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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5

     

    아셀라가 자신만만하게 적은 마지막 대응.

     

    그곳엔 제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해 각 가정마다 상비약을 구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비약, 설마 아스피린과 요오드포름도 포함인가?”

     

    “물론이야. 소화제와 연고도.”

     

    헤이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관할구의 서민에게 모두 배포할 정도면 어마무시한 양이다, 아셀라. 네 치유사들이 몇 달이고 만들어야 했을 텐데. 심지어 고트베르크도 자리를 비웠지 않나.”

     

    헤이케가 아셀라를 의심했다.

     

    라스가 만드는 약품들은 아직까지 그 양이 희소하다.

     

    그녀 역시 천 명의 기사가 사용할 정도의 양을 겨우 라스에게 납품받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만한 대량의 약품을 난데없이 공급하겠다니.

     

    “어떻게 공수했나.”

     

    아셀라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이 시범 운영을 시작했거든. 조금 있으면 정규 가동도 시작해.”

     

    월광궁에게도 지분이 있었기에 시범 운영에 대한 내용은 네리아가 공문을 보냈었다.

     

    그를 보고 아셀라는 이 작전을 떠올려 약품 샘플 납품을 요청했다.

     

    “제약공장.”

     

    헤이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도 당연했다.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은 월광궁과 서부 공작이 유이한 투자자다.

     

    후발주자가 늦게 따라올수록 유리해지는 특성을 가진 만큼 외부에는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헤이케도 약품이 곧 저렴하게 대량공급된다고 알았다면 굳이 프리미엄을 붙여 구매하지 않았을 터였다.

     

    “슈프레 상단의 배는 상류에서 오지. 북쪽에서 약품도 잔뜩 싣고 있거든. 대략 이 가격에 공급될 거야.”

     

    터무니없이 낮은 숫자였다. 아직 시범 운영이었고 투자자에게 보낸 샘플이기에 원가로만 계산됐다.

     

    서민들은 은화 몇 닢에 상비약 세트를 구매하게 된다.

     

    라우가가 아셀라의 의도를 눈치챘다.

     

    “말도 안 되게 싸잖아. 아직 황실에서 장부에 기록할 이 약품들의 단가는…”

     

    “여기 적혀 있네.”

     

    아셀라가 목휘궁의 납품 내역을 제시했다.

     

    “…과연.”

     

    헤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그녀는 희소성 때문에 다른 귀족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라스에게 약품을 고가에 구매해 왔다.

     

    장부에 기록될 단가 기준은 목휘궁의 기록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일 배포되는 약품은 장부에 고가로 잡힌다.

     

    아셀라의 관할구역 가계 자산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뻥튀기될 것이었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다. 장부에 기록될 단가 조정은 검토에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 안 있어 수정되겠지만 내일은 아니다.

    그 전에 승부는 끝난다.

     

    목휘궁의 자료를 이용해올 줄이야.

    허를 찔린 것은 자신이었다.

     

    헤이케가 인정했다.

    아셀라의 수가 자신을 앞섰다.

     

    그녀가 패배를 인정하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아셀라, 그 대응을 마지막으로 제출하겠어?”

     

    라우가가 감탄하며 아셀라에게 물었다.

     

    이걸로 월광궁의 승리는 확정된다.

     

     

     

    그런데, 아셀라가 대답이 없었다.

     

    “아셀라?”

     

    라우가가 이변을 눈치챘다.

     

    아셀라의 뺨을 타고 주륵,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꿀꺽, 간신히 침을 한 모금 삼켰다.

     

    “…제출은.”

     

    아셀라의 손이 떨렸다.

     

    아직 문서를 완성하지 못했다. 적어야 할 내용이 많이 남았다.

     

    “…윽.”

     

    손에 쥔 깃펜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복부에서 올라오는 통증.

     

    뇌수를 잡아먹을 듯 쏟아지는 고통에 아셀라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팔을 짚었다.

     

    “아셀라, 최종 대응을 제시해.”

     

    라우가가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그게 중립인 입회인으로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아셀라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알아챘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미 아픈 상태였고 이 자리에서 내내 통증을 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아셀라가 제시를 실패하면 기껏 준비한 약품도 무용지물이 된다. 오늘 서민 가정에 배포될 일은 없어진다.

     

    승리는 헤이케에게 돌아가 버린다.

     

    “아셀라!”

     

    정신을 차리라는 라우가의 외침이 무색하게, 아셀라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우당탕!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버팀목이 무너지고, 와르르 쓰러진다.

     

    “황녀님!”

    “황녀 전하!”

     

    뒤에서 대기하던 시녀장과 클로에가 달려와 아셀라를 부축했다.

     

    클로에가 즉시 응급처치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릴 일은 없었고, 결국 자리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옆 방으로…!”

    “바, 바로 진료를…!”

     

     

    월광궁이 귀빈실을 나서고, 테이블에는 라우가와 헤이케만이 남았다.

     

    헤이케는 아셀라가 힘을 너무 줘서 끝이 부러진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집념이 느껴졌다.

     

    “…후우. 최종 대응을 제시하겠어, 헤이케?”

     

    라우가는 마음이 착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회인으로서 역할은 다해야 하니까.

     

    헤이케는 잠시 고민하다가 금방 문서를 작성하고는 라우가에게 넘겼다.

     

    “선물거래로 밀을 구매한다. 과연, 이러면 장부에 순자산만 늘어나겠구나. 이걸로 네 승리가 확정되겠…”

     

    문서를 읽어나가던 라우가가 숫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금화 1만2천 개가 아니라 7천2백 개 어치의 밀을 구매한다, 틀림없지?”

     

    “틀림없다. 참고로, 양측의 승점이 똑같을 때 어떻게 할지는 정하지 않은 것 같다만.”

     

    헤이케가 라우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입회인의 재량대로 처리하는가?”

     

    라우가가 헤이케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만한 규모의 경제를 두고 벌이는 승부에서 동점이 나올 리가 없으니 안 정했지.”

     

    탁, 라우가가 문서를 덮었다.

     

    “무승부로 끝내겠어. 이 승부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종료야.”

     

    “승복하지.”

     

    두 황녀가 말없이 열기가 모두 빠져나가 식은 찻잔을 들이켰다.

     

     

     

    ***

     

     

     

    “어우.”

     

    텔레포트 게이트는 사용할 때마다 속이 참 안 좋아진다.

     

    나는 메슥거림을 참아내며 정신을 겨우 차린 후 타냐의 부축을 받으며 궁을 나섰다.

     

     

    찌르라기가 운다.

    밤이 어둑어둑 내린 황실이었다.

     

    대충 2개월 반만의 귀환인가. 오랜만이다.

     

    한겨울이지만 북부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디, 아뮬렛은 잘 챙겼고.”

     

    아셀라는 자고 있을 시간이다.

     

    상태창을 잠깐 확인하니 이게 웬걸.

     

     

    [No. 101 : 마력폭주 45% → 67% ]

     

     

    아셀라의 병세가 급격하게 안 좋아져 있었다. 좋지 않은 타이밍이다.

     

    “큰일인데.”

     

    “황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그런 것 같아. 서두르자.”

     

    타냐, 휴고와 함께 월광궁으로 향한다.

     

    월광궁 기사단이 나를 알아보고 즉시 경례를 붙이며 보고를 올렸다.

     

    “서, 서, 서, 선생니이이임!!”

     

    클로에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눌러 붙었다. 고생이 많았는지 거의 몸체가 슬라임이 될 지경으로 녹아있었다.

     

    “화, 황녀님께서!”

     

    “어디 계셔?”

     

    나는 바로 아셀라가 있는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시녀장이 그간 있었던 일을 개략적으로 설명해줬다.

     

    아셀라가 헤이케와 한 판 붙었다는 이야기였다. 서로 승계권까지 걸었으나 다행히 무승부로 끝났다고 했다.

     

    문제는 그간 점점 아셀라의 상태가 악화되어서 조금 전에 쓰러져 기절했다고 했다.

     

    “제가 들어가서 검사하지요. 빠른 시일 안에 수술 날짜를 잡는 게 좋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조심히 아셀라의 침실로 들어간다.

     

    어둠이 가득한 방. 넓은 침소에 색색거리는 그녀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확인한다.

     

    은은한 달빛이 비쳐 드러난 얼굴은 편안하게 눈썹을 풀고 있었다.

     

    “아셀라.”

     

    대답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가워서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팔에는 링거를 꽂아놨다. 지금은 마약성 진통제의 투약을 마치고 수액이 들어가는 중이다. 클로에가 처방해놨다.

     

    편안하게 꿈나라의 구름 위를 몽실몽실 떠다니고 있겠지.

     

    “진단.”

     

     

    ―――――――――――

    · 이름 :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 체력 : 17 / 22

    · 상태 : 심각한 통증이 수반된 장기적 부상

    · 부상 : 악령 융화 저주 / 급성 담낭염 / 담석증 / 담도산통

    · 위치 : 담낭 (쓸개)

    · 기분 : 외로움

    ―――――――――――

     

     

    이제 기본 진단으로도 아셀라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건강 상태나 체력은 괜찮다. 그간 식단을 잘 지킨 덕분이다.

     

    ‘팀과 공유할 촬영 자료가 필요해.’

     

    MRI를 발동하려니 메시지가 떴다.

     

     

    [MRI가 B로 랭크업했습니다.]

     

     

    반가운 메시지였다.

     

    스킬을 사용하니 변화가 있었다.

     

    환자의 몸에 손을 가져가서 자기장을 발생시켜야 했던 이전과 달리, 엑스레이처럼 쳐다보기만 해도 상태창에 절로 결과가 금방 나타났다.

     

    훨씬 편리해졌다.

     

    아셀라의 체내 사진을 상태창에 꼼꼼하게 기록한다. 이 자료는 나중에 수정구에 출력할 수 있다.

     

    채혈은 진통제 투입 전에 클로에가 마쳐놨겠지. 데이터는 충분하다.

     

    슬쩍 아셀라의 배에 손을 올려본다.

     

    이만큼이나 상태가 악화했으니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수술을 진행하고 싶다.

     

    여기에 칼을 대는 건가.

     

    다름 아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귓가에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스.”

     

    아셀라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깬 건 아닌 듯했다. 반쯤 잠꼬대인가.

     

    “…돌아왔어?”

     

    그녀가 나를 향해 양손을 뻗으며 손끝을 애절하게 꼼질댔다.

     

    꼭 안아달라는 표현 같았다.

     

    나는 피식 웃고는 침대에 살짝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예, 황녀님. 못난 주치의가 돌아왔습죠.”

     

    아셀라는 한참이나 나를 보면서, 내 가운을 만지작거리고는.

     

    “…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붙여왔다.

     

    드러났던 그녀의 배가 내 옆구리에 닿았다.

     

    “벌은 안 주시나요? 말도 없이 몇 달이나 자리를 비웠었는데요.”

     

    “…괜찮아.”

     

    아셀라가 숨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꿈이니까… 괜찮아.”

     

    그녀는 내 가슴팍이 자기 자리라는 듯 머리를 파묻고는.

     

    “…같이 자고 싶었어.”

     

    그런 소소한 희망사항을 짧게 입에 담았다.

     

     

    새근새근, 뭐라 이야기할 틈도 없이 다시 아셀라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어떻습니까.”

     

    휴고가 내게 물었다.

     

    “밤이 늦었어. 우리도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고. 피곤해서 중대사를 망치면 변명도 안 되잖아.”

     

    “그 말씀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의 건강 상태는 양호해. 반대로 병세는 즉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 내일 바로 수술 일정 관해서 회의한다. 내의원 팀원 전원 소집해 둬.”

     

    “알겠습니다.”

     

    휴고와 클로에를 해산시키고 나도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셀라의 생각은 어느 정도 들었다고 생각한다.

     

    저런 상태였으니 가감없는 솔직한 생각이기도 했겠지.

     

    그래도, 한 번 더 그녀와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100코인 후원 어제에 이어 연속으로…! 어떤 캐릭터가 매력 있으셨을까요, 정말정말 궁금해지네요…! 감사합니드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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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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