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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하.”

     

    아셀라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이케와의 승부도 중반에 들어섰다. 매일같이 보고되어 올라오는 숫자들을 보고 있으면 두통이 절로 일었다.

     

    ‘어차피 정책을 결정하고 나면 경과를 지켜보는 동안 할 게 없는 승부야.’

     

    초조해해봤자 판단이 흐려질 뿐이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아셀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를 부려보기로 했다.

     

    헤이케 쪽도 시장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규칙이다.

     

    감시할 눈도 뿌려놨다. 행여 부정행위를 하려 한다면 바로 잡을 수 있고, 라우가라는 입회인도 있다.

     

    ‘성격상 그럴 인물도 아니야.’

     

    게오르크라면 몰래 반칙을 쓸지도 몰랐겠지만.

     

    헤이케는 전황이 불리해지면 대놓고 판을 뒤엎으러 전쟁을 걸면 걸었지, 비열한 수는 안 쓸 타입이었다.

     

    ‘라스라면 어떤 전략을 썼을까.’

     

    어느새 또 라스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셀라의 사고가 흐르다가 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녀가 시녀장을 불렀다.

     

    “루시, 주방에 가고 싶어.”

     

    뜬금없는 아셀라의 요청에 시녀장이 당황했다. 아무리 월광궁의 주인이라도 봐선 안 될 곳이 있거늘.

     

    주방은 철저한 사용인들의 장소다. 황녀처럼 존귀한 자가 들어올 곳이 아니었다.

     

    “지저분하네.”

     

    하지만 아셀라는 기어이 주방에 발을 들여서는 폭언을 쏟아냈다.

     

    사실 월광궁의 주방은 굉장히 깨끗한 편이었다. 라스 덕분에 위생의 개념이 적용되어 있었으니 황실 어떤 주방보다 훨씬 나았다.

     

    “간단하면서 맛있는 요리에는 뭐가 있니? 크렘브륄레는 쉽지?”

     

    “시간은 오래 걸려요. 음… 황녀님이 드시는 음식에 빨리 만들어지는 건 없지요.”

     

    “서민식도 괜찮아. 라스는 잘 먹겠지.”

     

    “선생님이요?”

     

    시녀장은 설마, 하면서도 아셀라의 의도를 눈치챘다.

     

    라스에게 만들어줄 요리를 해보려는 깜찍한 발상이 아닌가.

     

    그 제국의 황녀가 혼약자를 위해 손에 물을 묻힌다니, 시녀장으로서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는 상상이었다.

     

    “애초에 라스가 뭘 좋아하더라. 걔가 뭘 먹는 건 별로 못 본 것 같아.”

     

    “겸상을 거의 안 하셨지요. 선생님은 주로 내의원에서 식사하시거나 바쁘실 땐 간편식으로 드신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런 것 치고 자신의 식탁에 올려주는 메뉴는 항상 다채롭고 정성이 가득했다.

     

    건강을 생각하면서 맛도 챙기는 음식들. 아셀라는 늘 라스의 메뉴는 마음에 들었다.

     

    …오이만 빼면.

     

    오이는 죄악이다. 대체 인류 어떤 자가 처음으로 그 끔찍한 열매를 입에 넣었는가. 아셀라는 그 원시인이 증오스러웠다.

     

    대신 잘 먹으면 상으로 버블티를 만들어주니 참을 순 있었다.

     

    최근엔 그것도 못 먹었지만.

     

    궁중 요리사가 그의 레시피로 따라 만든 버블티는 미묘하게 맛이 달랐다.

     

     

    그런 식으로, 아셀라의 식단은 늘 라스가 꼼꼼하게 관리해왔다.

     

    그러면서 자기 먹을 건 안 챙긴다니.

     

    ‘바보 아냐.’

     

    아셀라는 라스가 돌아오면 한 번쯤은 자신도 직접 요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단순한 변덕이었을 뿐이다.

     

    나 참, 황녀인 내가 남의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들려고 한다니.

     

    아셀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해진 발상에 툴툴대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식기를 집었다.

     

    “그래서, 뭘 만들까?”

     

    “샌드위치가 어떨까요. 만들기 쉽고 입맛도 그다지 따지지 않는답니다.”

     

    “알려줘.”

     

    시녀장이 준비하는 재료를 보며 아셀라는 라스가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번 승부엔 천리안에서 본 상황을 활용했다. 유행할 독감에 한 발 앞서 대처했다.

    아셀라에게 마법 재능과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덕분에 3주차가 넘어가는 현재, 아셀라의 관할구 서민 가계는 치유비 지출을 줄이고 생산성을 늘려 경제력에서 상당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스의 지식 역시 전제되어야 했다.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그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꼭 안개와 같아서 무리해서 잡으려고 하면 흩어져서 사라져버리는 남자다.

     

    다른 귀족들처럼 강압적으로 대한다고 고분고분해지거나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러니 잠깐 자존심은 접어두고 일단 잘 해줘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런 계산은 자처하고.

     

    ‘…나는 라스의 요리를 자주 먹었으니까.’

     

    라스도 내 요리를 맛있게 먹을까?

     

    그저 그런 단순한 궁금증이 더 우선이었다.

     

     

     

    “…빵을 자르실 땐 주의하시면서.”

     

    칼을 잡으니 안절부절 난리가 난 시녀장에게 지도를 받으며 아셀라의 첫 요리가 완성됐다.

     

    수비드 햄과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사용한 바게트 샌드위치.

     

    아셀라 자신이 봐도 솔직히 모양은 그저 그랬다.

     

    ‘마법진은 깔끔하게 그리면서 무슨 빵 하나 제대로 못 자른담.’

     

    라스가 보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스에게 시식이나 시킬까 접시를 집었을 때였다.

     

    ―쨍그랑!

     

    “황녀님!”

     

    아셀라가 접시를 떨어트리고 배를 감싸 쥔 채 제자리에 웅크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별안간 식은땀이 흐른다.

     

    “주치… 주치의를.”

     

    시녀장이 혀를 찼다. 주치의는 여기에 없다. 대신 문밖에서 대기하던 클로에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후우.”

     

    아셀라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칼을 흐트러트려 잔뜩 찡그린 표정을 감추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묽은 침이 흘러나오는 입을 간신히 닫아냈다.

     

    ‘점점 주기가 짧아져.’

     

    …이런 얼굴은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라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

     

     

     

    “승부의 마지막 날이네. 5주차의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확인해볼까.”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어느새 헤이케와 아셀라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하루가 막 넘어간 자정, 금서궁의 귀빈실에 모인 세 황녀 사이에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오늘 모든 것이 결정된다. 둘 중 한 사람은 승계권을 잃는다.

     

    그 외에 건 것은 없지만 둘 다 차기 황제를 노리던 황녀다. 승계전에서의 탈락은 삶의 목표를 잃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만큼 필사적이다.

     

    “그간의 결과는 여기 숫자로 정리했어.”

     

    라우가가 문서를 내밀었다.

     

    “이걸 보고 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대응 행동은 오직 한 가지야. 내일 자정에 기록된 최종 장부로 승자가 결정돼.”

     

    “확인했다.”

     

    “이미 정해졌던 규칙이지. 결과나 열어봐.”

     

    아셀라가 턱을 까닥였다.

    라우가가 싱글대며 봉투를 열었다.

     

    “승부 시작 시와 비교한 결과야. 금화뿐만 아니라 현물 자산도 포함했어.”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빈부격차도 줄여야 하는 어려운 과제였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한 달뿐이었다. 사실상 대단한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든 기간이다.

     

    하지만 헤이케와 아셀라는 둘 다 보란 듯이 결과를 만들었다.

     

    “둘 다 겨우 한 달 안에 성장률을 5%를 넘겼네. 마술이라도 부렸어?”

     

    라우가가 숫자에 놀라워하며 공식에 대입해 승점을 계산했다.

     

    “5주차 까지 승점은… 아셀라의 우세야.”

     

    아셀라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덤덤하게 팔짱을 꼈다.

     

    “초반엔 헤이케의 우세였어. 하지만 2주차부터 유행한 독감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졌지. 아셀라의 대응이 유효했어. 고트베르크의 영향이려나.”

     

    “너도 허물없이 내 혼약자를 부르지 마.”

     

    아셀라의 매서운 시선에 라우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헤이케는 차분하게 숫자를 살폈다.

    자신이 사전에 조사했던 바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상당하군, 아셀라.’

     

    위기감이 느껴졌다.

     

    승부에 나설 때만 해도 헤이케는 높은 확률로 자신이 승리하리라 판단했다.

     

    그간 월광궁의 행보로 아셀라는 앞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직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다.

     

    승계전에서 탈락시킨다면 지금이 기회다.

     

    그리 생각해 이번 승부를 받아들였으나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운이 안 좋았다. 독감이라는 변수가 아셀라의 손을 들어줬다.

     

    ‘아니, 정말 운이었을까.’

     

    지금 와서 의심해본들 늦었다.

     

    이제 이 숫자를 기준으로 최종 행동에 나서야 한다.

     

    아직 역전의 찬스는 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최종 대응을 내게 알려줘. 승부를 뒤집을 와일드카드가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겠네?”

     

    라우가가 싱글대며 차를 홀짝였다.

     

    ‘승점을 결정할 공식을 역산하면… 좁혀야 할 차이는 금화 7천2백 개인가. 그만큼 서민 가계에 자산이 더 들어가야 한다.’

     

    헤이케가 액수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흐름을 생각하면 아주 아까운 차이였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헤이케는 이미 방법을 생각해두었다.

     

     

    내일은 슈프레 상단의 대형선이 강 상류에서 들어오는 날이다.

     

    ‘배에 법국으로 가던 1만2천 골드 어치의 밀가루가 실려있다. 그걸 전부 웃돈 주고 사서 장부에 반영시키면 역전해.’

     

    물론 궁의 재원은 쓸 수 없는 규칙이다.

     

    서민들을 시켜 밀을 산다 한들 돈을 물건으로 바꿨을 뿐이기에 자산은 변하지 않는다. 장부는 그대로라 이길 수 없다.

     

    다만 제국의 장부 기록법.

    약간은 구식인 그 기록법에 틈새가 있다.

     

    헤이케는 일종의 편법을 쓸 생각이었다.

     

    ‘왕국에는 선물거래라는 게 있다. 대륙 전체를 오가는 상단은 이 방식의 거래도 허용하고 있지.’

     

    돈놀이가 금지된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가격을 시가가 아니라 세 달 후 가격에 베팅하여 지불하는 방식. 일종의 도박이다. 중요한 건 대금은 거래자의 신용이기에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야.’

     

    제국에서는 선물을 허용하지 않기에 수입한 밀은 순자산으로 즉시 장부에 기록된다.

     

    하지만 대금의 가격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0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

     

    순자산은 금화 만이천 개만큼 뻥튀기된다.

     

    ‘신용거래는 대금이 정해져 있어 빚으로 기록할 수 있지만 선물은 그럴 수 없다.’

     

    슈프림 상단과 거래하는 건 상인 길드지만 그들도 신용은 목휘궁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이해한다.

     

    거래는 무탈하게 성립될 것이다.

     

    사실상 5주라는 기간을 이용한 속임수나 마찬가지지만 승부는 내일이면 끝나버린다. 헤이케는 수단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아셀라가 이 복잡한 수단을 알 리가 없다.’

     

    허를 찌를 수 있다고 확신한 순간.

     

    “헤이케.”

     

    그런 헤이케의 생각을 꿰뚫어보듯, 아셀라의 눈에서 황금빛 마나가 반짝였다.

     

    순간 헤이케는 한참이나 어린 여동생 앞에서 단정한 제복이 낱낱이 벗겨졌다고 착각이 들었다.

     

    “설마 위대한 제국의 황녀가 잡상인들이나 할 시시한 돈 장난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헤이케는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미 아셀라는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종이에 글자를 적고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헤이케의 앞에 들이밀었다.

     

    “얼마든지 해 보렴. 만이천 개로는 택도 없을 테니까.”

     

    아셀라가 적은 대응을 보고 헤이케의 표정이 굳었다.

     

     

     

    ***

     

     

    “선생님, 텔레포트 게이트가 연결됐습니다.”

     

    ―화아악!

     

    거대한 두 기둥 사이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앗 따가워.”

     

    언제 봐도 눈이 아프다. 적응이 안 되네.

     

    눈을 비비적대고 있으니 타냐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라스.”

     

    아버지가 나를 배웅해주었다.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가보자고.”

     

    나는 휴고, 타냐와 함께 푸른 빛 안으로 발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200코인 후원 감사합니드아!
    후원 메시지가 고정되다 보니 캐릭터가 매력 있다는 메시지에 여러 추측을 하게 되네요. 어떤 등장인물을 좋아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이실까…!
    그러고 보니 등장인물 이미지란에 헤이케와 라우가가 슬쩍 업데이트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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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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