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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인적이 드문 비상계단에 한 보안실 직원이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마약 거래를 하는 것처럼 약간 초조해 보이는 직원의 손에는 ‘회색 사신 푸딩’이 들려 있었다. 

    직원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위로 향하는 계단 난간 기둥 뒤에서 푸른색 모자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다가오는 푸른 사신을 보면서 직원은 감격했다.

    푸른 사신과 주기적으로 만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렁각시처럼 집을 정리해 준 푸른 사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얼마나 노력했는가.

    푸른 사신은 찾기가 힘들어서, 푸딩을 먹이기도 상당히 어려웠다.

    이제까지 푸른 사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이 보답받는 것만 같았다.

    야금야금.

    숟가락으로 떠 올린 푸딩을 천천히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먹는 푸른 사신.

    푸른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조금씩 푸딩을 떠서 먹이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쓴 푸른 사신의 오물거리는 작은 볼을 보니, 절로 배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주기적으로 푸른 사신을 만날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성취였다.

    언젠가는 원룸 안에서 푸른 사신이랑 같이 쉬면서, 푸딩을 먹이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황금 사신에 비해서도 푸딩을 천천히 먹는 푸른 사신이 푸딩을 반 정도 먹었을 무렵, 붉은색 비상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삐이익. 삐이익.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길한 붉은 빛이 계단 층계를 비췄다.

    도대체 뭐지?

    하필이면 이런 때에 비상이라니!

    세희 연구소는 비상사태가 기준이 엄청 높아서, 비상벨이 울릴 정도면 진짜 큰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피아노 치는 파란 도마뱀이 화가 나서 피아노로 사람을 때려죽인 정도가 아니면 울리지 않을 텐데….

    푸딩을 열심히 먹던 푸른 사신도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스아아악.

    그 순간 비상 층계참에 있는 강철 문에서 날카로운 절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새의 부리가 강철 문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강철 문을 자르고 튀어나온 것은 <유리 플라밍고>였다.

    아름답게 빛을 투과하고 반사하는 유리처럼 투명한 재질로 이루어진 플라밍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오브젝트였다.

    가만히 있을 때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었다.

    분명 얌전하고 공격성이 없어서 안전한 오브젝트로 분류됐을 텐데?

    하지만 지금 유리 플라밍고의 모습은 난폭하고 공격성이 가득해 보였다.

    푸른 사신이 보안실 직원의 앞으로 나서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을 수놓았다.

    <저희를 지켜주세요!>

    푸른 사신과 보안실 직원을 둥글게 감싸는 물방울 보호막.

    하지만 유리 플라밍고는 보호막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잔이 울리는 듯한 발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직원이 여차할 때를 대비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강철도 자르는 부리, 그리고 플라밍고의 당당한 태도.

    그 두 가지가 직원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푸른 사신은 천천히 다가오는 플라밍고에게 겁먹은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물로 만든 바늘 10개!>

    허공에서 물이 뭉치고, 날카롭게 벼려져 플라밍고에게 쏘아졌지만,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머리를 살짝 뒤로 당긴 뒤, 총알처럼 쏘아지는 새의 부리는 물방울을 가볍게 찢어버리고 푸른 사신을 노렸다.

    직원은 푸른 사신을 품에 안고, 부리를 피해 굴렀다.

    미리 피할 준비를 한 덕분에 직원은 푸른 사신을 부리로부터 지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부리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허벅지가 큼지막하게 잘려 나갔다.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손아귀를 내려다보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충격받은 표정의 푸른 사신이 보였다.

    <아프지 말아 주세요!>

    <아프지 말아 주세요!>

    <아프지 말아 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자열과 함께 고통이 천천히 가시기 시작했다.

    푸른 사신의 마법이겠지.

    직원은 손바닥으로 푸른 사신을 계단 밑으로 내려보내려고 했지만, 푸른 사신은 가기 싫다는 것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푸른 사신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플라밍고 앞에 섰다.

    푸른 사신의 용기 있는 행동은 플라밍고가 귀찮은 것처럼 발을 휘두르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걷어차인 푸른 사신은 아픈 것처럼 배를 끌어안고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계단 층계참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통.

    계단 난간 위, 계단 층계 위, 온갖 장소에서 황금 사신이 머리를 내밀고 쳐다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화가 난 표정의 황금 사신들.

    플라밍고는 그 광경을 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앞으로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점점 플라밍고가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플라밍고가 들어왔던 강철 문을 지나자마자, 등을 돌리고 전력으로 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사나운 표정의 황금 사신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

    <불변하는 검은 공>의 거대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밀실 공포증에 걸릴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중앙에 원형 테이블 한 개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공간.

    검은 돌로 이루어진 공간 내부에는 나무로 된 평범한 원형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치 어두운 공허의 바다에 표류하는 섬과 같은 느낌으로 탁자는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나무 탁자는 나뭇결 하나하나 의도를 담아 만든 것처럼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탁자 위에는 아주 작은 의자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나는 신기한 마음에 그 의자 중 하나를 들어 올려서 살펴보았다.

    미니 사신용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작고, 딱 알맞은 크기의 의자였다.

    고풍스러운 탁자와 미니 사신용 의자.

    이 기묘한 가구를 둘러싼 검은 벽에는 정체불명의 글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지구상의 어떤 문자와도 닮지 않은, 어떤 상징처럼 느껴지는 문자열이었다.

    그 글자들에는 섬뜩한 광기와 절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단단한 돌을 손가락으로 파 내려간 광기의 흔적.

    글자들을 이루는 홈은 오래된 피의 잔해로 얼룩져 있었다.

    <신을 죽인 마도서를 없애야 해.>

    <신을 죽인 마도서를 없애야 해.>

    <신을 죽인 마도서를 없애야 해.>

    벽면에는 정신병자가 집착적으로 쓴 것처럼 같은 문장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까지 가득.

    그리고 내가 치운 미니 의자 자리에도 핏자국이 보여서, 치워서 확인해 보니 나무 탁자에도 글씨가 파여 있었다.

    진하게 피를 머금은 글자.

    <내 염원이 신에게 닿기를.>

    그 글씨를 손으로 건드리는 순간, 엄청난 양의 장작이 밀려들어 왔다.

    절망, 비통 그리고 희망.

    온갖 감정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였다.

    감정이 모두 내 장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공간은 힘을 잃고 우그러들듯이 수축하더니 나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제임스 연구소로 돌아와 있었다.

    ***

    <불변하는 검은 공>은 물처럼 꿀렁거리더니 사신이를 삼켜버렸다.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자, 제임스도 입을 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군.”

    “사신이가 사라졌는데 괜찮을까요?”

    내 질문을 듣자, 제임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을 것 같나?”

    “어,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신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불변하는 검은 공>이랑 회색 사신이 뭔가 상호작용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제임스가 말하는 사이 <불변하는 검은 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서 사신이가 나타났다.

    멍하니 서서, 구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사신이.

    뚜방뚜방.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사신이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불변하는 검은 공>은 성공이군. 다른 0호 유물들은 이송 중이니까, 우리는 그전에 ‘제임스 연구소’ 투어를 시작하자고.”

    ‘미국까지 와서 관광도 안 하고 가면 억울하지 않나?’라고 덧붙이며 제임스는 <불변하는 검은 공>이 있던 공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신이의 손을 꼭 쥐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듯이 다양한 장비를 들고 나타난 연구원들이 <불변하는 검은 공>이 사라진 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네.

    제임스는 왜 사신이에게 0호 유물을 먹이고 있는 걸까?

    ***

    제임스 연구소는 상당히 넓은지, 전기로 움직이는 카트를 타고서 투어를 시작했다.

    나는 대용량 푸딩을 품에 안고, 예린이의 무릎에 앉아서 연구소를 구경했다.

    예린이의 품에 안겨, 맛있는 푸딩을 먹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불변하는 검은 공>을 처리하고 뭔가 능력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그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는데, 푸딩을 먹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었다.

    몰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필요하면 알아서 생각나겠지, 뭐.

    제임스가 운전하는 카트가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타고 오르자, 결국 거대한 장벽 위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임스 시티 외곽에서 시작된 장벽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웅장한 존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거대한 존재는 어두운 푸른색의 나무였다.

    “<불변하는 검은 공>이 제임스 시티 설립의 계기였다면, 저 나무가 제임스 시티 유지의 이유라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제임스가 가장 먼저 보여줄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다만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장벽은 나무를 가두는 것처럼 보였고, 장벽 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측장비는 나무를 향한 인간의 두려움의 형상화로 보였다.

    장벽 중앙의 나무는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한 존재감을 흩뿌렸다.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의 줄기는 마치 대지의 심장 박동처럼 남색 빛으로 박동했다.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빛은 마치 명계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와, 유리 같은 게 마구마구 날아다니네요?”

    예린이는 나무가 흩뿌리는 투명한 파편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나무는 잎사귀 대신 조각난 유리 파편 같은 것들이 빙글빙글 돌며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혼란스럽게 나무 주위를 날아다니며, 불길한 빛을 받아 만화경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파편들.

    하지만 그 파편들은 터무니없는 파괴의 씨앗들이었다.

    찢긴 공간의 파편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인간이 저 근처로 가면 큰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았다.

    저 나무는 주변 공간을 계속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 나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나무는 저런 장벽으로 막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괜찮은 거 맞나?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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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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