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 반 시진밖에 하지 않았다네!”
“그렇게 많이 지났습니까?”
“반 시진 정도는 더 할만하지 않나.”
“죄송하지만 내공이 바닥을 치는 중이라서 말입니다.”
“아쉽구나. 오랜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거늘.”
비무에 너무 집중했던 탓인가.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을 줄이야.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나를 보며 눈을 빛내는 사람들.
그리고…
“…어린애가 따로 없네.”
혜령이가 나를 향해 정신없이 손을 흔들어대는 것에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는, 다시 맹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자네 이제 정말 바빠지겠군.”
“몰래 투서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럼 자네가 말한 대로 나한테까지 서찰이 오지 않았을 걸세. 자네의 말이 맞다면 말이야.”
“잘 읽어보시고 알아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마교지부 몇 개를 털어가면서 구한 물건이니 어지간해서 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러고도 맹주가 암살당하면 그건 맹주 잘못이리라.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뭐, 애초에 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총군사를 보면 그럴 일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자네, 무림맹에서 일하지 않겠나? 자네를 위해 부대 하나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네.”
“말씀은 감사하지만…지금은 안 됩니다. 할 일이 있으니.”
“흠, 그런 직함 하나 정도는 줌세.”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내가 무림맹에서 딱히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막 줘도 되나.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맹주는 킬킬대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자네 하나 붙잡는 걸로 이 정도면 싼값이니. 어차피 자네는…마교를 적대하고 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무림맹의 지원을 받을 이유는 충분하네.”
무림맹 입장에선 마교를 상대할 고수가 하나라도 더 많으면 좋다 이건가. 당장 해남검문이 습격당하고, 무림맹 주변에 숨겨져 있단 마교지부들이 드러났으니 무림맹도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할 터.
무림맹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훨씬 수월해지는 거기는 한데.
이제 와서 강제로 원작 흐름에 세상이 맞춰지는 게 아니면 마교의 전력은 눈에 띄게 약해진 상태일 터.
상황 자체는 충분히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면서 약해진 마교의 전력을 더 깎아내면 되리라.
가능하면 마교의 주전력이 중원에 들어오기도 전에 섬멸하는 게 가장 좋긴 하겠지만…그건 힘들다고 봐야지.
그놈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놈들도 아니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흘 후에 집무실로 오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아쉽지만…일을 하러 가야겠네.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비무하세.”
맹주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나도 똑같이 등을 돌려 비무장을 빠져나왔다.
————————–
“아저씨! 대단했어요! 맹주님이랑 비등하게 싸우다니!”
“비등은 무슨. 맹주님이 봐주신 거지.”
잘 쳐줘도 7할 정도 뽑아낸 것 같은데.
근본적인 오러의 양이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오러아머를 믿고 들이대는 돌격도 잘 통하지 않고, 배워둔 무공이 워낙 많다 보니 변칙적인 공격도 쉽게 대응하고.
맹주가 괜히 맹주가 아니라는 걸 몸소 체감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 강해질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비무였습니다. 제 평생 그런 비무를 다시 볼 일이나 있을지…”
“그 정도는 아니야.”
비무는 어디까지나 실전을 가장한 연습.
실전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비무라는 이름으로 온갖 사람들과 검을 섞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게 정파의 장점이기도 하지.
딱히 중심이 되는 세력이 없는 사파는 말할 것도 없고, 마교는 애초에 기승전 생사결로 꼬라박는 게 일상인 놈들이고.
피를 흘리지 않고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점이 정파의 강함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겠지.
“아저씨, 이제 뭐 할 거예요?”
“일단 힘드니까 쉰다. 그리고 나흘 후에 맹주님이랑 잠시 이야기 좀 하고…운남으로 가야지.”
“운남이요?”
“얘 고향. 슬슬…단서를 찾아야지.”
단서라기보단 목경이 숙부가 묻힌 곳에 들르는 거랑, 운남단가의 비동에 데려다주는 것.
그리고…운남단가를 몰살시킨 표면적인 원흉을 족쳐서 진짜 단서를 찾아내는 것.
원작대로라면 마교가 모종의 이유로 운남단가를 몰살했으니, 그 이유가 원작과 같은지 확인해보는 작업이 되겠지.
원작과 같다면 이후 흐름도 비슷하게 갈 테고,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가도 늦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서둘러야 해. 시간이 더 지체되면…단서고 뭐고 증발해버릴 수 있으니까.”
괜히 여유롭다고 밍기적대다가 핏물에 단서가 전부 씻겨나가 버리면…운남단가의 일은 오리무중에 빠질 터.
목경이에게 약속한 입장에서 그런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은공…”
목경이가 드물게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도 예쁜 애가 저러니까 쳐다보기 부담스럽네.
내 볼을 찌르는 시선에 슬쩍 눈을 돌려 혜령이를 쳐다보니, 혜령이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목경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신경 쓰이지만 뭔가 하기는 좀 그런 상황이라는 건가.
“그러니까 목경아 혜령아, 둘 다 떠날 준비는 미리 해둬라.”
그리고 슬슬 괜찮은 말을 찾아볼까.
이제 말 산다고 쪼들릴 재력도 아닌 데다, 결국 장거리 이동은 경공보다는 말이 더 유리하니까.
어디서 좋은 말을 구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해남관으로 돌아갈까.”
땀도 흘렸으니 좀 씻어야지.
우리는 곧장 해남관으로 향했다. 해남관으로 가는 동안 무수한 시선을 받았지만, 딱히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걸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 양옆에 있는 애들 때문일까. 나는 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혜령이를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앳된 티가 나는 폭력적인 몸매의 혜령이는 내 시선이 느껴지자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배시시 웃었다.
“헤헤. 아저씨, 제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뭐…그렇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혜령이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가슴이 내 팔을 지긋이 누를 정도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꼭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니라.
감성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최소한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노리는 여자들의 마수는 덜 뻗쳐올 테니까.
혜령이가 어디 밀리는 신분…이긴 한가?
오대세가의 영애 같은 부류들보다는 아무래도 좀 모자란 부분이 있기는 하니.
“아저씨 정말 좋아요.”
“그래그래.”
“아저씨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아닌데.”
“에이, 맞네요.”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해남관으로 돌아오니, 백장로가 우릴 마중 나왔다.
“어서 오게나. 비무는 잘 봤다네. 자네…정말 대단하군.”
“과찬입니다.”
“이게 과찬이면 환골탈태 정도는 해야 과찬이 아니게 되는 건가? 겸손할 필요 없네. 자네 나이에 초절정고수가 된 건 무림 역사를 따져봐도 매우 드문 일이니.
어찌 보면 자네가 후기지수를 넘어 대종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볼 수도 있다네. 우리 해남검문의 개파조사처럼 말일세.”
개파조사…라.
내가 여기서 사람들 모아서 아츠를 가르치면 문파를 만들게 되는 거나 다름없나. 문파의 문주가 된 나를 상상해보니,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데 굳이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아츠를 가르치더라도 자식이든, 아니면 쓸만한 제자를 찾아서 키우든 하는 게 나을 테니까.
“딱히 문파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냥 해본 소리니 괘념치 말게나.”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습니까?”
오늘따라 해남관이 조용하네. 기합 소리든, 아니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든 나름 사람 사는 소리 들리는 곳이 해남관이었는데.
“자네 비무를 보고 자극을 받은 건지, 다들 비무장 사용신청서를 작성하러 본관에 갔다네.”
“아.”
그렇구만.
“같은 나이에 이리 높은 성취를 이룩한 자가 있는데 어찌 편하게 쉴 수 있겠나?”
“그렇군요.”
“아, 내가 피곤한 사람을 너무 세워뒀군. 들어가서 푹 쉬게나.”
“그럼 수고하십시오.”
“내일 봅세.”
우리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
“위 대협?”
“음? 무슨 일입니까?”
“그,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어제오늘 손님이라는 울림에 좋은 의미가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근 이틀 동안 찾아온 손님 중에 귀찮지 않은 손님이 없었는데.
괜히 여자들이랑 어색하게 눈치싸움 하기도 그렇고.
…가장 큰 건 혜령이 심기만 쓸데없이 불편해지는 거지만.
일단 생각 없으니까 가라고 말은 했는데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이번엔 누구입니까?”
“그게…서련 소저입니다.”
응?
예상치 못한 인물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요일…아임 헝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