         

       멜리사 크래프트면 머리카락이 분홍색일까 아니면 금색일까? 크래프트면 분홍이 맞지만 멜리사니까 금발이어야 할 거 같아. 그게 좀 더 우아하다고 할까.

         

       문득 나스타샤 공작의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허억, 갑자기 사고가 이상한 곳으로!

         

       아니야! 아니야! 이런 흥미로운 주제는 나중에 생각해! 한숨 쉬며 시간 벌었으니 어서 다음 수순!

         

       후아, 후아.

         

       시간 벌기 차 악마님처럼 한 번 더 한숨 폭.

         

       “하아, 정말이지.”

         

       이제 그럴싸한 흑막 발언을 하며 오판을 조장해야 해.

         

       원리는 크래프트의 악명을 이용해 방금 겪은 바보바보 파스텔을 잊게 만드는 것.

         

       공작님이 만만치 않으니 그럴싸한 공수표 던지기로는 불가능해. 적절한 근거와 적절한 과거가 갖춰진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가 있어.

         

       파스텔의 공부는 못 하지만 머리는 똑똑해요~(진짜)가 전력으로 가동됐다.

         

       사실 아무것도 준비한 거 없지만, 유명인의 사생활을 캐면 공론화할 거리를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듯이 파스텔 총독 각하의 삶 중에서 그럴싸한 사안을 엮어내는 건 아마도 그리 어렵지 않다.

         

       상대가 크래프트의 악명 때문에 파스텔의 본모습을 오판하며 편향된 사고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 망상을 확대할 생각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난 아무 생각 없었지만 멜리사 크래프트라면 깊은 의도를 담았을 만한 과거!

         

       생각이 번뜩였다.

         

       떠올랐다!

         

       야호~! 살았어!

         

       “공화파에서 제 합류를 기꺼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어요. 여기에 유감스러운 마음까진 없네요. 오히려 저희 가문의 괜한 과거 때문에 심려를 끼쳤으니 사과드릴게요.”

         

       일단 파스텔은 어리숙하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진 않고 분위기부터 주도했다.

         

       이건 비즈니스의 기본 철칙.

         

       분위기부터 주도하라.

         

       “사과받을 정도로 거부감을 느끼던 건 아니야. 지금의 제국이 되기까지 크래프트 가문의 공적이 그리 많은데도 선황이나 현황이나 과하게 핍박했으니 우리 중에도 후작의 합류를 환영하는 인사가 많아.”

         

       나스타샤 공작은 곤란해하는 미소로 변했다. 대귀족의 사과에 해야 할 대답을 해주긴 했는데 다음 수순으로 어떤 곤란한 맥락이 올지 짐작되는 듯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역시나 실망이에요.”

         

       파스텔은 마주 앉은 상태로 표정 연기하기가 부담스러워서 스리슬쩍 일어났다.

         

       공작이 그려준 파스텔톤 초상화 앞으로 걸어갔다. 공작을 등지게 되자 마음 놓고 표정을 풀고 초상화를 헤벌레 관찰했다.

         

       분홍분홍 반짝반짝~.

         

       와아, 진짜 예쁘다!

         

       어떻게 물감이 반짝이지?!

         

       악마님께 드리려 했는데 내 침실에 걸어놔야 할지도?!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헛! 내 초상화에 내가 홀려버리다니!

         

       큼큼.

         

       “공화파에 진심을 전하기 위해 아카데미 총장 대행을 귀족 투표로 선정해 봤는데, 제 성의가 모자랐던 걸까요? 제 표현이 부족했던 걸까요?”

         

       나스타샤 공작의 침음 소리가 울렸다.

         

       “그 부분은 우리도 흥미롭게 지켜봤어. 선례가 없다 보니 연구하고 논의할 가치가-”

       “가장 높은 자는.”

         

       나스타샤 공작의 말이 끊겼다.

         

       파스텔은 초상화를 들었다. 살피며 높이 올리자 각도에 맞춰 초상화가 기울어져 그림자가 졌다. 그럼에도 잘 만들어진 초상화는 그림자 속에서도 빛났다.

         

       “추대받고, 열망받으며, 앞장서는 자여야 하지 않을까.”

         

       나스타샤 공작의 시선이 느껴졌다.

         

       앗?

         

       등 뒤 시선이지만 인기인의 촉으로써 판단해 보자면 굉장히 강렬해진 기분.

         

       그럴싸한 분위기로 있어 보이는 철학을 무논리로 던지는 전략이 뭔가 먹혔나?

         

       공작님이 지금 생각했을 무언가를 되짚어 보자면.

         

       파스텔: 저 원래 공화파에 가입하려 했는데 의심해서 서운해요! 투표로 누구를 뽑아야 하는지도 고민할 정도로 공화주의자라구요!

       공작님: 허억, 이 정도 고찰을? 이걸 몰랐네! 미안!

         

       좋아! 좋아!

         

       살았어! 완전 살았어!

         

       이대로 하늘섬으로 도망쳐도 공화주의자인 날 푹푹 찌르진 않을 거야!

         

       마왕 색출을 맡기신 황제 폐하도 그렇고!

         

       와아! 이제 무서운 줄타기 대화 멈추고 도망쳐야지!

         

       파스텔은 그대로 초상화를 뒤집었다.

         

       그리곤 머리 위에 얹었다.

         

       그대로 양팔을 벌리고 뒤돌아 해맑게 시선을 마주했다.

         

       오해가 풀린 거 같으니 저 돌아갈게요!

         

       하지만 파스텔은 다소 정색한 표정으로 변한 나스타샤 공작을 볼 수 있었다. 어째 경쟁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어라라.

         

       옛 짝사랑의 자녀에서 연적의 자녀로 관계 변경될 듯한 분위기!

         

       뭔가 굉장한 오해가?!

         

       진짜진짜 굉장한 오해가아!

         

       허억.

         

       설마 이거 아까 공작님이 조언했던 그 상황?

         

       ―모호한 신뢰성은 아군에게도 괜한 의심을 받게 돼.

         

       으아아!

         

       공작님의 조언이 너무 적절했어어!

         

       괜히 연기하니까 나도 모를 의심만 받게 됐잖아!

         

       파스텔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스타샤 공작님이 도대체 무슨 망상까지 하시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별 의도 없어요!

         

       그냥그냥 파스텔인데에!

         

       이래서 머리 좋은 사람과는 대화하기 곤란해……!

         

       식은땀 나기 직전인 파스텔은 정신력을 모두 끌어모아 최대한 해맑게 외쳤다.

         

       “하지만 저는 어려서 잘 모르겠네요!”

         

       뭔가 심각한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어려서 의도도 모른 채 잘못 말한 거였어요!

         

       어린 파스텔 각하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총장직은 연륜 있는 호레이스 교수님이 앉을 정도라구요!

         

       “저희가 한 세대는 차이 나는데 같은 수준을 바라시면 곤란하다고 할까나!”

         

       공작님 생각을 전혀 못 따라가겠다고 할까나!

         

       응응!

         

       이 말에 뭔가 의도하지도 않은 시그널을 또 읽었는지 나스타샤 공작은 충격받더니 생각이 급격히 많아진 표정이 됐다.

         

       그게 그런 권유였다고? 아니, 이 크래프트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길래 대면도 못 해본 공화파 수장이 멀리 떨어진 하늘섬 선거만으로도 권유를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같은 뉘앙스였다.

         

       우와아……!

         

       이쯤 되면 너무 무서워!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너무 잘 먹혔어!

         

       이게 지성의 저주? 똑똑한 사람이 사기에 더 잘 당한다는 통계가 이렇게?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지만 얼추 건드리면 안 되는 모략가에 같은 편은 맞지만 경쟁자는 아닌 상태는 된 거 같다.

         

       몰라몰라! 어차피 하늘섬은 변방이야! 총독직도 얻었으니 도망치면 그만!

         

       파스텔은 머리에 얹은 초상화를 양손으로 꽉 고정시켰다.

         

       “수준이 예상과 달라서 전 이만 갈게요!”

         

       중앙정계의 심연 무서워어!

         

       후다닥 달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선이 따라왔지만 그림 공방의 문을 박차고 나가자 사라졌다.

         

       화창한 정원과 드넓은 호수가 펼쳐졌다. 오리 몇 마리가 떠다녔다.

         

       “도망! 도망!”

         

       파스텔 살려어!

         

       하얀 대리석 길을 그대로 주행하다가 헥헥대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는 사람 없이 그림 캔버스가 널린 호숫가 풍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휴우!”

         

       진짜 살았어.

         

       딱히 땀은 나지 않은 이마를 훔치다가 초상화를 근처 캔버스에 올려뒀다.

         

       호수로 걸어가 물을 떴다.

         

       어푸어푸.

         

       말끔말끔.

         

       파스텔은 양볼을 문지르고는 뭔가 찾듯 주변을 둘러봤다.

         

       오잉.

         

       수건 없음.

         

       수건이나 손수건을 줘야 할 악마님도 없었다.

         

       으아아?

         

       멜리사를 메소드 연기할 정도로 품위 있는 파스텔인데 닦을 것도 없는 상황에 세수하는 천박한 짓을 해버리다니……!

         

       턱을 타고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물방울은 그대로 옷자락에 물자국을 남겼다.

         

       완전 품위 없음.

         

       파스텔은 눈을 굴리다가 쪼그려 앉고는 하얀 치맛자락을 슬쩍 들었다.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슥슥 닦았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했다.

         

       “와아! 깨끗!”

         

       돌아가야지!

         

       사뿐사뿐 걸어가 초상화를 들었다.

         

       파스텔 초상화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야호!

         

       초상화 득템!

         

       무서웠지만 어쨌든 큰일 없었으니 행복해요!

         

       초상화를 느긋하게 살펴봤다.

         

       우와아, 근데 진짜 잘 그리셨다.

         

       악마님도 같이 와서 두 개 받을걸!

         

       어라라?

         

       생각해 보니 악마님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무서운 상황은 없지 않았을까?

         

       으아아!

         

       파스텔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악마님만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필요할 때 곁에 없으시다니!

         

       악마님 나빠!

         

       완전완전 나빠!

         

       절찬리 하극상 즐기다가 혼날 각오하라는 말을 들은 뒤라 단둘이 되면 눈물 빠지게 혼날까 봐 혼자 온 파스텔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악마님이 나빠!

         

       응응!

         

       그러니까아.

         

       마시멜로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헤헤.

         

       파스텔은 악마님에게 돌아갔다.

         

       ―도대체 그걸 왜 혼자 간 거냐.

         

       화난 표정이었다.

         

       파스텔은 기존에 새로운 이유까지 더해지자 정말 눈물 쏙 빠지게 혼날 수 있었다.

         

       “우아앙!”

         

       눈물이 방울방울 나왔다.

         

       “악마님 진짜진짜 나빠!”

         

         

         

         

         

       

       

    다음화는 07월 03일 23시 업데이트 됩니다.


           


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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