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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행여나 서버에 이물질이 튀지 않도록 구석에 모여 앉은 상태로. 아리따운 자기 그릇들을 노려본다.

         

         유려한 빛깔이 도는 검은 바탕에 황갈색 구름이나 꽃 무늬가 새겨진 게, 어떻게 시공간을 넘어서 21세기 물건을 직수입해왔나 싶을 정도로 내 감성을 자극했다.

         

         그뿐만 이랴? 곁에 있는 도시락통, 찬합 비슷한 녀석의 뚜껑을 열자 정갈하게 담긴 반찬들이 드러났다.

         

         하얀 락교(辣韮)에 붉은 베니쇼가(紅生姜; 생강 초절임), 갈색 우엉채와 은은한 간장 향이 감도는 결이 살아있는 무. 그리고 그 모든 쓴맛을 포용하고자 조용히 구석에 내려앉은 노란 계란말이.

         

         사람이 아무리 잡식 동물이라 해도, 풀떼기를 더 좋아한다는 건 도무지 이해 못하는 육식 주의자(Meat Lover)였던 나조차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매력을 품은 때깔이다.

         

         순수하게 맛만 따진다면 여태 주식으로 삼던 카트리지 밀이 훨씬 달고 짜고 자극적이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자연물… 선식禪食? 하여간 사찰식스러운 나물의 향연에 마음이 설레는 게 느껴졌다.

         

         고기를 갈구하는 게 본능이라면 이 이끌림 또한 본능일지니 나는 겸허히 수용할 준비가 끝났지만.

         

         정말 애석하게도 주인공께서, 이 정식 메뉴의 왕께서 내 시선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기에.

         감히 순서를 무시하고 낼름 채소를 집어먹을 수는 없었다.

         

         “스읍…! 후우…….”

         

         황금빛 튀김 옷이 흩뿌리는 고소한 냄새…가 아니라 실례, ‘향기’와 잘려진 단면이 슬쩍 내비치는 어여쁜 선홍색 속살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소스 맛으로 먹는 그 얇은 녀석과는 차원이 다른 두께에, 얼핏 봐도 가득 들어찬 육즙은 화룡점정 그 자체였으니….

         

         꼭 주먹이나 도구로 때려야만 폭력이 아니다. 층간소음 같은 청각을 괴롭히는 행위도 폭력이라 정의하는 세상이기에, 나는 이 오감 전체에 도전장을 내민 폭력의 화신에게 맞서 싸우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감사… 먼저 압도적 감사를 보내도록 하자.

         그게 전력을 다해 싸울 상대에 대한 포식자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니까…!

         

         “…귀염둥아? 음식한테 무슨 원수졌어? 너무 무섭게 째려보는데…….”

         “어제 햄버거도 저렇게 드시던데요…? 그, 매 식사에 진심을 담아서 먹어야 한다는 만다라 교를 믿으시는 걸 수도….”

         

         “……이것들이.”

         

         배부른 소리를 늘어놓는 외야 둘을 한 번 확 째려보자 잡음이 사라졌다.

         이 부르주아 해커 녀석들. 평소에 얼마나 잘 먹고 잘 벌고 다니길래 법인 카드로 하는 회식에 이렇게 감사함을 덜 느끼는 걸까.

         

         나도 자리 잡고 나면 좀 진득하게 벌어서 수익성이 있는 곳에 재투자를 하던가 해야지.

         

         바스락…. 바삭…!

         

         단순히 젓가락으로 집는 것만으로도 천상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돈까스, 내 돈카츠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마리나가 무슨 일식 얘기를 꺼냈을 때 밑져야 본전으로 찔러 보길 잘했다.

         그야 김치찌개나 잡채처럼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한식 메뉴의 레시피도 잘 살아있으니까, 인기 많은 식단은 당연히 다 있겠지 그래.

         

         앞으로도 소모품 아이템으로 존재하지 않던 식음료들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점, 잊지 말고 생계를 꾸리도록 해야겠다.

         오락이나 다른 문화 생활에 대한 욕구야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으로 차고 넘치게 충족되는 만큼 별생각이 없었으나 …그래도 식사는 이렇게 오버할 만큼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아샤님. –

         

         “…뭐!”

         

         왠지 더듬더듬, 짠하다는 느낌으로 날 부른 제로에게 되물어도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소화기관 구현된 안드로이드 몸체를 얻더라도 넌 돈카츠 절대 안 사줄 거야. 각오해라.

         

         그렇게 표현을 빌리자면 ‘일식에 해박함을 뽐낸’ 내 선택을 따라서 똑같이 로스카츠 테쇼쿠(定食)를 배달시킨 마리나, 튀김의 마성에 굴복한 나와는 달리 철저히 실리를 따져 비싼 특상 장어덮밥(あなごめし)을 시킨 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만 있었는데.

         

         멀쩡한 일본계 팀원을 내버려두고 엉뚱한 사람을 흉내 냈다는 걸 슬슬 깨달아도 좋으련만, 쌉사름한 게 마냥 맛있다며 숟가락으로 반찬들을 퍼먹는 그녀를 구경하며, 오후에 서버랙 한 개는 더 밀어야지… 하고 식사를 진행하던 와중.

         

         무심한 누군가는 깊게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얘기를 꼬맹이가 먼저 꺼내왔다.

         

         “저기… 음… 누나들? 아니, 누님들?”

         “”…….””

         

         아무쪼록 명확히 정립한 적 없는 호칭 문제에 다대한 내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어… 아직도 한참동안 여기서 같이 지내야 할 텐데, 간략하게나마 서로에 대해 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절대 두 분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요.”

         

         아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각보다 합리적이고 합당했다.

         

         수면 시에는 개인실을 쓴다 하더라도, 간신히 일면식만 있던 세 프리랜서가 반동거 상태로 장기간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된 상황.

         

         보통은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도 하고 갔겠으나, 분위기 메이커라 해야 할지… 반대로 파멸자라 해야 할지 여하간 나서야 할 순간마다 튀어나가는 팀장이 있어서 나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양식을 중요시한다면 이런 애매한 관계인 채로 일이 계속되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다.

         

         “흐음…… 글쎄.”

         “……난 딱히 공개할 만한-떳떳한- 자기 소개가 없는데.”

         

         “에… 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이어서야 요원한 일이니. 이토록 매정할 줄은 몰랐는지 딸그락! 하고 켄의 손에 걸쳐져 있던 젓가락이 그릇에 떨어졌다.

         …입에 고기를 물고 우물거리던 마리나의 가슴팍에는 튀김 가루가 내려앉았고. 거 옷 좀 입으라니까.

         

         이들이 싫은 건 아니다. 계약을 따내기 위해 의기투합하는데 동의했고, 각자 확실한 전문분야와 실력이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믿고 있다.

         

         그러나 개인사를 털어놓거나 이름 이상의 정보를 밝히자고 하면… 난 떳떳하게 말 할 내용이 없어서 곤란하다. 핑계가 아니라 진짜로.

         

         군데군데 거짓을 섞어서 전체적인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는다 하더라도.

         

         여태까지 메가코프 산하 비밀 기지를 두 곳쯤 날려버리고, 경찰 일 좀 하다가 적성에 안 맞아서 때려 치고, 반기업 지하 조직에도 스카우트 받아봤는데 최종적으로 거절하고 여기 일하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뒷조사 같은 걸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대충이라도 서로에 대해서 좀 알면… “자자, 부끄럼쟁아?” …네?”

         

         오히려 선뜻 나설 줄 알았던 마리나가 시큰둥한 게 의외라 보고 있었는데, 말에 오해가 있었다 여기고 정정하려는 켄의 말을 끊어버리며 마침내 그녀가 대화에 난입했다.

         

         그것도 말투와 표정은 여전하지만, 본적 없을 정도로 냉기가 풀풀 감도는 어조를 장비한 상태로 말이다.

         

         “홀츠 콜로니 출신 천재 소년 해커 타케쿠라 켄, 넷 해커치고는 출장 서비스에 거리낌이 없어서 각종 기업과의 공식 자문 의뢰도 마다하지 않음. 약 800 페타플롭스(Petaflops; 1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번의 부동소수점 연산을 시행) 사양의 휴대용 컴퓨터를 항시 지니고 다니며 연동된 의안이 보조 단말기 역할을 수행하니, 열악한 환경에서도 업무 처리가 능숙하다고 호평이 많았지?”

         

         “어…?”

         

         얼빠진 맞장구가 튀어나왔다.

         보통 블랙마켓 용병들과는 달리, 켄은 양지 쪽의 경력도 확실한 인재였던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게 타인의 입에서 단번에 읊어지는 건… 역시 이상하다.

         

         챙—!!

         

         – …더 다가오신다면 정당방위로 이쪽도 응수하겠습니다 미스 마리나. –

         

         단지 웃는 얼굴이 나를 향한 것뿐이지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제로가 가시를 곤두세웠다.

         사출된 칼날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솜털이 곤두서는 적의를 드로이드가 내뿜고 있음에도, 그녀는 가만히 두 손을 들어서 싸울 의도는 없음을 내비칠 뿐.

         

         “하베스트 플래닛 출신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단, 시민권 발급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파라다이스 산하 메트로폴리스에서 온 만큼 배경은 불분명. 전선에서 움직이는 걸 마다하지 않는 성격으로 무투파 용병은 물론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도 종잡기 어려운 이단아라는 인식이 강하며….”

         

         거기서 마리나는 한 번 말을 끓고, 내 허락이나 돌발 변수가 있으면 곧바로 피를 볼 의지가 만만한 블레이드와 그 너머의 제로를 쓱 훑었다.

         

         “…결정적으로 파라다이스 본사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러브콜을 받고도 기어이 거절했다는 소문과 전용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경호 로봇에 주입했다는 괴담까지. 이 중 반만 진짜여도 어마어마한 실력자 아니겠어?”

         

         따로 시비를 거는 것도, 겁박 하려는 것도 아니며 정말 알고 있던 사실을 털어놓는다는 것처럼 동의를 구한 그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내려놨던 숟가락과 찬합을 다시 쥐고는 식사를 이어가면서 떠들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력이랑 눈치 말고는 별볼일 없는 나까지! 구구절절한 사연 늘어놓기나 불행을 자랑하는 건 별로 취미가 아니래서 말을 좀 꼬았는데… 결국 이렇게 다른 우리가 여기 모인 건 돈 때문이잖아?”

         

         정 이유를 가져다 붙이자면 저게 맞다.

         고용주 측은 재야의 인재 중에서도 최고의 자원을 바랬고, 우리는 막대한 보수에 이끌려온 개미들이니까.

         

         “결국 나는 개인 참가자 중에서도 제일 승산이 높은 쪽에 걸었고, 실제로 둘 덕분에 한 자리 끼게 되었으니까. 앞으로도 기업이나 마켓이랑 기싸움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가능하면 도맡을 생각, 또 작업 공식을 알려준다면… 감사히 배워서 돕고.”

         

         “하.지.만! 지금처럼 일하는 와중이라면 몰라도, 괜히 보수를 챙기고 나서까지 친분을 유지하다가 여차할 때 발이 묶이는 건 사양하겠어. ……그렇게 오지랖 부리다가 죽은 녀석들이 한 둘도 아니고 말이야.”

         

         “…….”

         “어… 으….”

         

         대화, 혹은 일방적인 토로가 끊기자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 남았다.

         

         생각보다 씁쓸한 자기 객관화와 한 발자국 먼저 움직이던 동기에 말문이 막힌 듯 켄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용당했다는 불쾌감은 거의 없었다. 자신을 지극히 낮춰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마리나도 입력된 공식에 한해서는 거의 기계 수준의 대응력과 처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했었으니까.

         

         금고만 계속 해제하는 테스트였다면 아마 그녀 혼자서도 1등을 쟁취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실제 업무 계약에서 파토-대참사-가 났겠지만 아무튼.

         

         다른 말로 하면 앞으로 세 달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지내는데 그녀도 아무 불만이 없다는 뜻이지만, 당장 이런 얘기가 나온 직후는 무리겠지.

         

         어쩌면… 기껏 통성명도 해 놓고 이름도 제대로 안 부르고 제멋대로 지은 별명을 고집하던 건 그녀 나름의 선을 긋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보라. 그 증거로 내심을 털어놓고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과거에 있던 안 좋은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자극됐는지.

         그릇 언저리에 또르륵 눈물을 쏟는 모습은 평소의 밝은 분위기와 더욱 대비를 이루어 철혈의 제로조차 움찔하고 칼을 거두어들였….

         

         “흑…! 흐읍, 이거… 너무 써…!!”

         

         “야!”

         

         …누가 락교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래 요 년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끼니는 일식 한 번 어떠십니까.

    오늘 치과를 후딱 가볼까…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는데, 첫 계단턱에 시원하게 발을 박았습니다.
    바로 다시 들어와서 양말을 벗고 확인했더니 왼쪽 엄지발톱이 가로로 쪼개졌더라고요.

    억까…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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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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