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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6

    짙은 푸른색으로 맥동하는 나무, 그리고 장엄하게 펼쳐진 장벽. 

    신비로운 색으로 빛나는 유리 파편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중,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해. 장벽 위에 오래 있으면 별로 안 좋거든.”

    약간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사신이를 품에 안고 카트 위에 얌전히 올라탔다.

    다시 보고 싶으면, 나중에라도 다시 볼 수 있겠지?

    미세한 모터 동작음만을 남기는 카트를 타고 통로를 내려오던 도중, 카트를 운전하는 제임스가 살짝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지금 손목시계랑 핸드폰 시계랑 비교하면 깜짝 놀랄걸?”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해 보니 제임스의 말대로 꽤 놀랐다.

    분명 공항에 도착해서 시계를 맞췄던 것 같은데, 시간이 거의 2시간 넘게 차이가 났다.

    손목시계의 시간을 다시 핸드폰 시계랑 일치시키면서 물었다.

    “설마 이거, 방금 올라갔던 장벽이랑 관련 있는 현상인가요?”

    “용케 알아챘군. 저 나무의 영향인지, 아니면 저 나무가 있는 공간이 특이한 건지 몰라도 장벽 위는 시간의 흐름이 엉망진창이야.”

    사신이도 흥미로운지, 쉬지 않고 푸딩을 먹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제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가서 구경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제멋대로라니 왠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장벽 위는 괜찮은 편이지, 시간이 50% 정도 증감하는 정도니까 말이야. 나무가 있는 장벽 너머로 들어가면 더 문제가 심각해. 장벽 안쪽에서 하루만 있다가 나와도, 시간 괴리가 엄청나지더라고.”

    장벽 너머에 호기심이 생기는지, 사신이의 더듬이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무리 사신이라도 장벽 너머로 몰래 넘어가진 않겠지?

    사신이의 더듬이를 입으로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

    미니 사신 정원의 캐노피 하늘 아래, 즐거운 표정의 황금 사신들이 파티를 열었다.

    황금 사신들은 잔뜩 모여서 활기와 애정으로 가득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황금 사신들의 중심에는 커다란 모자를 쓴 푸른 사신이 있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빙글빙글 회전하고, 뚜방뚜방 걸어 다니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운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쑥스러운 것처럼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푸른 사신의 정면에는 미니 사신 사이즈의 캠프파이어가 활활 타올랐다.

    황금 사신이 뛰어다니며 일으키는 미약한 바람에 캠프파이어는 춤을 추며, 미니 사신들의 파티의 모습을 그림자로 만들었다.

    캠프파이어는 달콤하고 중독성 있는 향기를 내뿜었는데, 설탕처럼 달콤하고 맛있는 향기였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이 현장에서 대조적인 요소는 딱 하나.

    불길 한 가운데서 타들어 가고 있는, 투명한 설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설탕 플라밍고였다.

    유리 플라밍고는 막내를 다치게 한 죄로 설탕 플라밍고로 다시 태어나서도 불에 태워지며 파티장을 밝히는 역할을 맡았다.

    <이제 풀어 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푸른 사신만이 이제 풀어줘도 괜찮지 않냐는 의견을 제시해 봤지만, 황금 사신들은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브젝트에겐 단호한 황금 사신들이었다.

    ***

    장벽에서 내려오니, 어느새 저녁 시간.

    나야 배고프지 않지만, 예린이는 조금 허기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은 오늘의 투어를 마치고 연구소 내부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뷔페식으로 된 식당에서 제임스는 접시를 가지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내일부터 도시 내부를 안내해 주지. 다들 오브젝트 관계자라는 점만 빼면 놀거리도 많고, 관광하기에도 괜찮아.”

    나는 탱글탱글한 과일 푸딩이 맛있어 보여서, 접시 안에 푸딩만 잔뜩 집어넣고 예린이 옆자리에 앉았다.

    오브젝트가 혼자서 푸딩을 가져가서 그런지,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기분이다.

    그렇게 신기한가? 

    왠지 앵무새가 뷔페에서 밥을 챙겨먹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 같은 표정이네.

    하지만 나에게 꽂히는 시선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이었다.

    예린이도 그 시선을 보내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제임스에게 소근거렸다.

    “저 사람이 엄청나게 노려보네요. 도대체 뭐에요?”

    “음? 아, 부시장이로군. 나와는 오브젝트 관련으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야.”

    제임스는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며 말했다.

    “제임스 시티에는 경쟁과 발전을 위해서 많은 연구소가 입점해 있는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분류가 있어.”

    제임스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는 결국 인류는 오브젝트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쪽이랑, 공존하면 결국 잠식되어 멸망할 테니 적극적으로 오브젝트를 배제하자는 쪽이지.”

    “그럼, 제임스는 공존파고 부시장이라는 사람은 배제파겠네요.”

    “그렇지. 배제파야. 그래서 회색 사신 같은 컨트롤이 힘든 오브젝트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을 엄청나게 반대했던 사람이지.”

    물리 면역이 즐비한 오브젝트를 인간이 배제할 수 있을까? 

    절대로 못 할 것 같은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라서 나는 관심을 끊고 끊임없이 푸딩과 케이크를 먹었다. 

    식사를 마친 예린이는 나를 끌어안고는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살찐 사신이가 보고 싶다. 뱃살이 통통하게 튀어나오면 정말 귀여울 것 같은데….”

    그리고 아무리 먹어도 홀쭉한 내 배를 아쉬운 듯이 통통 두들겼다.

    ‘?’

    예린이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이상한 걸 아쉬워하고 있어.

    식사를 마치자, 제임스는 우리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격리실로 안내했다. 

    “후후, 이번에 준비한 격리실은 대단하다고? 아마 회색 사신도 계속 여기 있고 싶어질걸?”

    “에이, 세희 연구소가 얼마나 시설이 좋은데요! 첨단 시설은 좀 부족해도, 사신이를 위한 시설은 완비되어 있다고요!”

    예린이의 반발에 제임스는 ‘과연 그럴까?’고 작게 덧붙이며 격리실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실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격리실 하나에 불과한데도 세희 연구소 전체와 비교도 안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공간이었다.

    그 내부는 워터 파크처럼 꾸며져 있었다. 

    신선한 과일부터 푸딩, 그리고 쿠키까지 다양한 음식이 진열된 식당.

    오브젝트 대상으로 만들어져, 위험하지만 훨씬 스펙타클해 보이는 워터 슬라이드.

    중앙에 위치한 인공 바다에서는 커다란 파도가 춤을 추고 있었고, 수많은 놀이기구가 그 바다를 둘러싸듯이 배치되어 있었다.

    내가 놀기엔 조금 유치하지만, 재미는 있어 보이네. 

    나보단 미니 사신들이 좋아할 것 같아.

    발밑에서 미니 사신들을 불러냈다. 

    아쉽게도 이런 활동적인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 푸른 사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황금 사신들은 굉장히 기대되는 표정으로 격리실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뚜방뚜방.

    나도 제임스의 성의를 봐서 ‘조금’만 즐겨보기 위해서 걸음을 옮겼다.

    ***

    워터 슬라이드가 어찌나 고속인지, 황금 사신이들이 수면에 튕기는 돌멩이처럼 수면을 튕겨 다니고 있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날아가면서도 황금 사신이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펑!

    부글부글 끓는 간헐천의 폭발음이 들리고, 신나 보이는 황금 사신이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황금 사신들이 선호하는 놀이기구들은 모두 인간이 타면 죽을만한 것들이었다.

    인간에게는 위험하겠지만, 황금 사신이들에게는 정말 즐거운 놀이기구 같았다.

    사신이도 튜브를 타고 거대한 인공 파도에 휩쓸려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표정한 사신이는 황금 사신이랑 대조적인 표정이었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아주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무표정했지만 양다리는 즐거운 것처럼 파닥거렸고, 머리 위의 더듬이는 신나는 리듬으로 둠칫거렸다.

    “안 돼….”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진짜로 사신이가 미국으로 떠나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도 미국으로 이민 가야 할까?

    제임스가 안내한 격리실은 규모가 너무 엄청나서,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막막한 절망에 휩싸이고 있자 황금 사신이가 어깨 위로 올라와서 볼을 토닥였다.

    “위로해 주는 거야? 고마워.”

    황금 사신이를 손에 안고 쓰다듬었다.

    나를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황금 사신이와 달리, 사신이는 파도를 타고 공중을 유영하느라 바빠 보였다.

    무표정했지만 이 워터파크에서 제일 즐거워 보였다.

    ‘사신이, 정말 재밌어 보여. 나는 쳐다보지도 않네.’

    우울한 마음이 들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몇몇 황금 사신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황금 사신이들에게 나데나데 받으면서 신나 보이는 사신이를 슬픈 표정으로 구경했다.

    ***

    제임스 시티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장벽 압력 제어실은 가장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평소에는 차분함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긴박한 혼돈의 현장이었다. 

    제어 콘솔에는 긴급 경고 문구가 빼곡하게 떠올랐고,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계에서 나오는 경고음은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해 주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제임스를 대신해서 자리한 제임스 시티 부시장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메인 제어판 옆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

    “모두 밖으로 나가!”

    단호하고 명령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는 폭풍 속의 등대처럼 혼란을 뚫고 나왔다.

    제어실 직원들은 두려움과 몇 가지 우려로 물든 얼굴로 망설이고 있었다. 

    기술자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부시장에게 말했다.

    “아직 탈출 반경 계산이 끝나지 않은 데다가, 장벽의 유지를 위해선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딴 건 알고 있어! 그건 알아서 할 테니 모두 탈출하도록.”

    부시장의 말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남자의 사심 없는 최후의 명령이었다.

    그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제어실 직원들은 그의 희생에 눈물을 머금고 탈출을 시작했다.

    직원들이 모두 탈출한 제어실에 혼자 앉아서 부시장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장벽 너머의 영향력이 제어실까지 미치기 시작했고, 공간이 이리저리 잘렸다 붙기를 반복했다.

    메인 콘솔은 사방이 박살 나는 와중에도 꿋꿋이 연산 중이었다.

    부시장은 그것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베어 물고 장벽의 유지를 위해 제어판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장벽을 유지하는 오브젝트에게 현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지를 끊임없이 불어넣었다.

    삐-.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계산 결과가 나오자, 부시장은 긴장의 무게에 약간 떨리는 손으로 그 결과값을 입력했다.

    <예상 피해 범위 30km 이상. 6시간 내로 제임스 시티를 포기할 것.>

    부시장이 입력한 냉정하고 단호한 문구는 제임스 시티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부시장은 흔들림 없는 의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물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담배 연기는 조각난 공간 속에서 위로 말려 올라가며, 부서진 공간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혼돈 속에서도 부시장은 제어판에 손을 단단히 고정하고, 의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도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장벽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육신이 깨어져 나가, 의식이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

    언제나 제임스와 대립각을 세웠던 남자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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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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